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52화 (451/1,132)

< -- 452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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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향하던 마자리크 경의 앞에 웬 거구의 사내가 쭈뼛거리며 나타났다. 그 큰 덩치가 다 들어갈까 싶은 이동의자에 목을 고정시킨 채 뻣뻣하게 앉아있는 꼴이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어, 그으........”

태연한 표정의 마자리크 앞에서 도리어 얼굴이 빨개져 있는 쪽은 네피였다. 마자리크는 뒤에 있던 5명의 근위병들과 가디언에게 먼저 들어가 있으라 손짓했다.

“아까 낮에 말씀입니다.......”

네피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낮에 뭘 말인가?”

마자리크가 여전히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는 비밀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그 말이 자칫 흘러나갔다가는 전.......”

마자리크가 짐짓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만찬자리에서도 말 할까 말까 입이 근질근질하던데.......애정 문제라는 건 원래 사방에 밝히고 공개적으로 하는 게........”

“아, 안된다니까요! 그거 알려지면 전 제네르하고 시로한테 죽습니다!”

당황한 네피가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이걸 어쩌나.”

마자리크가 히죽거리며 네피에게 눈을 쫑긋거렸다.

“난 어차피 내일 탈라스로 떠날 건데, 안 그래도 하크로딘 상장군하고 요즘 친구도 됐고.......떠나기 전에 충고 좀 해 주려던 참이었거든. 아름다운 로맨스 아닌가. 뭐 가디언이 복원했다는 게 좀 그렇기야 하지만.......”

네피의 표정이 순간 파랗게 질렸다.

마자리크가 갑자기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자네 언제 현역에 복귀하나?”

“그게.......한 열흘이나 보름쯤 더 있어야.......”

네피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혹시 나하고 탈라스 구경 좀 할 생각 없나?”

“예? 탈라스는 이미 구경 많이 했는데.......”

네피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카렐의 즉위식 전 이미 몇 달간을 그곳에서 보냈던 네피는 사실 탈라스의 사막이라면 더 이상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주변에 믿음직한 가디언이라고는 전무한데다가 탈라스에는 초행길인 마자리크가 그곳에 익숙해진 자신을 데려가 전력으로 써먹을 생각이라는 사실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생각 좀 해 보고 오늘 중으로 알려주게나. 난 숙소에 있을 테니 아무 때나 연락해.”

네피에게 씽긋 웃어보인 마자리크는 그를 놔둔 채 숙소로 성큼성큼 사라져갔다.

만찬 직후, 카렐에게서 따로 위로를 받고 숙소로 돌아가던 코리온은 영빈관 자신의 처소 문 앞에 서 있는 밀리타의 모습에 다시 바싹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희들은 돌아가 있도록 해라.”

잠시 한숨을 내쉰 코리온이 뒤따라온 호위가디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조용한 데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여기는 별로 좋지 않은 듯 하니.”

밀리타가 씽긋 미소를 지으며 코리온의 숙소 문을 가리켰다. 코리온은 별 대답도 없이 자신의 숙소 문을 열었다. 밀리타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의 뒤를 따라 처소에 들었다.

“방이 수수하군요. 폐하께서 원래 34층 특실을 내주셨다고 하던데, 먼저 고사하셨다죠?”

밀리타가 코리온의 처소를 빙 둘러보았다. 방 한쪽에 잔뜩 쌓인 책들과 몇 안 되는 옷가지들, 수수한 신변용품들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용건부터 말씀하시오.”

문을 닫은 코리온이 표정없는 밋밋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밀리타는 그런 그에게 서슴없이 다가서서는 목 옆을 살며시 짚었다. 움찔한 코리온이 반사적으로 표정을 찡그렸다.

“가슴이라도 아프신가요? 옛날에 저를 안으셨을 때처럼 짜릿하지요?”

밀리타는 그의 왼쪽 가슴에 살며시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는 무명포 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맨가슴에 살며시 코끝을 가져갔다. 평소 같으면 호통과 함께 여자를 거칠게 밀어냈을 코리온이었지만 이번만은 그 자리에서 마취라도 당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19살이셨던가요? 키도 반 뼘은 더 커지셨고.......몸매도 정말 당당해지셨네요. 그때는 그냥 풋내나는 소년이셨는데.......”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코리온은 허리띠를 막 끌러내리려는 밀리타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밀리타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그를 몰아붙였다.

“그 일 있고 며칠 후에 거길 다시 찾아갔어요. 당신이 너무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어요. 당신을 꺼내주려고 거금도 가지고 갔죠. 하지만 그땐 이미 문을 닫았더군요. 포주도 잠적해서 찾을 수가 없었죠. 그러고 며칠 밤을 울었어요.”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요.”

코리온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어느새 어깨를 파고든 밀리타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그의 다른 손은 어느새 풀어헤쳐진 코리온의 뽀얀 가슴팍을 더듬고 있었다.

코리온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공적으로 할 말이 없다면 당장 이곳을 나가주시오.”

“오늘 하룻밤만 안아주시면 앞으로 절대 부근에 얼씬하지 않죠. 오늘 딱 하룻밤만. 그리고 옛 일도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오늘 하룻밤만 제게 허락해 주시면 옛 일을 모두 묻어드릴게요. 그게 그리 힘든가요?”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코리온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같은 자신감이 빠져 있었다. 살며시 안겨오는 이 여자의 머리칼에서 묘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언뜻 느끼기에도 최음제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굳이 최음제가 아니고서도, 이 여자와 있었던 강렬한 기억만으로도 코리온의 판단력을 흐려놓기는 충분했다. 마치 전기라도 통하는 듯 자극적인 밀리타의 손끝이 계속해서 그의 남자로서의 본능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런, 어깨에 흉터가 있으시네요, 이것도 제가 지워드리죠. 당신의 안 좋은 기억들까지 모조리 오늘밤에 지워드리죠.”

밀리타가 코리온에게 살며시 입술과 혀를 디밀어왔다. 가쁜 숨을 애써 가다듬은 코리온이 그의 턱을 꽉 붙들었다.

“내 흉터를 지워줄 사람은 따로 있다. 이 요망한 것아.”

코리온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둘의 입술 끝이 당장이라도 닿을 듯 가까이 마주하고 있었다. 코리온은 어느새 자신의 품에 꽉 안겨있는 이 여자를 거칠게 동댕이쳐버렸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공무가 없으면 빨리 나가주시오. 밀리타 레즐린 부장. 오늘 있은 일은 폐하께는 비밀로 해 줄 테니.”

바닥에 멍하니 꿇어앉아있던 밀리타는 이 차가운 남자를 잠시 째려보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언젠가는 제가 그리워지실 겁니다.”

밀리타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코리온의 처소를 나섰다. 그의 등 뒤로 쾅 하고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밀리타가 살며시 이마를 짚었다. 평소 건강하던 그의 몸에서도 미열과 약한 오한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효과도 더럽게 빠르군.”

그는 이에 물고 있던 작은 바이러스 캡슐을 뱉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내용물은 이미 절반 정도가 빠져나와 있었다. 그는 그 캡슐과 내용물이 없는 배란유도제 껍데기를 손가방 안의 작은 밀폐용기에 신경질적으로 쑤셔넣었다.

“저놈은 포기해야 하나. 내일 탈라스로 간다니.......”

한숨을 푹 내쉬며 복도를 걷던 그는 손가방에서 작은 주사기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왼팔을 걷어 자신의 정맥에 바늘을 찔러넣었다. 주사바늘의 아픔보다 오늘 그가 당한 일들이 더 몸서리쳐졌다.

“제길.”

그는 주사기를 다시 가방 안에 쑤셔넣고 자신의 숙소를 향해 힘없이 걸었다.

하루 일과를 모두 끝내고 149층에 황후 처소에 올라온 카렐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메스의 잔뜩 토라진 얼굴이었다. 그는 카렐의 얼굴을 보자마자 창으로 휙 돌아앉아버렸다. 카렐이 망토를 벗어놓으며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섰다.

“만찬에는 왜 안 나온 겁니까.”

“잘 아실 텐데요.”

아메스의 퉁명스런 대꾸에 카렐이 이마를 싸쥐었다. 카렐이 탄현성에서 돌아온 건 3일 전이었지만 황후 침소를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돌아온 첫날에는 숙부 사르키스의 죽음과 아버지의 중상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진 솔을 달래 주어야 했고, 둘째 날에는 독감에 걸려 며칠이나 앓아누웠다는 황비 네페티의 얼굴을 확인해야만 했다. 이번 독감 증세가 그다지 심한 건 아니었고, 네페티도 거의 나아가는 상황이었지만 강건하지 못한 그에게는 그나마도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병문안 겸해서 찾아갔던 카렐은 병이라도 옮을지 모르니 빨리 돌아가시라며 펄쩍 뛰는 네페티의 모습에 결국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로 돌아 나와야 했다. 하지만 ‘소녀와 함께하신다고 생각하시고 150층에 가서 다른 비빈 절대 들이지 말고 혼자 주무시옵소서.’라는 괴상한 조건을 대신 들어주어야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 사정들이 있지 않소.”

속 좁게 구는 아메스에게 카렐 역시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31살이라는 아메스의 나이가 황후의 직위를 맡기에 결코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철없이 굴 때도 아니었다. 사실 카렐도 아메스가 내명부 곳곳에 이미 자기 사람을 심어놓았을 정도로 용의주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극성당을 최단기간에 졸업할 정도로 머리 또한 빼어나다는 것도 물론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판단력을 잃고 발끈하는 성격이 항상 문제였다.

“그래요, 솔까지는 이해한다고요. 그런데 독감에 걸려 골골대는 황비 처소에는 도대체 왜 가셨냐고요? 그러다가 몸이라도.......”

카렐은 아메스의 이런 독감 타령이 정말로 자신의 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열 있습니까?”

카렐이 갑자기 손을 뻗어 아메스의 이마를 짚었다. 움찔한 아메스가 그의 손을 치워내며 냉큼 대답했다.

“심하지 않아요. 그냥 지나가는 감기일 뿐이에요.”

“지금 독감이 유행중인 걸 알지 않습니까. 내의원에는 가 봤습니까?”

“아뇨, 내일 갈 거예요. 가뜩이나 손 때문에도 신경쓰이는데 이걸로까지 잔소리 듣고 싶지는 않아요.”

아메스가 이제 겨우 형태만 잡혀가는 왼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독감 걸린 게 알려지면 황제가 처소에 들지 않을까봐 그런 게 아니고요?”

카렐이 키득거리며 다시 물었다. 순간 얼굴이 벌개진 아메스가 카렐을 거칠게 떠밀어내며 앙탈을 부렸다.

“손 때문이라니까요.”

“알았어요, 알았어. 내 그럼 145층으로 가지요. 황비 일에 그렇게 까지 화가 나 있으니 어쩔 수 없군요. 아직 독감 안 걸린 것 같으니 이제라도 고쳐야겠지. 독감이라도 옮으면 어쩝니까. 베아트릭스는 건강하니.......”

아메스는 뒤로 휙 돌아서는 카렐의 허리를 허둥지둥 부둥켜안았다.

“가긴 어디 가세요?”

아메스는 막 고개를 돌리는 카렐의 목에 와락 매달리며 무작정 입을 맞추었다.

“차라리 같이 독감이나 걸리자고요. 그럼 다른 사람한테는 가지 못할 테니. 내꺼 바이러스까지 몽땅 다 가져가서 독감에나 덜컥 걸려버리라고요.”

아메스의 이런 철없는, 아니 좋게 보면 살가운 행동에 카렐은 웃어야 하나 꾸짖어야 하나 혼돈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카렐을 침대로 마구 몰아붙이고는 침대 위에 쓰러진 그의 입 안에 무작정 혀를 밀어넣었다.

“됐죠? 이제 내일부터는 나 말고 아무한테도 가지 않기에요? 비빈들 모조리 독감 환자로 만들 거 아니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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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6만 넘긴 걸 자축중입니다. ~~ ^^ 앞으로도 많은 성원을......(우째 광고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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