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53화 (452/1,132)

< -- 453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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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표정으로 숙소에 돌아온 밀리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버지’ 아스탈의 싸늘한 표정이었다.

“황제는 오늘 황후 침소에 들었다더군.”

아스탈이 술 한 모금을 삼키며 밀리타를 힐금 올려보았다.

“황빈 2명은 워낙 건강해서 반나절 만에 나은 모양이지만 황후와 황비가 아직 숙주 역할을 해 주고 있으니 조만간 증세가 나타날 거다. 임상실험에서도 타액에 의한 전염력은 확실했거든.”

“.......”

“며칠 더 지나고 국상(國喪) 치를 일이 생기면 그제야 생난리를 치겠지. 그 공주년이 먼저 걸려 뒈지지만 않았어도 훨씬 조용하게 끝낼 수 있던 거였는데.”

아스탈이 아쉬운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제 부검을 했으니 놈들도 조만간 알게 되겠죠. 바이러스의 기전까지 알게 되려면 며칠 더 걸리겠지만.”

밀리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외투를 벗었다.

“넌?.......그 유학자 놈에게는 성공했나?”

아스탈의 눈이 갑자기 번득이며 빛났다.

“.......”

밀리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뒤로 돌아섰다.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스탈이 갑자기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던 밀리타의 팔을 확 붙들고는 턱을 거칠게 붙들었다.

“으.......읍.......”

아스탈의 괴력에 밀리타는 별 저항도 못 한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눈에 실핏줄이 보이는군. 피부는 약간 붉어졌고.......평소보다 훨씬 매혹적인데? 왜 그럴까?”

밀리타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아스탈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왜요? 오늘도 절 원하시나요?”

“닥치고 가방 내 놔 봐.”

밀리타가 대번 입가를 씰룩거렸다. 하지만 아스탈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손가방을 힘으로 거칠게 빼앗아들고는 바닥에 확 쏟아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투명한 병 안에서 배란유도제 껍질을 본 순간, 아스탈이 대번 이를 악물었다.

“네년이 감히........”

아스탈의 가는 회색빛 눈동자에는 살기에 가까운 분노가 어려 있었다. 밀리타가 그의 손을 쳐내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무슨 말씀 하시려는 건지 잘 압니다.”

“이것도?”

갑자기 손을 번쩍 치켜든 아스탈은 무방비상태로 서 있는 밀리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매서운 일격에 얼굴을 제대로 얻어맞은 밀리타는 입술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썩을 년 같으니, 기껏 마무리되어 가는 판을 네 멋대로 또 엉망을 만들려고 들어?  그놈을 죽이라고 보냈더니 나 몰래 그 새끼를 가지려 했어? 너도 새끼는 남기고 싶었나 보지?”

아스탈이 혀를 차며 밀리타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허, 그러세요?”

밀리타가 씩씩거리며 입가와 코의 피를 닦아냈다.

“이제 시원하신가요, 아버지? 아니, 그만하죠. 당신한테 아버지란 호칭은 정말로 역겹군요, 아스탈. 저승에 계신 제 진짜 아버지께 미안해서 고개도 못 들겠으니까.”

얻어맞은 밀리타가 부어오른 뺨을 붙들고는 뜬금없이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네년에게서 그 소리 듣는 게 편하지는 않아.”

아스탈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밀리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여전히 히죽거렸다.

“그래요, 그런데 그 녀석 이번엔 넘어오지 않더군요. 최음제로 떡칠을 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멋을 내고 갔는데도 말이죠. 모르죠, 제 진심이 자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특별한 능력 덕에 일찌감치 눈치 챘는지도. 후훗, 기왕 한껏 달아올랐는데 그놈 대신 당신이 안아주실래요? 옛날처럼 뜨겁게.......”

밀리타가 갑자기 어깨와 가슴을 드러내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스탈은 눈가를 씰룩거릴 뿐 이 매혹적인 여인의 벗은 몸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밀리타가 어깨를 으쓱 하며 그에게 놀리듯 말했다.

“이라즈가 황궁에까지 들게 되었으니 참 운명이라는 것도 웃기지요? 당신이 운명을 거스르려 그렇게 발악하셨건만 결국 세상은 그분께서 생전에 원하셨던 대로 풀려가니 말이죠. 안 그런가요?”

밀리타는 이 거친 남자의 회색빛 눈동자를 올려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네년이 완전히 미쳤구나.”

아스탈은 밀리타를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 이를 드러내며 멱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밀리타 역시 그의 기세에 지지 않았다.

“그분께서 아직 살아만 계셨더라면 세상이 어땠을까요? 아직 모르시는군요. 당신 때문에 모든 게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지. 전 말입니다......”

“닥쳐! 이년아!”

아스탈의 괴력에 공중을 붕 날아가 거칠게 동댕이쳐진 밀리타가 악 소리를 질렀다.

아스탈은 쓰러진 밀리타의 목을 꽉 눌러 밟으며 소름끼칠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이상 나불거리면 네년과의 약속이건 뭐건 갈가리 찢어죽일 수 있어. 내가 별 능력도 없는 네년을 살려 둔 건 네가 쓸모가 있어서일 뿐이지 그 별난 눈동자 때문은 아냐. 난 죽은 아버지 같은 멍청한 짓은 하지 않으니까.”

“그래요.......이라즈의 어미도 그리하신 분이 저까짓 것 죽이는 정도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하지만 각오하셔야 할걸요. 이라즈 저놈도 자기 친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면 저와 마찬가지 반응을 보일 테니.”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갑자기 굳어진 아스탈의 얼굴을 보며 밀리타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핏줄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죠. 안도 경이 당신을 미워한 게 출신 탓도 있었겠지만 알 수 없는 육감에서 오는 의심이라는 게 있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이라즈도 언젠가 비슷한 육감을 가질는지도 모르죠.”

“닥쳐.”

아스탈이 밀리타의 목을 다시 꾹 밟았다. 하지만 밀리타는 그의 발목을 붙들며 다시 악을 썼다.

“내 운명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요!”

밀리타의 호소에 아스탈이 코웃음을 치며 그의 이마를 똑똑 두드렸다.

“운명? 허, 너 역시 운명대로라면 이미 뒈졌어야 돼. 내 손길만 떨어지면 네 머릿속에 든 죽음의 시계가 다시 작동될 거니까. 먼저 간 그놈처럼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널 죽여가면서 말이다.”

지금껏 어떡해서든 당당해 보이려 애쓰던 밀리타의 붉어진 눈에 어느새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아스탈은 떨고 있는 밀리타를 바닥에 내버려둔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놈은 실패했어도 상관없어. 그저 만약을 위해 한 것일 뿐이었으니까. 일단은 황제만 죽이면 돼. 이미 죽어가고 있을 지도 모르고.”

아스탈은 쓰러진 밀리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다시 외투를 챙겨입었다.

“트라카 교단이 움직이는 것 같다. 방심할 때가 아니니 넌 여기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황제 놈이 죽고 나면 할 일이 아주 많아질 테니까. 난 다시 바하칼리로 돌아가겠다. 혹시 니사 그년이 이곳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그 골칫덩이는 네가 맡도록 해.......딴 생각은 말고.”

무표정하게 방을 나서는 아스탈의 등 뒤에는 혼자 흐느끼는 밀리타만이 외롭게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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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양가죽 위에서 잠이 깬 오르마즈는 문득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보았다. 하얀 회칠이 된 벙커 천장은 때와 검댕이 덕분에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 위로 큰 벌레 몇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여기가 더 편한 게 왜일까.......”

오르마즈는 천장에 붙은 벌레들을 세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X는 아니었지만 수십 년을 전쟁터에서 보내서인지 감각 하나는 자신도 놀랄 만큼 예민했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도 멀리 동굴 천장의 벌레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전황도 파악할 겸 함께 일선 부대 순시를 나온 에르네스토와 오르마즈는 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이 작은 동굴 소초, 아니 토치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곳에서 밤을 맞이해야 했다. 밤은 민병대보다 월등한 장비를 지닌 코메트 토벌군들의 무대였고, 이 시간에 바깥을 활보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같은 담요를 덮고 옆에 누운 에르네스토를 문득 돌아보았다. 뱀에게 물린 후유증 때문인지, 그는 자다 말고 종종 끙끙대며 신음소리를 내곤 했다. 전사들이 성치않은 그를 위해 따로 침상이라도 만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자기도 전사의 한 명일 뿐이라며 특혜 따위는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었다.

하지만 오르마즈 생각에도 이 동굴은 그가 잠들만한 곳이 아니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 나무판과 양가죽을 깔기는 했지만 찬 기운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전우여, 나의 체온에 기대어라’라는 민병대의 촌스런 군가 가사처럼, 이럴 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건 같은 담요를 덮은 동료의 체온뿐이었다. 그건 이 찬 바닥에 함께 누운 20명의 말단 전사와 하급 장교들도, 심지어 특무여단장이며 준장인 오르마즈와 지도자 에르네스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TSG민병대’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묶여 있기는 했지만, 이들 모두는 10만여의 ‘약간 조직적인 집단’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민병대 안에는 콜로니의 강압적인 신권통치에 반발해 이곳에 지원한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혹은 젊은 유생들도 있었지만, 콜로니의 중앙집권제를 해체하고 분열시켜 자기만의 왕국을 거느리고픈 욕심에 모여든 지방 군벌이 더 많았다.

그렇게 군벌별로, 혹은 믿음에 따라 조각조각나 있다 보니 민병대끼리의 통합적인 의견은 적인 교단과의 협상보다 어찌 보면 더 어려웠다. 군벌 출신들은 ‘강경파’를 이루어 교단의 몰락시키고 떡고물을 얻을 날만을 기다렸고, 순수한 ‘투사’들은 ‘온건파’를 이루어 자신들의 믿음을 인정받는 것에 더 열심이었다.

이런 파벌싸움의 중간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아랫사람 다독이는 데 써야 했지만 강경파들은 걸핏하면 지도자의 권위를 무시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강경파들의 공공연한 하극상에 대항해 에르네스토는 며칠 전, 장남인 샤미르를 ‘정식 후계자 겸 공동지도자’로 전격 선포했다. 최소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라도 드러내라는 주변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에르네스토는 베일로 가려놓은 아들의 방 앞까지 사람들을 데려와 그의 목소리까지만 확인시켜주었을 뿐 그 이상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르마즈를 ‘특무여단장 겸 샤미르의 개인 보좌관’으로 발표해 반대세력에 정면 대응할 것임을 확실하게 했다. 에르네스토는 발표와 동시에 정보업무와 헌병대, 그리고 특무여단 운영에 관련된 많은 의사결정권을 아들 샤미르에게 넘기고 자신은 전반적인 전략수립과 군 운영에 관한 업무만을 맡게 되었다.

오르마즈의 복귀에 안그래도 떨떠름해하던 강경파들은 그가 샤미르의 보좌관으로까지 선임되자 경악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행여 에르네스토가 죽기라도 한다면 민병대 전체가 사실상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다하카르 간택자 출신인 데다가 믿을 수 없는 가족력을 지닌 사람에게 그런 중임을 맡길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고, 특무대에 속한 몇몇 강경파 장교들도 대놓고 상관을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르마즈 본인은 강경파의 이런 반발에 전혀 대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배신자 취급하는 강경파와도, 그를 미래의 리더로 여기고 있는 온건파와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자신의 맡은 일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에르네스토가 잠결에 추운지 몸을 동그랗게 움츠렸다. 오르마즈는 그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자신의 위에 덮어주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 양반도 참......”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서는 망토를 다시 그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다른 지도자들처럼 본부에서 두 부인과 자식들의 곁을 지켰다면 이런 생고생도 할 일이 없었으련만 이 남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물론 아랫사람들이 그의 이런 선한 의욕을 정말로 이해해주고 있는지는 전혀 별개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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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의 과거 이야기의 분량이 공교롭게도 매번 1,5회(?) 정도 분량이어서 계속 이렇게 이상하게 끊기는군요. ^^;;>

이번 편은 앞으로 풀릴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는 데다가 출판본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 보니 어떤 분들께는 조금 생뚱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앞으로 차근차근 등장할 내용들이니 너무 골치를 썩거나 어렵게 생각하지는 마시고 뒤이어질 내용들의 단초라고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어찌보면 중간중간 스토리의 단절이 있는 인터넷 연재의 가장 큰 약점일지도 모르겠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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