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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51화 (450/1,132)

< -- 451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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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만찬석상에서 카렐이 할 수 있는 일이래야 쥬스나 들이키고 약간의 과일만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카렐도 그간 많이 뻔뻔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날고기를 먹어댈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었다. 물론 그 덕에, 만찬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조금 더 살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는 했지만.

우베가 카렐의 귀에 입을 바싹 가져가며 귀엣말을 던졌다.

“안도 경과 아스탈 사이의 분위기는 예상대로군요, 폐하.”

우베의 시선 끝에는 어딘지 어색하게 서로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이라즈의 ‘두 아버지’, 안도 경과 아스탈이 있었다.

“내 어제 저녁에 시킨 건 조사했나?”

짐짓 다른 일이 있는 척, 한 손에 사과를 쥐고 자리에서 잠시 일어난 카렐이 발코니로 향했다.

우베가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붙으며 말을 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스탈이 상급귀족인 아르나바즈 노에누스 부인과 결혼할 때 가장 격렬히 반대한 것이 오빠였던 안도 경이었답니다.”

“뭐, 상급귀족이 평민하고 결혼한다니 그 입장이라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군. 어쨌든 그래도 결혼은 했잖아? 둘째 남편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런데 그 뒤가 좀 그렇습니다.”

“뒤라니?”

“아르나바즈 부인이 아스탈과 결혼하고 몇 년 되지 않아서 첫째 남편과 그 딸이 하임달의 결전에 의용병으로 참전해 모두 전사했답니다.”

“하임달에서?”

지금껏 남 이야기처럼 건성으로 듣고 있던 카렐의 눈동자에서 그제야 반짝 하고 빛이 뿜어나왔다.

우베가 연회장 안쪽을 다시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아르나바즈 부인은 임신 4개월이었는데 안도 경은 혹시 여동생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봐 그네들이 근위대에 포로가 되었다고 거짓으로 말해 준 모양입니다. 몸값만 내면 몇 달 후에 다시 풀려나올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요.”

“출산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벌자고?”

“그래도 결국은 헛수고였어요. 아르나바즈 부인도 몇 달 후에 아스탈하고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괴한의 칼에 찔려 죽었으니까요. 뭐, 죽을 때까지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좋게만 보면 차라리 다행이었죠.”

“괴한? 그럼 아스탈은 아내가 죽을 때 뭐 했고?”

카렐이 눈을 반짝이며 계속 우베를 채근했다.

“아스탈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스탈도 칼에 3번이나 찔려서 함께 발견되었으니까요. 그냥 노상강도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졸지에 여동생을 잃은 안도 경이 부인을 지켜내지 못한 아스탈을 잡아먹으려고 든 것도 당연했죠. 뭐, 객관적인 책임을 묻기는 그렇다지만 사람 기분이라는 게 또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이라즈라는 저 청년은.......”

카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곱상한 얼굴의 그 청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구급셔틀의 의사가 숨이 끊어진 부인 몸에서 어렵게 살려냈다고 합니다. 법적으로야 당연히 친아버지 아스탈이 친권자지만 안도 경이 협박 반으로 아이까지 빼앗아버린 모양입니다. 그러니 저 둘 사이가 저렇게 어색할 밖에요.”

우베의 보고를 들은 카렐은 다시 만찬 석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라즈라는 청년을 확인도 할 겸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이라즈는 그의 부름에 입가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앉았다.

“내 솔직히 미술 같은 것에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네. 그래서 그런 쪽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거든. 자네 미술사학자라고 했던가? 아참, 의학교에서 해부학까지 공부했다고 했지?”

카렐이 자신의 직업에 관심을 보이자 이라즈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은 정확한 인체 묘사를 위해 해부학을 약간 공부하곤 합니다. 소인의 경우는 그 과정이 반대였사옵니다. 본디 의사가 되려 해부학을 공부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인체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거 재밌군. 그럼 자네는 인물화에 제일 관심을 두고 있겠군?”

“정확히는 사교 시절의 인물화를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건국 이후의 미술은 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풍경화나 정물화가 대부분이고 인물화는 많지 않습니다.”

“그럼 자네도 사교도인가? 의사들 중에는 사교도가 많지 않았던가?”

카렐의 느닷없는 물음에 주변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 잠시 긴장이 감돌았다. 페로가 괜히 심통을 부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교도겠지 뭐.”

페로의 뜬금없는 참견에 카렐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입을 얼른 막았다. 이 청년이 정말로 사교도라면 그의 걱정처럼 황실 내명부에 들어올 가능성은 0에 가까워지는 셈이었다. 사실 카렐 역시도 내심 이 청년이 사교도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의사나 자영업자 신분이라면 모를까, 사교도가 감히 황실에, 그것도 황실 내명부에 발을 디딘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페로의 이런 허망한 기대와는 달리, 이라즈는 카렐의 물음에 바로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소인 상급귀족가에서 양아버님이신 안도 경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사옵니다. 한때는 남극성당에의 진학도 생각했사온데 어찌 그런 사교에 마음을 빼앗겼겠사옵니까. 소인은 그저 학술적인 차원에서 당시 미술을 공부할 뿐이옵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이라즈의 표정에 당황한 카렐이 얼른 손을 저었다.

“아, 알았네, 뭐 그런 걸로 그렇게 놀라고 그러나. 난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이야. 어쨌든 제국은 종교자유가 있는 나라 아닌가.”

카렐은 ‘종교자유’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국에서 종교자유는 법전에 조문으로만 남아있었고 어차피 사교도는 엄한 ‘등록제’가 따로 시행되고 있었다. 등록한 신도에게만 사교 성소의 출입을 허용한다는 이 등록제는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과격분자에게서 성소의 안전을 확보해 준다는, 나름대로 그럴싸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 등록은 사실상 관직 진출, 혹은 관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대규모 조합에의 취업까지 가로막는 일종의 낙인이었다. 사교도들이 업종 자체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의사나 전문 기술직, 혹은 남 눈치 볼 일 없는 자영업자에 유난히 몰린 것도 실용 기술을 중시하는 그들 특유의 문화 탓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기회 자체가 한정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사교도이면서도 등록을 하지 않은 숨은 신도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하늘만이 알 노릇이었다. 게다가 상급귀족가에서는 사교도인지 알면서 혼인했다는 이유로 파문까지 당한 경우도 몇 번 있었다.

“그럼 사교 시절에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나보지?”

카렐이 재빨리 상황을 수습하려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시다시피 사교에서는 생식을 통해 재창조되는 인간의 육체를 조절자인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추앙했습니다. 그들이 인간의 육체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의학을 성스러운 학문으로 받들었던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술 역시 인체의 아름다움을 다룬 인물화나 연인간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걸작들이 건국 이후 불태워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 거시기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별 엽기적인 짓들까지 다 저질렀지. 마구스라는 작자들은 지 자식들을 침대에 들이지 않나 형제들을 세워놓고 목 자르기 파티를 하지 않나........”

유학자이기도 한 페로의 이 비꼬는 한마디에 자리에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나왔다. 페로의 말은 유학자들이 사교의 비윤리성을 비난할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메뉴였다. 원래 코리온이 꺼내 적당한 말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카렐 역시 껄껄대고 웃으며 주스 한 모금을 들이켰다.

“마구스들이 근친혼을 한 건 자신들이 결함 없이 완전한 유전형질을 지닌 전혀 ‘별개의 종’이라는 믿음이 너무 강해서였어. 뭐 그래도  지금 사람들도 당시 발전시킨 기술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 정도는 인정해야겠지. 일단 수명개조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아마 거의 다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있을걸? 그거 첫 번째로 한 게 누구였더라? 자하크 대신관이었던가?”

카렐의 물음에 이번에도 이라즈가 대답했다.

“예, 29대 자하크 빈 다하카르 대신관이 맞습니다. 기원전 60년에 사상 첫 번째로 수명개조자가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유별난 자신감 때문에 영원한 삶에 대한 욕구가 유달리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명개조 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었죠.”

“그 인간이 외모가 어땠길래? 내 알기로 마구스들은 대체로 외모가 빼어났었다고 들었는데?”

카렐이 당연한 의문을 던지자 이라즈가 냉큼 대답했다.

“마구스들이 대체로 외모가 훌륭했지만 29대 자하크 대신관은 그 중에서도 제일로 손꼽히는 빼어난 미남자였습니다. 그 어머니였던 선대 대신관에게서 ‘꽃의 아름다움이 감히 네게 비할 바이더냐’라는 찬사까지 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기록화나 조각상을 보아도 언뜻 여자로까지 보일 정도로 고운 외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런 외모에 유달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엑.”

페로를 비롯한 남자들이 일제히 혀를 쑥 내밀었지만 정작 여자들은 손뼉까지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카렐 역시 키득거리며 우베에게 말을 건넸다.

“코리온 오라버니하고 대결시켜보면 정말 볼만하겠군. 그런데 그 사람이 수명개조를 받았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가 다 된 이후 아니었나?”

“그게 문제였습니다.”

이라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하크 대신관은 자신의 아름답던 외모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망가져가는 것에 점점 히스테리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달라진 외모를 절대 드러낼 수 없다면서 숨어 지내게 되었고요. 기술이 완성되어 수명개조를 받기는 했지만 그땐 이미 70세의 쭈글쭈글한 노인이 된 후였습니다. 그리고 95세가 되는 해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실상 수명개조는 받으나마나했던 것이었죠.”

“좀 불쌍하긴 하군. 아니 아깝다고 해야 되나?”

“그래도 자하크가 수명개조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후계자 선임에서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후임 대신관으로 선임된 아들 야푸르는 교단 직속 유전학 연구소의 총 책임자였고 수명개조 기술을 사실상 발전시킨 주역이었습니다. 후계자 신탁이라는 과정이 어떻게 행해졌는지는 아직 미스테리지만 어쨌든 그 일로 아버지에게 큰 신임을 얻은 것만은 확실하거든요.”

“자, 자, 칙칙한 옛날이야기는 그만 하고 식사들이나 하시죠.”

이라즈와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 카렐의 모습이 영 못마땅한지 페로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손뼉을 짝짝 쳤다. 하지만 눈치없는 이라즈는 이런 페로의 속내도 모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아참, 폐하께선 얼굴선과 목선의 균형이 잘 잡히셔서 목을 완전히 드러내는 옷을 입으셔도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어깨의 근골격과도 각도와 균형이 잘 잡혀서 어깨를 드러내는 옷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라즈가 목까지 완전히 가린 카렐의 속 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해부학자인 그의 이런 참견에 카렐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맘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내 목 아래가 그다지 보기에 좋지는 않다네. 뭐 자넨 해부학자니 조금만 보여주지.”

카렐은 목을 덮은 네크 칼라를 살짝 들치고 그 안쪽의 모습을 살짝 드러냈다. 투명한 피부에 근육, 실핏줄까지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에 움찔 놀랐던 이라즈는 조금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저어.......외람되오나.......”

“으음?”

사과를 씹던 카렐은 한참만에 입을 연 이라즈를 문득 돌아보았다.

“아시다시피 소인 화가이며 의사이옵니다. 그리고 평소에 관심을 가진 분야가 있었으니 허락만 해 주신다면.......”

이라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갔다.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옥체에.......단색 트라이벌 문신을 놓아드리고 싶습니다. 피하지방이 유난히 얇은 곳만 골라 잘 배치하면.......평소에도 자신 있게 몸을 드러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허락해 주신다면 바로 도안을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라즈의 느닷없는 제안에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달리 하얀 몸을 무작정 가릴 생각만 했지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었다. 괜한 컴플렉스 때문인지, 심지어 비빈들과의 잠자리에서도 환한 불빛 아래 대놓고 몸을 드러내 본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지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 마시옵고......”

“거 나쁘지 않겠군. 그래, 도안이라도 몇 개 그려서 가져와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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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벌 문신은 흔히 아는 야쿠자 문신(-_-;;;)인 이레즈미와는 달리 대상을 최대한 단순화한 주로 단색의 기하학적 문양의 문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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