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49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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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G의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북 흥안령 산악지대는 ‘추운 사막’으로 불릴 만큼 아케메니아의 북반구에서 가장 황량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나무도 없이 군데군데 솟아오른 험한 구릉지와 그곳에 뚫린 무수한 거미줄같은 동굴들은 이곳을 차지한 민병대 게릴라들에게는 이상적인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고, 토벌군인 코메트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
에르네스토와 오르마즈가 나선 곳도 북 흥안령자락 판지셰르 계곡의 건조한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숱하게 많은 동굴 중 하나였다.
에르네스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가 그 애를 보고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구누구가 그분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의사, 그리고 약혼녀.......라고 해야 되나? 그 정도.......그 애는 나 말고는 제대로 된 사람을 본 일이 거의 없어. 자네를 소개시켜주고 난 후에는 베흔 대령에게도 알려줄 생각이네. 나름대로 입도 무겁고 소신은 확실한 놈이니까.”
오르마즈는 지금껏 베일에 가려져있던 그 존재가 도대체 어떻길래 지도자가 이토록 감추고 싶어했는지 내심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십여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계곡 제일 안쪽, 속칭 ‘검은 바위’라 불리는 골짜기에 자리잡은 비밀스런 현무암 동굴의 입구였다. 옛날 작은 화산활동이 있었던 곳이다 보니 사람들도 기분이 나쁘다며 발을 잘 들여놓지 않는 곳이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3명의 전사들이 에르네스토에게 인사를 올리며 급히 뒤로 물러나 주었다.
에르네스토가 갑자기 오르마즈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내게 다짐해 주게.”
“다짐.......이요?”
“그 애를 평생 지켜주겠다고 내게 다짐해주게나. 그렇지 않으면........이 자리에서 돌아가게. 그 애를 보고 나서 싫다고 한다면.......난 소중한 전사 하나를 내 손으로 제거할 수밖에 없어.”
오르마즈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자리에 선 채 한참을 망설였다. 에르네스토는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르마즈는 자신의 이번 결정이 스스로의 일생, 아니 콜로니의 역사마저도 뒤바꿀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오르마즈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토는 말없이 돌아서서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르마즈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바위를 뚫어 만든 몇 개의 육중한 철제문과 좁은 터널을 한참 지난 후, 그들의 앞에는 마지막 철문이 남아있었다. 오르마즈를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본 에르네스토는 큰 심호흡을 내쉬며 그 철문을 힘껏 열었다.
“으음,”
오르마즈가 얼른 눈을 가렸다. 굴 천장에 뚫린 큰 구멍으로 환한 햇빛이 그대로 내리쪼이고 있었다. 물론 바깥과의 사이에는 강화유리가---아마도 바깥에서는 그냥 현무암의 허상으로 보일---그 중간을 단단히 막고 있었다.
조금씩 시력을 되찾은 오르마즈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저건........”
오르마즈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동굴 제일 안쪽에는 마치 상점의 쇼케이스 같은 30척(9m) 정도 폭의 유리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10대 후반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 아니 이젠 청년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한 남자가 핏기없는 얼굴로 오르마즈를 돌아보고 있었다. 까맣고 큰 눈동자, 얇은 입술과 갸름한 얼굴은 죽은 어머니 파란기스를 그대로 닮은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아버지 에르네스토의 온화하고 서글서글한 인상과는 다른 묘한 그늘이 서려 있었다.
“소개하지. 내 아들 샤미르 카이 리쿠네.”
에르네스토가 미소 띤 얼굴로 유리벽에 다가갔다. 샤미르는 기다렸다는 듯, 유리벽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아버지 에르네스토 역시 그 맞은편에 손을 얹었다. 유리를 타고 전해져 오는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에 샤미르의 그 밋밋하던 눈가에도 안도감과 함께 미소가 번졌다. 이 두 부자만의 특이한 인사를 오르마즈는 멍한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유리벽에서 손을 뗀 샤미르는 다시 그 시선을 오르마즈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짧게 한 마디를 꺼냈다.
“저 여자는 왜 눈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까?”
순간 오르마즈는 온몸에 묘한 한기를 느꼈다. 남자치고는 가늘지만 높낮이가 거의 없는 밋밋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앞으로 널 보좌해 줄 사람이다. 지난번에 말한 일 있지? 특무여단장 오르마즈 카파키 준장이다.”
샤미르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오르마즈를 똑바로 향했다. 유난히 긴 눈썹 밑에서 갑자기 빛을 뿜기 시작한 그의 초롱초롱한 시선은 조금 전의 어딘지 맥없던 그것이 절대 아니었다.
오르마즈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유리벽 앞에 일단 무릎을 꿇었다.
“인사드리옵니다. 샤미르 도련님. 소인........”
“누군지는 이미 알아.”
샤미르는 오르마즈의 말을 바로 끊었다. 하지만 조금은 어색하게 힘을 준 그 목소리는 아랫사람과의 첫 번째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저맘때 소년 특유의 반응이었다. 오르마즈가 씽긋 웃으며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 기세가 보기 좋으십니다. 도련님.”
오르마즈의 뻔뻔함에 샤미르가 잠시 움찔했다. 그는 잠시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그때, 문득 고개를 치켜든 오르마즈가 발견한 건 방 중간에 자리잡은 이젤과 반쯤 그리다 만 수채화였다.
“지금 내 꼴이 기가 막히겠지?”
샤미르가 유리벽을 더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벽 안에는 마치 누군가의 살림집처럼 침대, 탁자와 책장, 이런저런 신변용품들, 심지어 안쪽에는 작은 화장실과 샤워부스까지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의 구석에는 자그만 체구의 여자 한 명이 입과 코까지 모두 가린 위생복을 입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바깥과 통하는 작은 문이 구석에 있지만 이 소년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이렇게 평생을 살아왔을 터였다.
“보다시피 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평생 떠나지 못할 운명이야. 면역력이 없으니 바깥 공기에 접했다가는 채 하루나 버틸까.”
“그러기에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꿇어앉아 있던 오르마즈가 다시 냉큼 대답했다. 샤미르가 비로소 상급자다운 당당한 자세로 오르마즈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래, 내 말을 수정하지. 자네를 어느 정도는 알아. 오르마즈 레즐린 카파키, 코윈 1번 행성 출신, 아버지 투르케스크 카파키, 어머니 아지드 레즐린, 그리고 5명의 동생들이 있고 공식적인 학력은 없음. 사병에서 시작해서 장교까지 승진, 대위 시절에 교단본부 기습 공격에 성공해서 특무대에 편성되었고, 지난번엔 사교 지도자인 야푸르 빈 다하카르를 암살했더군.”
“정말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꿇어앉은 오르마즈가 샤미르의 눈을 살짝 올려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이 소년 역시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아마도 저 소년은 자신을 이렇게 당당하게 쳐다보는 누군가의 눈빛을 거의 접한 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네 말대로 책을 몇 권 가져왔다.”
이 둘의 첫 만남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르네스토는 가져간 가방에서 몇 권의 인문학 책들과 화보집을 꺼내 유리벽 옆에 달린 상자에 넣고 안으로 밀어넣었다. 치익 하며 소독약 뿜어나오는 소리가 어딘지 음산했다. 그리고 소독이 끝났다는 작은 부저음과 함께 상자가 안쪽을 향해 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샤미르는 아버지가 가져온 책을 비로소 열어보았다. 책을 집은 샤미르의 손을 쳐다보던 오르마즈는 그에게 왼쪽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방 안쪽 천장에서 갑자기 윙윙거리는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뭡니까?”
깜짝 놀란 오르마즈가 반사적으로 칼을 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르네스토가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게. 책 안쪽에 있던 먼지가 날리면서 감지기가 반응하는 것뿐이야. 깨끗한 새 책을 가져와도 매번 이런 식이지. 하지만 저 정도는 괜찮을 거야.”
에르네스토는 화보집 속의 다른 세상에 완전히 넋이 빠져있는 아들을 쳐다보며 근심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잘 있거라, 샤미르.”
“이 안에는 안 들어오실 건가요?”
다시 어린 아들로 돌아간 샤미르가 돌아서는 아버지를 애타게 바라보며 물었다.
“의사가 가벼운 감기기운이 있다고 하는구나. 오늘은 힘들 것 같으니 다음에 오면 안에 들어가마.”
“저녁에 또 오실 거죠?”
“모르겠다. 카파키 준장하고 전방 부대를 둘러보러 가 봐야 하는데.......10시간쯤 걸릴 것 같은데 어쩌면 자고 올 수도 있고.”
“10시간이요?”
샤미르가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면 내일인가요?”
순간 오르마즈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지금이 오전 10시니 10시간 후라면 저녁 8시였다. 아무리 실수로 계산을 잘못했다고 해도 10대 후반이나 되는 사람, 그것도 측정조차 불가능한 지능의 소유자라는 발현자가 저 정도의 시간감각조차 없는 건 어딘지 이상했다.
에르네스토가 얼른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오늘 저녁에 오던지,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것 같다.”
샤미르는 다시 시무룩한 얼굴로 뒤돌아 앉았다. 잠시 그렇게 앉아있던 샤미르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아버지와 함께 굴을 나서는 오르마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동굴을 걷는 동안 오르마즈와 에르네스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동굴 입구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오르마즈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선천성 면역결핍 치고도 상당히 심하군요.”
오르마즈의 물음에 에르네스토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증세가 심해서 의사는 채 3,4년을 살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이젠 18살이니 어른이 다 되었지.”
에르네스토는 굴 밖의 환한 하늘을 올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파란기스가 헌신적으로 돌봐줘서 그나마 가능했을 거야. 난 어차피 아들 제대로 챙겨줄 처지도 못 되었으니까. 그런데 3년 전에 어미 죽고 나서는 저렇게 하루 종일 그림에만 빠져 있지.”
둘은 판지셰르의 험한 계곡을 천천히 함께 걸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서 버티어 주었지만 앞으로 어떨지는 몰라. 여긴 게릴라 본부고 어떤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
에르네스토가 반쯤 마비된 왼팔을 주무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성치 않은 몸이 오늘 유달리 안쓰러워 보였다.
“어릴 때 파란기스가 저애 손톱을 깎아주다가 작은 상처를 낸 일이 있었어. 그 일로 손가락 2개가 썩어들어가서 결국은 잘라내야 했지. 그 때 파란기스가 자기 책임이라고 얼마나 울었던지.......”
죽은 아내 생각이 나는지, 에르네스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애는 언제 죽을지 몰라. 그래서 저 애를 가능한 빨리 결혼시키려고 해. 그런데 어떤 집안에서 저런 사위를 들이려고 하겠나. 옳지 않은 일인지는 알지만 빈민가.......아니, 사창가에서 여자를 돈 주고 데려왔어.”
“아까 함께 있던 여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뭐, 술시중은 들었지만 몸을 팔지는 않은 것 같아. 출신은 그 모양이어도 똘똘하고 성격도 착하더군.”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오르마즈가 더듬더듬 물었다. 에르네스토는 그의 질문을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섹스가 가능하냐고? 후훗, 맨살이 닿던지 키스만 하는 것도 저 애한테는 위험해. 그런데 섹스라.......저 애한테는 목숨을 건 미친 짓이겠지. 남자로서의 본능을 평생 포기해야 한다는 게 딱하지만 나도 손자 보고픈 욕심에 아들을 그런 위험에 내몰 생각은 없어. 2세를 가지는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그럼 그 여자는........”
“저 여자에게 계속 시중을 들게 하면 나름대로 정이 쌓이겠지. 어쨌든 샤미르도 남자니까.......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지 않겠나. 그럼 그때 가서 인공수정으로라도 아이를 가지게 하려고 해. 2세가 생기면 저애도 살려는 의욕이 훨씬 강해지겠지.”
“그런데.......면역결핍 말고 지능에도 결함이 하나 더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알아챘나.”
에르네스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 아이는 발현자고, 기억력과 분석력 하나는 대단하지. 미감도 아주 발달해서 화보에서 딱 한 번 본 사진도 그림으로 모사해낼 수 있을 정도고 새 민병대 군기도 저애가 도안했어. 그런데........”
“계산능력이......”
“9나 10까지 정도는 세지만 그 이상은 힘들어. 2자리 이상 넘어가면 전혀 인식할 수가 없지. 그래서 사람들에게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말을 가끔 하기도 해. 그래, 그냥 면역결핍증 정도면 아이를 공개했겠지만 지능에까지 이상이 있다는 건 차마 공개할 수가 없었어. 내가 자네의 도움을 바라는 게 그 때문이라네.”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오르마즈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에르네스토가 오르마즈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난 항상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야. 언제 죽을지 모르지. 후계자는 저 모양이고.”
“........”
“저 상태로는 저애는 세상을 직접 마주할 수가 없어.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아랫놈들은 저 아이를 지도자로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을 거야.”
에르네스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간에서 저 애와 세상을 연결해 줄 누군가가 있어줘야 하지만 너무나 위험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자네뿐이네. 부탁하네. 카파키 준장.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저애의 눈과 입이 되어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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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읔, 지금보니 제 글이 유조아에서 추천수 제일 많은 게 아니었군요;; (이런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