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48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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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눈을 뜬 구르베스는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니사의 걱정에 찬 시선과 마주쳤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잠시 꼼짝도 못했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맙소사, 지금 몇 시죠?”
“아침이에요. 12시간 정도 혼수상태에 있었어요.”
니사가 병실의 창을 활짝 열어주며 말했다. 쿠트라스의 짧은 아침햇살이 이 자그만 병실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아직 멍한 얼굴의 구르베스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창밖에 고개를 디밀었다.
“그이, 그이가 왔을 텐데........이걸 어쩌지........”
“남편분이요? 글쎄, 남편분이 오셨는지는 모르겠고........불청객들만 광장에 가득 와 있죠.”
니사가 씁쓸한 얼굴로 창밖 광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구르베스가 보기에는 평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불청객이라뇨?”
“이 광장에 오는 사람은 어차피 뻔해요. 환자 아니면 신도 아니면 이 동네 사람들이죠. 문병객이 있기도 하지만 오던지 나가던지 하지 저렇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니사는 어제의 그 전나무 밑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워낙에 감시를 당하며 살다보니 이젠 누가 감시하고 있는지 정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은 유별나게 많네요. 근위대 요원들 같아요. 안그래도 지난밤에 병원을 한바탕 들쑤시고 갔거든요.”
니사가 구르베스를 돌아보며 갑자기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동부 발음을 구사하는 상급귀족문을 지닌 여자가 부근에 어슬렁거리는 거 보면 바로 신고하라고 한바탕 협박을 하고 갔어요. 그리고 지금 주변에 쫙 깔려있죠.”
구르베스의 표정이 조금씩 창백해져갔다. 그는 병상에서 더듬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니사가 그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난 의사고,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를 근위대에 넘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아요. 당신이 무엇 때문에 쫓기고 있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에요. 어쨌든 여기는 우리 교단의 성소고, 여기서 누군가가 공권력에 잡혀가는 건 우리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에요.”
구르베스는 지금 이 여자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하마터면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니사가 얼른 그를 부축해주며 말했다.
“조심하고 앉아계세요. 임신 초기에는 작은 충격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요.”
구르베스는 또다시 움찔했다. 병원이고, 어차피 자신의 몸을 진단했을 테니 임신 사실을 안 것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었지만 행여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알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귀한 분의 자손이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니사가 엷은 미소를 지은 순간, 충격을 받은 구르베스는 반사적으로 단검부터 찾았다. 하지만 그의 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니사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응급환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에게 연락하는 건 정상적인 절차였어요. 유전자은행 데이터베이스망에 연결해 검색했는데 검색불가라고 나와서 좀 당황했어요. ‘검색불가’는 황족이거나 내명부 사람이거나 비밀스런 지위에 있는 경우뿐이니까요. 보통 이럴 때는 당국에 신고하는데 혹시나 해서 짐을 좀 뒤져왔어요. 죄송해요.........구르베스 슈트란님.”
상대가 솔직히 말해주자 구르베스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모른 척하고 밀고하거나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그래서........날 이제 어떡하려는 거요?”
구르베스는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니사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여긴 북부 쿠트라스에요. 근위대들이 종종 설치고 다니긴 하지만 어쨌든 여긴 카파키 가 땅이라고요. 이곳 사람들은 우리 신도건 아니건 모두 카렐 폐하께서 제국을 장악하시기를 원해요.”
“그럼 당신은 그 가짜황제를 지지하는 거요?........아, 아니 내 말은......”
구르베스는 자신이 별 생각없이 쓴 ‘가짜황제’라는 표현에 잠시 당황했다. 카파키 가 영지인 이곳에서 카렐을 가리켜 ‘가짜 황제’라고 하는 건 거리에서 몰매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실수였다. 하지만 니사는 피식 웃음까지 지으며 그에 응대해 주었다.
“글쎄요, 당신들이 말하는 ‘사교 신관’인 제게 누가 황제가 될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당신을 근위대에 넘겨주는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을 뿐이에요. 카렐 폐하를 지지하는 이곳 쿠트라스 사람들의 눈이 있고, 카파키 가 당국이 있고, 또 근위대가 있고, 둘 중 누가 마지막에 황제가 될 지 아무도 모른다는 불확실성도 있어요. 그래요, 인정하죠. 우리는 ‘의사로서의 도리’ 뒤에 숨어서 이 상황을 최대한 안전하게 빠져나가길 원할 뿐이에요. 그게 솔직한 이유에요.”
니사의 설명에 구르베스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 둔한 몸을 힘겹게 일으키고는 옆에 개어놓은 옷을 집어들었다.
“살려주신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전 떠나야겠군요. 제 짐은 어딨죠?”
“지금 떠나시는 건 그다지 현명치 못해요.”
니사가 다시 창밖을 가리켰다.
“일단은 병원 안이 안전하니까 그냥 여기 계세요. 가벼운 뇌출혈 소견이 있다고 우겨서 신경외과 병동으로 모셔왔어요. 제가 과장으로 있으니 염려하실 건 없어요. 저 사람들 없어지고 안전해지거든 그때 나가세요.”
“그이가 올 지도 모르는데........”
구르베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밖을 보아하니 아가씨 남편분은 어차피 못 오십니다.”
니사의 단호한 대답에 구르베스는 이마를 싸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위대들이 이곳을 에워싸고 있다면, 니사의 말대로 수우는 이미 탈출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수우와의 약속을 이대로 버려두고 혼자 카렐에게 투항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열흘, 한 달, 심지어 1년이라도 이곳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자신의 뱃속에 든 생명을 함께 만들어 낸 소중한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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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니아에 돌아온 오르마즈를 든든하게 바라보며, TSG 지도자인 에르네스토의 입가에도 잠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잘 와 주었네.”
에르네스토는 집무실 문 앞까지 직접 달려 나와 오르마즈를 반가이 껴안아주었다. 오르마즈와 비슷한 큰 키, 깡마른 몸매에 얼굴을 덮은 거친 수염과 강인한 인상을 지닌 이 남자는 증조부인 리 리쿠와도 꽤 닮은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가고 나서 모든 게 엉망이야.”
에르네스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가 가서가 아니고 지도자 파냐드께서 돌아가셔서겠죠.”
오르마즈의 대답에 에르네스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냉혹한 책략가였던 그 어머니 파냐드와는 달리, 에르네스토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에 유난히 의협심도 강한 남자였다. 그렇다보니 게릴라 저항집단인 TSG의 지도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릴 사람인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의 약점이라면 고집스런 성격 때문에, 혹은 오르마즈보다도 5살 어린 40세라는 젊은 나이 때문인지 포용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강경파와 온건파로 대치되는 조직 내 파벌싸움이 창설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곧 있어온 건 틀림없었지만 그의 밑에서 유달리 더 심해진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지금까지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오르마즈와 같은 온건파들을 유달리 총애했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 단계에서 강경파를 제대로 다독이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래, 난 어머니같이 밀실에서 이런저런 책략 꾸미고 주판알 튕기는 쪽에는 정말로 자신이 없어. 그러니 다 엉망이지. 이젠 정말 힘들어. 너무 힘들어 쓰러지고 싶어.”
에르네스토가 자신의 약점을 솔직히 시인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오르마즈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지도자가 아니고 아랫사람이 할 일입니다. 지도자는 큰 방향만 제시하면 그것으로 할 일은 다 하는 것이죠. 지도자 파냐드께선 솔직히 좀 과하셨죠.”
“그래, 그럴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해가 돼. 어머니도 말년에는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 암살 기도를 10번이나 넘기시고 결국 11번째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쯤 저승에서 ‘이제야 살겠네’ 하고 계실는지도 모르지.”
에르네스토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파냐드의 초상화를 올려보았다. 지금 이렇게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최소한 오르마즈가 보기에 에르네스토는 그 어머니 파냐드보다는 훨씬 훌륭한 지도자감이었다.
“부인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오르마즈가 에르네스토의 가슴에 있는 상장(喪章)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비슷한 말을 워낙 많이 들어서인지, 이번이 처음도 아니어서인지, 에르네스토는 별 표정도 없이 탁자 한쪽에 있던 독한 술병에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오르마즈는 그의 왼팔이 무슨 이유엔지 조금 부자유스럽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일단 조용히 있기로 했다.
“부인도 넷이었는데 이제 둘 남았군. 그리고 21명이나 되는 자식까지 말이야.”
에르네스토가 술 한 잔을 꿀꺽 삼키며 탄식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이렇게 부인과 자식을 많이 둔 것도 죽은 어머니 파냐드 때문이었다. 자식의 절반 이상을 교단의 손에 잃은 지도자 파냐드는 며느리들에게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했고, 그의 이런 선택은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토 말대로, 그가 4명의 부인들에게서 본 자녀는 지금까지 21명이나 되었지만 그 윗대와 마찬가지로 그 중 11명은 이 위험한 세상에서 채 3년을 버티지 못하고 교단의 손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먼저 간 파란기스 상장을 뗀 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 빌어먹을 걸 또 달게 됐지.”
에르네스토가 다시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가 어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다른 부인들을 여럿 두기는 했지만 3년 전 죽은 조강지처 파란기스 카이 부인과는 워낙에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부인 역시 지도자의 부인으로 흠잡을 데 없는 강인하고 현명한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인 파냐드와의 사이는 지독하리만큼 나빴다.
사람들은 파란기스가 첫아들 샤미르를 낳은 이후로 자식을 전혀 낳지 못해서일 것이라 수군대기도 했지만 실상 그가 아이를 더 가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바로 시어머니 파냐드였다.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장손자의 모습에 기겁을 한 파냐드는 그 ‘멀쩡한 내 아들이 너 때문에 병신자식을 봤다’며 잘못을 모조리 파란기스에게 덮어씌웠고, 더 이상 임신을 하면 강제로 낙태시켜버리겠다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할머니를 그리도 기겁하게 한 샤미르의 결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지만 어쨌든 파냐드는 이 장손자를 며느리만큼이나, 아니 며느리보다도 더 미워했다. 그는 장손자가 저 모양이라 후계구도가 엉망이 되었다며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샤미르를 빨리 안락사시키라며 아들과 며느리를 압박하기도 했었다. 일이 그렇다보니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사이가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운 시집살이를 치르던 파란기스는 자신을 그리도 들볶던 시어머니가 죽고 난 바로 다음해에 자객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는 남편과의 사이에 ‘건강한’ 두 번째 아이를 갈구했지만 그의 이런 소박한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샤미르 도련님을 맡아달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르마즈가 드디어 가슴에 품고 왔던 말을 꺼냈다.
“누가 또 도련님 목숨을 노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라는 말을 붙이며 오르마즈는 아차 싶었다. 지금껏 샤미르를 죽이려 든 건 시어머니 파냐드뿐이었고 적대세력인 교단이 아니었다. 교단에서는 아마도 샤미르가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이 상태에서 에르네스토만 죽인다면 TSG는 ‘이 성치 않은 아들’의 후계권 여부를 놓고 어마어마한 내분에 휩싸일 것이 뻔했으니.
“이걸 봐.”
에르네스토는 왼쪽 소매를 걷으며 팔을 내보였다. 어색하게 굳어있는 그의 왼팔에서는 간헐적으로 경련이 보였다.
“운이 좋았어. 뱀이 방 안에 10마리나 풀어져 있었던 것이 비하면 말이야.”
오르마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사람이나 물도록 특별히 사육된 뱀이나 독충을 이용한 암살은 교단에서 아주 흔하게 쓰는 암살법이었다.
“그래, 이젠 어머님이 정말로 이해가 돼. 후계 구도에 그렇게 히스테리적으로 집착하셨던 게 말이야. 이젠 그 걱정이 내 몫이군. 샤미르도 그 지경인데 나까지 쓰러지면 조직은 그대로 끝장이지. 나도 잘 알아. 그러니 눈앞이 캄캄하지. 지금도 마누라들은 지 자식 후계자로 삼고 싶어서 발악이고 아랫놈들은 어느 쪽에 줄을 서는 게 유리할까 주판알 튕기느라 정신들이 없지.”
“......”
“그런데도 치명적인 결함까지 있는 샤미르를 후계자로 삼고 싶은 게 내 과한 욕심인지도 몰라. 그래도........그 아이는 파란기스가 남긴 유일한 핏줄이야. 내 맘 알겠나?”
오르마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신붓감도 찾아 놓았고 가능한 빨리 결혼도 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 전에 더 중요한 일을 해야만 할 것 같네.”
에르네스토는 소매를 다시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게나. 내 아들 샤미르를 소개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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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토의 모델은 아프가니스탄의 전설적인 게릴라 영웅 '판지셰르의 사자', 혹은 '아프간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아메드 샤 마수드 장군입니다. ^^
생전에 소련군을 몰아냈고, 나중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인 탈레반과 싸우던 중 공교롭게도(?) 뉴욕 911테러 직전에 탈레반에 암살당했습니다. (당시 탈레반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프간의 옛 민족주의 저항운동 세력을 제거하고 있었습니다.) 아프간에서는 우리나라의 백범 선생과 비슷한 위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
비록 저항군 지도자였지만 천성적으로 평화주의자였고 가족애가 돈독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