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45화 (444/1,132)

< -- 445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

.

.

탄현성에서 제파의 원정군과 며칠간의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던 카렐은 남-동부연합군이 도하를 포기한 이틀 후, 결국 성을 근위대의 손에 내주고 일단 퇴각했다. 언뜻 패전으로 보였지만 어차피 필요한 만큼의 시간은 번 후 결정내린 퇴각이기에 카렐도, 그곳을 지키던 조페로 별다른 미련은 없었다.

탄현성에서 1군단과 함께 물러난 조페는 그 남쪽, 수로를 지키는 요충지인 신성으로 퇴각했고, 카렐은 가디언 근위기병들과 함께 바로 황궁으로 돌아왔다.

리에드의 사망이 알려지고, 몇 시간 후 황궁에 허둥지둥 도착한 카렐은 두 구나 되는 친인척의 시신을 눈앞에서 확인해야만 했다.

수송대 기습공격을 훌륭히 성공시켰지만 결국 죽어서 돌아온 사르키스가 황도의 항구에서 황제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외숙부의 시체를 부여안고 울부짖던 솔 역시 그가 달래주어야 했다. 게다가 이암댐과 수로가 다시 뚫리면서 곧 이곳에 도착할 네피의 중상에 관해서는 카렐이 아직 이야기조차 해 주지 못한 상황이었다. 목 아래를 제대로 못 쓰게 된 아버지의 모습에 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카렐은 바로 자신의 사촌의 죽음과도 마주해야 했다.

“확실한가?”

카렐의 물음에 모렌 박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드 공주저하께선 폐하나 대군마마와 별다를 바 없는 유전자 구조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물론, 몇 가지 결함이 틀림없이 있지만 큰 틀에서는........”

순간 격분한 카렐의 고함소리가 133층의 대전을 쩌렁 울렸다.

“도대체.......이런 중요한 걸 왜 아무도 몰랐던 거지! 리에드 공주도 장태자 심사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지 않았냐고!”

카렐이 집어던진 화병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전 기둥에 부딪히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채 씩씩거리는 황제의 모습에 하나같이 겁을 집어먹은 대신들은 하나같이 꿀 먹은 듯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심지어 페로조차도 한쪽에서 한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폐하.”

결국 보다 못한 코리온이 먼저 나섰다.

“말씀하신 대로, 몇 시간이면 나올 손쉬운 검사입니다만 발현자일 가능성을 애당초 생각조차 않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미심쩍은 곳도 없지 않습니다. 시의가 투여한 양은 치사량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리에드가 발현자고, 독감으로 몸이 성치 않았다 해도 그 정도도 못 이겨내고 죽은 것은 어딘지 이상합니다.”

코리온이 격분해 탁자를 마구 내리치던 카렐의 손목을 살며시 붙들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리에드가 발현자였다면, 다른 황족들 중에도 숨겨진 발현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카렐이 이마를 싸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카렐로서는 난생 처음, 아니 그가 인식할 수 있었던 한도 내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겪은 혈육의 죽음이었다.

“종친회장이신 대공주 저하께 연락드려 당장이라도 전 황족을 대상으로 유전자검사를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렌 박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씩씩거리며 서 있던 카렐이 모렌 박사와 보안국장 루토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단순히 발현자 검사만 할 생각은 마라. 황족의 모든 유전자를 모아서 데이터베이스로 만들도록 해.”

“아.......예, 알겠습니다.”

“지금 리쿠 가의 종장은 바로 나다. 황실 묘지의 묘실을 열 권리도 내게 있다.”

“예?”

“마음 같아서는 리쿠 학장에게 이 일을 맡기고 싶으나 학장은 곧 탈라스로 떠나야 하니 그대 둘에게 맡기겠다.”

모렌 박사의 표정이 순간 창백해졌다.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할 이 일을 보안국장에게까지 함께 지시하는 이유를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최소한 ‘황실의 혈통 문제’에 있어서만은 그를 제대로 신뢰하고 있지 않음이 확실했다. 물론, 모렌 박사 스스로도 그 문제에 있어서만은 황제가 자신을 의심한다 해도 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특별보관실에 이미 웬만한 자료가 다......”

“내 3일 후에 황실 묘지에 가서 내 황실 직계 조상의 묘실을 모두 열 것이다. 이부는 묘실 개방에 따른 절차를 미리 확인해 두도록 하고 혹 별도의 행사가 필요하다면 준비해두도록 해라.”

카렐의 선언에 모렌 박사는 물론이고 이곳에 모인 대신들조차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하오나.......조상의 묘실을 여는 것은 그 후손된 도리로서.......”

법무대신 두겐 경이 원리주의 유학자답게 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런 그에게 카렐이 버럭 화를 냈다.

“그래, 후손된 도리로서 그 자손들에게 어떤 병이 유전된 것인지 알아내려 묘실을 연다는 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냐! 어느 후손에게 어떤 병이 유전된 것인지, 어떤 결함이 있어서 황실 혈통에 이런 일이 생기는지를 알아야 대처를 할 것 아냐!”

카렐의 설명이 반쯤 억지스러운 것임을 잘 아는 코리온이 그의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 원리주의 유학자로서 반대의 의사를 표시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다른 말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묘실 개방 전 최대한의 예를 다해 주십시오.”

그도 카렐의 노림수가 무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리에드의 죽음으로 황실이 발칵 뒤집어진 새, 어딘지 미심쩍은 황실 혈통의 비밀에 관해 파헤칠 자료를 얻자는 속셈임에 틀림없었다.

“고맙습니다. 학장.”

코리온의 ‘묵인’을 얻어낸 카렐이 모렌 박사를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특별보관실 자료의 진위 여부를 모조리 검사하도록 해. 전문 감찰관 3명 이상이 입회해서 모든 것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내게 가져오도록 해. 외부에는 극비로 처리하고. 그리고 발현자의 형질이 누구에게로 어떻게 유전되었는지도 반드시 밝혀내라. 알겠나?”

모렌 박사는 황제가 그동안 묵혀 왔던 ‘혈통’의 비밀을 풀기 위해 드디어 칼을 빼들었음을 깨달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정말 불쾌한 곳이네.”

동기생 베흔과 함께 걷던 즈바크가 땀에 흠뻑 젖은 셔츠를 결국 벗어던지며 끝도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베흔이 그의 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웬만하면 입고 있어. 언제 독충이 달라붙을지 몰라.”

“씨발, 이런 데 사람이 살 수나 있는 거야?........어이, 좀 쉬었다가 가자니까.”

즈바크는 수통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물을 입에 털어 넣으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불쑥불쑥 솟은 험준한 바위산 사이로 끔찍하리만치 빽빽한 밀림이 땅바닥을 검푸르게 뒤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라질, 누가 이런 거지같은 데를 ‘초록의 낙원’이라느니 하는 개소리를 한 거야? 그런 새끼 주둥이를 확 찢어놔야지......”

즈바크는 벌레에 물리고 독초들에 스쳐 온통 벌겋게 부어오른 종아리를 꾹꾹 주물렀다. 콜로니를 공포에 떨게 만든 X, 그 중에서도 최강으로 꼽히는 8그룹 출신의 이 무시무시한 전사들도 이 아라무트 정글의 벌레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

기원 45년, ‘침묵의 자매들’ 교단의 최고지도자인 야푸르 빈 다하카르 대신관이 암살당한지도 4년이 지났지만 콜로니는 여전히 혼란에 싸여 있었다.

교단은 후임 대신관의 선임을 놓고 내분에 싸여 있었지만 같은 시기, 민병대 역시 지도자였던 파냐드 리쿠를 잃으면서 마찬가지로 지도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아들 에르네스토는 음험한 성격의 어머니 파냐드보다 훨씬 정력적이고 유능한 남자였지만 매번 이기적인 당파싸움이 그의 발목을 붙들곤 했다.

그렇다보니 콜로니는 지난 몇 년간 기존의 신권정치 세력인 ‘교단’,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도덕정치를 주장하는 ‘민병대’ 사이에 차가운 냉전만이 흐르고 있었다.

“아라무트 촌구석이 뭐 그렇지. 그리고 원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이야기는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법이야.”

앞서가던 베흔 역시 잠시 멈춰 서서 어느새 뜨뜻미지근해진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정글 사이로 난 이 ‘길’은 누군가 일부러 뚫은 것이 아닌, 이곳 원주민들이 자주 오가면서 그냥 풀이 듬성듬성해진 곳에 불과했다. 이것도 인근 화전민에게 ‘언덕 넘어가는 길과 그 중간에 있는 작은 술집’을 물어물어 힘들게 찾아온 길이었다.

“저긴가 보다.”

베흔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웬 연기를 가리켰다. 지금껏 죽네사네 하고 있던 즈바크도 그 말에 정신이 퍼뜩 든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우라질 벌레들 피해서 궁둥이 붙일 수 있으면 아무 데나 좋아.”

이 끔찍한 밀림에 진절머리를 치던 이 두 동기생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연기가 보이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길가’에 나무로 지은 작은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터번 마이뉴-

목각으로 대강 깎아놓은 간판이 모처럼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이런 데다가 술집을 차리는 인간도 다 있냐?”

즈바크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베흔은 피식 웃으며 조금 비뚤어진 그 간판을 다시 똑바로 세워놓았다.

“술집 이름 그대로라면 이만큼 좋은 위치도 없겠지.”

“응?”

“교단 성직자들이 쓰는 바람어(Bahram語)로 ‘마이뉴’는 ‘심성’ 아니면 ‘상념’이라는 뜻이니까.”

“그래, 너답다.”

즈바크가 키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동기이며 ‘8그룹’ 리더인 이 친구 베흔은 다른 단순한 X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승부사였고, 틈만 나면 공부를 하는 학구적인 습관까지도 있었다.

그렇다보니 그가 동맹세력인 ‘제니안’의 유학자들이 쓰는 ‘고대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해석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적인 교단 성직자들이 쓰는 ‘바람어’까지도 구사할 수 있으니 X들 중 가히 최고의 엘리트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베흔은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술집 안에 들어섰다.

다행이 밖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완전히 파리 날리는 가게는 아니었다. 이곳 고갯길을 넘어가는 보따리 장사꾼들인 듯, 4명 정도의 이곳 원주민들이 한구석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이 술집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원주민 노부부가 이 둘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솔직히 자네가 그다지 반갑지 않아.”

술집 제일 안쪽 창가에서 들려온 거친 목소리는 이곳 아라무트가 아닌, 코윈 혹은 쿠트라스의 강한 억양이 섞인 사투리였다. 사과향 물담배를 뻐끔거리며 피고 있던 오르마즈는 담배 연기를 훅 내뱉으며 형식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뭐 이 먼 길을 와 주었으니.......지도자가 날 다시 불렀다는 말 빼고는 아무 용건이라도 이 술집 주인으로서 다 들어주지. 베흔 중령. 아니, 대령이던가?”

“다 아시면서 뭘 새삼스레 물으십니까. 카파키 대령님.”

베흔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의 테이블에 다가섰다.

“난 대령이 아냐. 그냥 카파키 사장님, 아니면 주인장이라고 불러주게나.”

오르마즈가 키득거리며 물담배를 빨았다.

“술집 꼴은 이래도 이게 내 평생의 꿈이었으니까. 손님만 많이 들면 소원이 없겠지만.”

“그동안 찾아온 사자들을 왜 다 죽이셨습니까?”

“내가? 난 그러지 않았어.”

담배연기를 내뿜는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베흔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무서운 위압감에 잠시 몸을 움츠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이 암살수의 회색빛 눈동자에서는 현역에 있을 때보다도 더 무서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두 눈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는 파란빛 다하카르의 문장이 묘하게 섬뜩했다.

“그럼........누구 짓입니까?”

“피다이들 짓이야.”

오르마즈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바하칼리산 럼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겼다.

“교단에서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피다이들이야 원래 근거지가 여기고. 돈만 준다면 내가 아니라 대신관이나 지도자여도 기꺼이 암살에 나설 놈들이지.”

‘피다이’라는 말에 베흔과 즈바크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암살교’로 더 잘 알려진 이곳 아라무트의 괴이한 광신도 집단은 교단과도, 민병대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쪽이든 자신들의 신경을 거스른다면, 혹은 원하는 만큼의 돈이면 자신들의 조직원 '피다이'를 보내 그 누구든 암살에 나설 자들이었다.

“그런데 피다이들이 왜 대령님은 안 죽이고 대령님을 찾아가는 사자만.......”

즈바크가 섣불리 입을 열자 당황한 베흔이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순간 눈을 매섭게 치켜 뜬 오르마즈가 베흔과 즈바크를 노려보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게.......”

“교단에서 왜 날 안 죽이냐고? 자기네 대신관을 죽이고 달아난 원수 같은 암살수를? 직접 가서 물어보게나. 왜 나 같은 놈을 안 죽이냐고. 그래, 자네들한테 매번 ‘이중첩자’라는 의심을 받느니 목에 피다이들 칼이 박혀 죽어주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

“이 병신.”

베흔이 이 철딱서니 없는 동기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즈바크는 오르마즈의 가장 큰 상처를 대놓고 찌른 것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