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47화 (446/1,132)

< -- 447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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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서스에서 출발하는 공용 여객선을 탄 구르베스는 9시간의 긴 비행 끝에 북부의 변방인 쿠트라스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은 먼 옛날 기원전 489년, 콜로니의 첫 번째 정착민이 발을 디딘 역사적인 장소였다. 그리고 이후 기원전 259년에 현재의 황제령 1번 도시인 아케메니아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천도할 때까지, 230여년동안 콜로니의 수도가 되었던 유서깊은 고도(古都)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국 시민들의 일체감을 나타낼 때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쿠트라스의 자손’일 만큼, 제국의 어휘에도 이곳의 역사는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제국 변방의 광공업지역으로 변모했지만 900여년간을 존재해 온 역사 깊은 곳이니만큼 이곳의 거주지들은 정착 초기의 고풍스런 건물들이 모여 마치 하나의 문화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 구르베스가 향하고 있는 ‘쿠트라스 대성당’은 이제는 몰락한 옛 교단의 3대 성소 중 하나였다. 그 3대 성소 중 교단 통합본부였던 ‘아케메니안 궁’은 이제 제국의 황궁이 되어 있었고, 최고신 다하카르에게 봉헌되었던 ‘남극 대성당’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젠 유학교육기관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쿠트라스 대성당은 교단이 제국을 주름잡던 시절 세워진 그들의 3대 성소 중 지금까지도 옛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쿠트라스 대성당의 광장에 도착한 구르베스는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귀 밑의 상급귀족문을 머리칼로 잘 가렸다. 사방이 3, 4스타디아씩은 되어 보이는 장방형 광장은 언뜻 광장이라기보다는 이곳 주민들의 공원 정도로 여겨졌다. 군데군데 나이 많은 나무가 세워져 있고 작은 연못과 조각상, 잔디밭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는 옛 사교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리고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 또한 이곳이 사교의 광장이라는 것 자체를 별로 의식조차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곳 광장에 있는 사람들 중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나 어딘가 다친 사람들이 유달리 눈에 많이 띄었다.

“병원이로군.”

나무 너머로 보이는 순백색의 거대한 성소를 오려보며 구르베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곳이 아직까지 폐쇄당하지 않고 살아남아있는 이유는 ‘병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우에게서 넘겨받은 쪽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곳에 적힌 대로, 이 광장의 중앙에는 큰 전나무와 그곳을 빙 둘러 나무 의자가 보였다. 수우가 만나자고 한 시각은 6시부터 8시까지였지만 아직 그 시간까지는 30분이 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30분이 아니라 다만 3분이라도 빨리 수우를 만나고픈 마음에 그의 가슴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꼭 끌어안고 전나무 옆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을 걸어다니는 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장이라도 수우가 웃음 띤 얼굴로 나와 줄 것만 같았다.

“오늘은 해가 길죠?”

누군가가 가벼운 인사말을 던지며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문득 옆을 돌아본 구르베스는 자그만 키에 온화한 인상의 한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종이봉투에서 커다란 샌드위치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그, 그런가요?”

구르베스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여자가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아, 여기 분이 아니시군요. 여기 쿠트라스는 계절변화가 워낙 빨라요. 요즘같은 때는 6시까지 해가 떠 있지만 30일만 지나고 나면 3시 이후로는 깜깜해질 겁니다. 사실 기준 시각이라는 거 자체가 여기하고는 워낙 안 맞아서 그런 것도 있어요.”

구르베스는 혼자 떠드는 이 여자를 잠시 의심어린 눈으로 살폈다. 여자의 까만 단발머리 밑으로 트라카 신을 상징하는 혜성 문장이 귀 밑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역사학을 전공했던 그인 만큼, 이 표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게 포교하시려는 겁니까?”

구르베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 아뇨, 제국의 건국 이후로는 공개 장소에서의 포교 활동이 금지되었어요. 괜히 이런 일에 목숨 걸 바보는 아니에요.”

여자가 씹던 것을 삼키며 구르베스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를 보여주었다.

“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입니다. 신경외과 과장인 니사 라말라 박사입니다. 트라카 교단 성직자이기도 하고요. 그냥 뭣 좀 먹으러 나왔어요. 오늘은 환자가 많아서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었거든요.”

니사가 귀 밑의 혜성 문장을 가리키며 샌드위치를 우걱거리고 씹었다.

“저 병원이 여전히 트라카 교단 것인가요? 쿠트라스 성당은 원래 트라카 신에게 봉헌된 것이었죠?”

구르베스는 긴장도 달랠 겸, 이 여자와 일단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멀뚱하니 앉아있는 것보다는 그편이 의심을 덜 살 것 같기도 했다.

“잘 아시네요?”

니사가 활짝 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아케메니안 궁은 주로 통치에 관련된 사안을 다루는 통합본부였고 남극성당은 다하카르께, 여기 쿠트라스 성당은 트라카께 봉헌된 신전이었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은 여기 하나만 남아있어요.”

“모양을 봐선 그다지 성소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묘한 거부감을 느낀 구르베스가 괜한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니사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공공장소에서 종교 활동이 금지되면서 본전에 함께 있는 예배당은 폐쇄되고 지금 본전은 병원으로만 쓰이고 있어요. 별관에 있는 예배당에만 성직자하고 등록된 신도에 한해 입장할 수 있죠. 황제령의 두 성소가 폐쇄되면서 거기 있던 다하카르 교단과 다른 교단들까지 다 옮겨오면서 지금 여기는 12분의 신들이 와글와글 단칸방 생활 중이세요.”

“풋.”

구르베스가 잠시 웃음을 지었다.

니사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신도 수가 많아서 예배당을 좀 늘려야 하는데 당국에서 허가를 내 주지 않아요. 그래서 성직자들이 돌아가면서 대표 신도들의 집을 방문해서 무슨 나쁜 모의하도 하듯이 숨죽이고 예배를 드려야 하죠. 어쨌든 제국의 지금 국교는 유교이니까요. 종교자유를 주장하면서 세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치고는 좀 웃기죠.”

니사가 섭섭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교단 병원을 무료로 운영하는 자금도 결국은 신도들의 기부금에서 나오는데 신도를 확보 못 하면 우리도 병원을 유료화할 수밖에 없거든요. 공익사업을 한다고 국가 보조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오르마즈 경께서 총리로 계셨을 때 국비보조 건을 추진하려고 하셨지만 유학자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죠. 자기네들도 아프면 우리 동료 성직자들이나 우리 신도들에게 치료받을 거면서 말이에요.”

구르베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니사의 말에 동의해서는 아니었다. 사교도들의 앞마당에서 종교 문제로 괜히 성직자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그는 역사를 전공했지만 사교도들의 불평불만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쁜 여자는 아니로군.’

구르베스는 내심 이 여자가 정말로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의학박사면 제국에서도 상류층에 속하겠지만 말하는 태도만 보아서는 특별히 엘리트의 느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 이곳을 산책하던 환자 몇이 니사에게 깍듯이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라말라 신관님.”

구르베스는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니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다정한 친구를 대하듯 그의 음성과 말투가 유달리 온화했다. 지나다니는 의사들도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것을 보아 이곳에서도 제법 높은 지위의 의사인 듯 싶었다.

의사로 돌아간 니사를 보며, 구르베스는 조금 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환자와 동료들을 대하는 그는 적당히 위엄을 갖춘 온화한 스승님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또박또박한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넘쳤고, 반짝이는 눈빛은 줄곧 상대방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 기다리시나 봐요?”

환자를 다시 보낸 니사가 구르베스의 가방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아.......나, 남편이요.”

“저녁 식사 약속이라도 하셨나봐요? 하긴, 여기 부근에 맛있는 식당이 많아요. 아참, 샌드위치 샀더니 서비스로 하나 줬어요. 거기 제빵사가 제가 전에 치료해 준 환자거든요. 전 이거로도 배부르니까 좀 드세요.”

니사는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작은 빵 한 개를 꺼내 내밀었다. 받을까말까 고민하던 구르베스는 결국 빵을 받아들었다. 사교이지만 어쨌든 성직자이고, 이곳 의사임이 확실한 이상 특별히 그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타르서스를 떠난 이후로 그도 계속 굶고 있었다.

“고마워요.”

빵을 받아든 구르베스는 일단 한 입 베어물었다. 무슨 이유엔지,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런, 체하겠네요. 이거라도 드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니사가 봉투에 함께 들어있던 작은 주스 팩을 얼른 내밀었다. 구르베스는 그가 준 주스를 한 모금 삼키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당에 달린 큰 종탑에서 오후 6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다. 하지만 수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이가 보고 싶어요.”

구르베스는 자신이 이런 말을 낯선 사람에게 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가 눈물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그는 빵과 먹다 만 주스를 떨어뜨리며 갑자기 옆으로 휘청거렸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요?”

구르베스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괜찮냐며 다급하게 묻는 니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의식을 잃으며 옆으로 쓰러지는 구르베스를 니사가 허둥지둥 끌어안았다.

“이봐! 이봐!”

니사가 지나가던 수련의 2명을 급히 불렀다.

“응급환자니까 지하 1층 병동으로 옮겨! 빨리! 내가 곧 따라가지.”

“아, 예, 알겠습니다.”

수련의의 등에 업힌 구르베스가 병원으로 멀어져갔다. 자리에 그대로 남은 니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웬 검은 차 한 대가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의 괴한 두 명이 천천히 내려서서는 이곳 전나무 밑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발 늦었네, 친구들.”

니사는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과 주스통, 그리고 구르베스의 가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먹다 만 샌드위치를 씹으며 태연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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