< -- 443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이번에 연재되는 부분은 이전에 한 번 연재되었던 부분, 그리고 출판본과 '매우 비슷'합니다. 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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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96년 1월, 셋째아들 오넬론 태자의 결혼식을 맞이하는 황제는 평소 그 쌀쌀맞던 ‘철의 유평대제’ 답지 않게 그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리고 결혼식 직후, 황제가 예고해놓은 '특별한 발표'라는 것이 무언지 감히 예상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사실 그 차갑던 황제가 '이젠 나도 늙었나봐.' 라며 신하들 앞에서 실없이 웃음까지 짓는 모습은 어딘지 어색하기까지 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황제의 이런 뜬금없는 변신에 대신들이 기대를 품기는 고사하고 '저양반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이시려고 저러시나'며 몸을 사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내내 기분이 좋던 황제의 모습은 오넬론의 결혼식장인 황궁 대연회장 아스트라이아 홀에 들어서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황후위 대공을 대신해 함께 입장한 제1개국공신 오르마즈의 팔짱을 꼭 낀 황제의 모습은 아들이 아닌, 자신의 결혼식에라도 나온 듯 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오넬론의 친아버지인 데오도스 호지 경이 동행해야 마땅했지만 황제는 ‘정식 남편도 아닌 남자와 함께 나가기는 싫다’며 대공과 동격인 제1개국공신 오르마즈와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이렇게 함께하고 있었다.
“저 못난 놈.”
결혼식장 한편에서 그 광경을 쳐다보던 북부최고제후 투르케스크 공이 황제와 다정하게 내려오는 딸을 노려보며 대뜸 이를 갈았다. 지난밤 갑자기 사라진 오르마즈를 찾아 밤새도록 시내를 헤맸던 그는 딸이 저 원수같은 황제에게 찾아갔었다는 기가 막힌 소식을 아침에야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라져 아침에야 나타난 것이나, 그리고 만면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저 황제의 표정을 보아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봤자지.”
투르케스크는 딸과 황제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아버지의 곱지않은 눈치를 짐짓 못 본 척, 오르마즈는 불편한 면복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황제의 허리를 한 팔로 살짝 안아주었다.
“고맙네. 오르마즈 경.”
황제가 오르마즈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휴, 오늘이 누구 결혼식이었더라?”
남부최고제후 테번 공이 함께 선 남부제후들 들으라는 듯 비꼬자 자리에서 잠시 웃음이 오갔다. 어딘지 서먹해 보이는 오늘의 신랑신부에 비하면 도리어 가장 다정해 보이는 것이 저 둘이었다.
“그 방정맞은 입 좀 다무시오.”
투르케스크 공이 뚱한 얼굴로 테번에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장난스런 늙은이는 이번엔 그에게 또다시 농담을 건넸다.
“뭘, 태자 사위 맞는 김에 황제 며느리는 어떻겠소? 뭐 저 양반 댁 딸 탐내고 있던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고.”
투르케스크가 이 주책맞은 노인네를 이를 갈며 째려보았다. 자칫 감정싸움으로 번질 뻔했던 둘은 단상에서 들려온 큰 나팔소리에 가까스로 진정될 수 있었다.
테번의 농담대로, 황제는 마치 대공처럼 자신과 나란히 앉은 오르마즈를 연신 올려보며 입가에서 내내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손이 팔걸이가 아닌, 오르마즈의 손등을 내내 짚고 있다는 것까지는 단하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폐하의 사열이 있겠습니다!”
베흔의 목소리에 이번 국혼에 참석한 5백여명의 귀족가문 사절들이 홀 한쪽에 나란히 도열해 섰다. 그리고 오르마즈와 오늘의 신랑신부, 그리고 나머지 태자들과 50여명의 수행원을 동반한 황제는 귀족들 앞을 천천히 걸어가며 그들의 축하인사를 받았다.
“언제쯤 우리 앞에 오시려나.”
투르케스크 공이 딴청을 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일이 그의 생각대로 제대로 풀려줄지, 그의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마구 들썩거리고 있었다.
“아버지, 절 보고 계시겠지요.”
투르케스크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가문의 원수인 저 황제, 아니 꼬맹이는 오늘로 끝이었다. 아버지 빌루이의 끔찍한 죽음을 눈앞에서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그에게 오늘은 그 모든 원한을 되갚아주는 가슴벅찬 날이었다.
순간, 황제의 사열행렬 제일 앞쪽에서 찢어지는 비명과 알아들을 수 없는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조금 전까지도 잡아먹을 듯 눈싸움을 벌이던 테번 공과 잠시 멍한 눈길을 주고받은 투르케스크 공은 짐짓 놀란 듯 수행원들과 함께 그쪽으로 달려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머님! 어머님!”
칼에 찔려 쓰러진 세나우스 2세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건 다름아닌 주페 태자였다. 쓰러진 황제의 가슴을 몸으로 가리고 있던 오르마즈를 급히 옆으로 밀어낸 주페 태자는 자신의 손에 묻은 검붉은 피가 오르마즈의 것인지 황제의 것인지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반사적으로 단검에 코를 가져갔던 오르마즈가 마치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독이다!”
그의 고함소리에 황제를 껴안고 있던 주페 태자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황제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누가보기에도 선명한 칼자국이 깊이 나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품에 안겨있던 황제의 얼굴에도 순간 극도의 공포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할 거면 비키십시오!”
황제의 비단포를 이로 찢어낸 오르마즈는 그의 옆구리에 난 크지 않은 상처에 거리낌 없이 입을 가져갔다.
“위험해요! 누님!”
누나의 행동에 당황한 남동생 일라드가 소리를 질렀지만 오르마즈는 상처에 흐르는 그 검붉은 피를 거침없이 빨아들여 뱉어냈다. 독이 번지면서 온몸을 엄습하기 시작한 고통에 황제의 신음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조금만 견디십시오! 폐하! 제발! 의사들이 곧 해독제를 가져올 겁니다!”
오르마즈의 입은 황제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단검에 함께 베였던 오르마즈도 왼팔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만하게, 제발......”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맹독이 신경계까지 번졌는지 황제의 몸이 심한 경련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서는 더 이상 검은 피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 이런 방법으로는 가망이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의사놈들 도대체 어딨는 거야!”
눈물이 맺힌 오르마즈가 황제의 목을 끌어안은 채 사방을 둘러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런 오르마즈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황제가 이미 망가져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널.......배신.......했는데.......왜......”
황제의 죽어가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오르마즈는 오른팔에 힘을 꽉 주며 그의 크지 않은 몸을 품에 꼭 안았다. 황제가 그를 나무라려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피를 토해냈다.
“왜........날 지키려 한 거냐.......바보 같이........”
황제를 꽉 부둥켜안은 오르마즈는 먼 옛날, 지금과 너무도 비슷했던 어떤 날을 떠올렸다. 황제가 이제 살 가망이 없음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지나가는 악몽 같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황제의 귓가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지금껏 제정신에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한 마디를 짧게 속삭였다.
“그분의 따님을.......제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순간 고통에 겨워하던 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나마 빛을 뿜으며 오르마즈를 뚫어지게 올려보았다. 이 와중에도, 그는 오르마즈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분?”
오르마즈는 자신의 품에 안겨 죽어가는 황제의 검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새겼다. 먼 옛날, 자신의 잘못으로 남편에게 쫓겨난 여인과,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젖먹이 딸을 부탁하며 비슷한 눈빛으로 죽어가던 그의 친아버지 샤미르를 보낼 때처럼.
구급함을 든 의사들이 허둥지둥 도착한 건 이때였다. 갑자기 눈자위가 뒤집어진 황제는 온몸을 비틀며 오르마즈의 손을 피가 날 만큼 꽉 움켜잡았다. 의사들이 황제의 혈관에 주사를 꽂고 해독약을 주입했지만 황제가 살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누님! 누님 팔이!”
반쯤 굽은 채 이미 마비되어버린 오르마즈의 왼팔을 그제야 발견한 동생 일라드가 마치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오르마즈의 눈도 어느새 핏발이 서면서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눈썹에 눈물이 가득 맺힌 오르마즈가 짧게 중얼거렸다.
“그냥.......놔 둬.”
오르마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을 더 이상 보고싶지 않았다.
“그냥.......나도 따라갈 테니.......”
“안됩니다! 이대로는......”
카파키 가 남매들을 헤치고 달려나온 토로 로버넬 경은 일라드의 허리에 있던 검을 즉시 뽑아들며 오르마즈에게 달려들었다.
“필요 없다니까!”
칼을 번쩍 치켜든 토로 경은 넋 나간 사람처럼 악을 쓰는 오르마즈의 왼쪽 어깨를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힘껏 내리찍었다. 이미 독이 번져있는 오르마즈의 왼쪽 어깨 아래가 그의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통째로 잘려나가며 붉은 카펫바닥을 검붉은 피로 물들였다. 팔이 잘려나간 채 온몸을 부르르 떨던 오르마즈도 결국 황제의 옆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폐하! 폐하!”
암살범을 쓰러뜨린 베흔이 사람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달려들었다. 뒤늦게 주입하고 있는 해독약은 황제의 고통의 시간만 연장시킬 뿐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숨쉬기도 버거워진 황제는 제대로 말도 못한 채 헐떡거리고만 있었다. 더듬거리며 오르마즈의 목을 안은 황제는 나머지 한손으로는 베흔의 멱살을 꽉 움켜잡았다.
“오르마즈 경을.......반드시.......살려내고.......자네가.......주페를 지켜주게나.......꼭 약속해.......그리고.......”
검게 변한 황제의 입술은 무언가 더 알리려는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베흔은 황제의 유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한 6명의 태자들이 그 옆에 일제히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 주페를 마지막으로 돌아본 황제는 오르마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황궁 대연회장 아스트라이아 홀은 순간 터져나온 탄식과 울음소리로 술렁이고 있었다.
평생을 바쳐 연인의 딸을 지켜 온 이 소중한 사람, 아니, 죽음과 함께 이제는 영원히 자신의 연인으로 남게 될 그의 살내음을 마지막으로 느끼며 황제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 죽을 수 있는 자신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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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2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다음 파트부터는 새로운 분위기의 현재 이야기와, 완전히 새로운 시기의 과거 이야기가 새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