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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56화 (455/1,132)

< -- 456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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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들어간 다른 황제의 묘실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바로 1년 반 전에 붕어한 세나우스 3세 오넬론 황제의 묘실은 바로 뒤이어진 제위경쟁 때문인지 마감이 꽤나 엉성했지만 최소한 황제로서의 격은 충분히 살아있었다. 화려한 벽화는 그리다 만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른 곳을 가득 채운 부장품들 덕택에 묘실이라기보다는 황궁 보물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보물들 가운데에 누워있는 건 시신이 아닌, 두 손에 다 잡힐 작은 금제 단지 하나가 고작이었다.

사실 숙부이며 선황인 오넬론의 어이없는 소사(燒死)도 어찌보면 카렐이 밝혀야 할 어려운 숙제 중의 하나였다.

황제가 탄 프리깃이 아무런 이상징후도 없이 스페이스상에서 왜 갑자기 공중폭발했는지, 그리고 폭발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도록 설계된 프리깃의 보안구역이 왜 내부까지 모조리 타 버렸는지 아직까지 그 모든 것이 미궁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죽은 황제는 작은 단지 속에 고작 뼛가루, 그리고 황궁의 옷가지들에 운 좋게 남겨두고 간 몇 가닥의 체모와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쉬고 있었다. 아마도 함께 타 죽은 대신들의 유골과 뒤섞여 있기는 하겠지만.

유전자검사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타 버렸으니 그 대신들도 얼떨결에 황제와 함께 매장되는 행운 아닌 행운을 받은 셈이었다.

자신의 죽음은 생각조차 않았던 오넬론의 묘가 그렇게 엉터리로 마무리된 것이 비해, 생전에 자신의 죽음을 항상 준비했던 그 어머니 세나우스 2세 유평황제의 묘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함께 묻힌 부장품은 도리어 적었지만 벽화에는 그의 생전의 업적들이 꼼꼼하게 남아있었고, 생전의 연표, 자료들도 묘 한쪽에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존 처리된 황제의 마지막 모습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소를 띤 평온한 표정 그대로 남아있었고, 심지어는 최후까지 공석이었던 황후위의 관도 그 옆에 나란히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텅 비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황후위의 관에는 뜻밖의 내용물이 들어있었다. 그 안에는 어깨 부분이 약간 찢어지고 핏자국으로 보이는 검은 얼룩이 조금 남아있는 흰 실크 원피스 한 벌이 단정하게 펼쳐져 있었다.

카렐도 이것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꽤나 궁금했지만 유언 집행인이었던 장남 로노 장태자도 죽었으니 모든 것이 이제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카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피스의 피얼룩에서 솔기 몇 가닥을 뽑아오기는 했지만 크게 기대하는 것은 없었다.

카렐이 자신의 묘 자리도 미리 만들어 두어야겠다고 페로에게 말한 것도 이 두 군데의 묘를 모두 보고 나온 직후였다. 물론 페로가 길길이 날뛰는 통에 그 이상 구체적인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지만.

어두운 복도를 타고 몇 걸음 나아간 카렐은 한쪽에 있던 스위치를 켰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작동되는 노란 불빛이 좁은 회랑을 타고 군데군데 들어왔다. 오랜 시간 때문인지, 조명 중 절반 정도는 작동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카렐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카렐은 방역복을 입은 둔한 몸을 움직여 지하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회랑의 램프를 타고 조심스레 걸어 내려갔다.

이곳 회랑에는 유평황제 같은 화려한 업적들도, 그 아들 오넬론같이 그리다 만 조잡한 그림도 없었다. 그저 잘 다듬어진 하얀 대리석이 마치 빈 도화지처럼 그대로 남아있었다.

“몸이 영 안 좋군.”

마지막 문 앞에 선 카렐이 이마를 짚었다. 지하공간의 차가운 냉기 때문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마지막 돌문을 힘껏 열었다. 그리고 지나온 회랑처럼 흰 대리석으로 둘러진 원형의 묘실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제국 모든 사람들이 그 정체를 궁금해 할 샤미르 리쿠가 누워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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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까지의 전황은 특별히 나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없었다. 민병대는 교단을 절멸시키자는 강경파와, 정교분리만 확립시키고 종교자유만 승인받으면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온건파가 여전히 세력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교단 역시 후임 대신관 선임을 놓고 내분에 휩싸여 제대로 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난한 민병대는 이런 기회를 살릴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 샤미르도 어느새 24살의 성숙한 청년이 되었고, 51세의 오르마즈는 특무여단과 헌병대를 확대 개편한 정보군단의 중장급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정보사령관에 오르면서, 오르마즈는 민병대 보통 전사들과 뒤죽박죽 뒤섞여 전장에 마구 투입되던 X들의 절반 이상을 정규군과 따로 분리해 3천에 달하는 독립된 기병 여단으로 편성해 베흔에게 맡겼다. 이번 조치로 X들을 빼앗긴 야전 지휘관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는 ‘언제든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전세를 결정지을 수 있는 건 결국 강력한 한 부대다’라는 대답으로 그들의 입을 봉해버렸다.

“이런 저주받은 삶이 싫어.”

샤미르는 그 맑고 아름다운 검은빛 눈동자를 살짝 치켜뜨며 창 너머 보이는 맑은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유난히 흰 피부가 그대로 드러난 목젖은 마치 무언가에 메이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난 아마 죽어서도 이런 방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지도자가 된 이상, 난 죽어도 썩지도 못한 채로 또다시 멸균실에 넣어져 보관되겠지. 그래, 어쩌면 지도자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 들어가야 될 곳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들어간 것일 뿐일지도 모르지.”

오르마즈는 주군을 말없이 올려보았다. 오르마즈에게서 별 대답이 없자 샤미르는 천천히 그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알아. 이런 내 넋두리가 철없는 꼬마의 칭얼거림 쯤으로 들리리라는 거. 주군이 신하에게 할 말은 틀림없이 아니지.”

오르마즈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저 똑똑한 청년이 굳이 자신의 잔소리같은 조언이 없이도 무엇이 옳은지를 이미 머릿속에 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난 너를 비롯한 몇 명의 말을 듣고 세상을 모두 파악해야 하지. 그래, 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제왕이라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세상을 알아갈거야.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지만 내게는 한 장의 서류일 뿐이지.”

낮은 한숨을 내쉰 샤미르는 오르마즈가 가져온 처형 승인 요청에 기계적으로 서명을 했다.

“내게도 보고서 말고........부딪힐 수 있는 진짜 현실이 있을 수 있을까? 카파키 장군. 아니, 오르마즈.”

낯선 호칭에 오르마즈가 잠시 당황했다. 샤미르가 ‘카파키 준장’이 아니라 ‘오르마즈’라고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전하께는 현실입니다.”

“네 존재는 정말로 현실일까?”

샤미르는 유리벽 밖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오르마즈를 문득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어. 어머니는 내게 꽃밭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하셨지. 난 이 사막 골짜기에서 태어나 자랐고, 태어나서 꽃이라는 걸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거든. 어머니는 나를 차에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가셨어.”

그는 죽은 어머니 파란기스 생각이 나는지, 손가락이 몇 개 남아있지 않은 왼손을 더듬으며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퍽이나 예쁘더군........맑은 연못가에 노란 수선화가 가득히 피어있는.......”

“아름다운 기억이겠군요.”

“그럴까?”

“예?”

샤미르가 입가에 쓴웃음을 품었다.

“난 어머니한테 저 중에 한 송이만 꺾어다 달라고 했어. 캡슐에 잘 싸서 갖고 오면 별로 문제없지 않겠냐고 말이야........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당황하시더군. 난 그제야 깨달았지. 내가 있던 곳이 진짜 꽃밭이 아니었다는 걸 말이야.”

오르마즈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어쩌면 저 청년은 유리 밖의 세계 전체를 모두 불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날 기쁘게 해 주려고 그 홀로그램을 한 달이나 걸려 만드셨다지. 사막 한중간에 그런 수선화 꽃밭이 어디 있겠어. 난 그 자리에서는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갔지만 어머니가 그 뒤로 며칠이나 우울해 계셨다는 건 잘 알아.”

샤미르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꽃잎의 존재를 내 손으로 만져볼 때까지는 어차피 다 똑같아. 유리를 통해 들어온 스펙트럼의 장난이건, 실제 꽃에서 반사된 태양광선이건 같은 종류의 빛이기는 매한가지니까. 내가 정말로 꽃밭에 와 있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면 그걸로 되는 거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결국은 마찬가지였을 거야. 어머니 역시 그렇게 믿고 싶으셨겠지.”

“저의 존재 역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오르마즈가 무거운 말투로 물었다. 샤미르는 하늘을 올려보며 멍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난 어쩌면 민병대 지도자의 아들이 아닐지도 몰라. 이 유리 밖으로 보이는 영상도 아들이 그렇게라도 삶의 희망을 얻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소원대로 연출된 것일지도 모르지. 내 뒤에 앉아있는 여자도 내 아이를 출산해주기 위한 여자가 아니고 어느 병원의 이름 없는 보조원일지도 모르고.”

샤미르는 손에 있던 결재서류를 박스에 넣어 바깥으로 내놓았다.

“처형에 서명은 했지만 난 그들이 어떻게 죽는지도 몰라. 그래, 내겐 현실이 없어. 그 결과를 직접 눈앞에서 볼 일이 없다보니 내 결정은 철저하게 이성적이면서도 무책임하지. 2명이 아니라 200명을 죽인다 해도 내가 할 일은 고작 거기에 0 두 개를 더 써 넣는 것이 전부니까 말이야.”

낮은 한숨을 내쉰 샤미르는 짧게 두 번, 손뼉을 끊어서 쳤다. 그 신호는 뒤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이곳을 잠시 나가 있으라는 명령이었다. 자리를 비우는 것을 확인한 샤미르는 오르마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로 와 주게. 오르마즈. 잠깐만이라도......”

오르마즈는 샤미르의 맑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오르마즈의 의심에 찬 시선에 잠시 당황하던 샤미르는 그리다 만 수채화와 마치 낙서처럼 휘갈겨 빽빽하게 쓴 노트를 더듬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난 아직 그림을 단 한 번도 완성해 본 일이 없어.”

샤미르는 하늘이 미처 칠해지지 않은 풍경화를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푸르른 숲과 밀밭, 그리고 작은 집 한 채가 그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항상 제일 중요한 곳에서 막히곤 하지. 아마 이 그림도 영원히 이렇게 남게 될 거야. 쪽빛 하늘과 새털구름 아래 평화로운 농가일지, 아니면 몰려오는 먹구름 아래에서 아이들이 폭풍우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광경일지.”

“언젠간.......”

“하지만 이것만은 완성하고 싶어.”

오르마즈를 잠시 쳐다보던 샤미르는 도화지를 걷어내고 그 뒤에 있던 역시 그리다 만 캔버스를 드러냈다. 그곳에는 다갈색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채 바닥에 꿇어앉은 웬 여자가 검은 머리칼의 한 남자를 무릎 위에 꼭 안아주고 있었다. 이 역시 배경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 두 남녀가 누구인지를 바로 눈치 챈 오르마즈는 샤미르가 6년 가까이 자신을 시중든 그 여자에게 왜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샤미르가 캔버스를 더듬으며 말했다.

“이 뒤에는 무슨 광경일까?”

“......”

샤미르의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는 어느새 오르마즈를 애타게 향하고 있었다.

“제발, 나도 자네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 주게.”

샤미르가 유리벽을 살며시 왼손으로 짚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차갑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인 지도자께서 마음을 두실만한 인물이 아니옵니다.”

샤미르는 유리벽에 여전히 손을 얹은 채 되물었다.

“나 같은 병신이 언감생심 마음을 둘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인가?”

“그런 의미가 아님은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도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듣고 있어. 내 앞에서는 한 명의 유능하고 빈틈없는 보좌관이지만 사생활에서는 자유분방하고 남자도 많다더군. 그런데도 정작 같은 민병대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지. 어쩌면 자네도 나 같은 유리벽을 하나쯤 갖고 있는지도 몰라.”

샤미르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도 몇 개 남지 않은 그의 손은 오르마즈에게 빨리 오기를 재촉하는 듯 여전히 유리벽을 짚고 있었다.

샤미르가 다시 오르마즈를 올려보았다. 오르마즈는 결국 손을 들어 유리벽 위를 조심스레 짚었다. 샤미르의 손이 반대편에 닿아있던 유리벽 위는 생각 외로 따뜻했다.

“그래.........이게 자네의 온기로군.......”

안쪽에서 오르마즈의 체온을 느낀 샤미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굳어있던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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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카렐은 묘실 안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은 채 놀라움의 신음소리부터 냈다. 내부에는 벽화 같은 것도 전혀 없었지만 그 대신 백 점은 훨씬 넘을 밝은 수채화들로 벽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 풍경화들인가......”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묘실의 모습에 카렐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마치 풍경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꾸며진 화랑 같았다. 그리고 그림들의 구석에는 하나같이 샤미르 본인의 서명이 남아 있었다. 그는 죽은 후에도 이곳에 누워 자신이 그린 이 많은 그림들을 통해 바깥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림들은 하나같이 미완성 상태였다.

카렐은 중앙에 있는 관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유리로 덮여 있는 그 안쪽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맙소사.”

카렐의 미간에 갑자기 주름이 잡혔다. 자신의 종증조부---최소한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기로는---의 보존처리된 시신 역시 잠든 듯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5척 9촌(177cm)정도의 키에 수명개조 전 나이로 치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인상의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여위어 있었다. 하지만 죽어있는 그의 얼굴에는 묘한 행복감과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 사람이 ‘핏빛 비수’라니.......이런 외모로 왜 숨어 지낸 거야?”

카렐은 관을 조심스레 열고 시신의 고운 얼굴을 살며시 짚었다. 입관 전에 거쳤을 간단한 메이크업 때문인지 마치 당장이라도 눈을 번쩍 뜰 듯 생생했고 언뜻 눈에 보이는 외상도 전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신 거지........”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미르의 죽음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었지만 그 중 발현자에게만 있는 특유의 혈액 거부반응 때문이라는 주장과 쿠데타 세력에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카렐은 샤미르가 입고 있던 수의를 조심스럽게 벗겨보았다. 정말로 살해당했다면 어떤 외상이나 독살의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고, 혈액 거부반응이라면 리에드의 경우처럼 몸에 검고 큰 반점이 남아있을 터였다.

“휴.”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예상처럼, 시신에 흐릿하나마 검은 반점이 틀림없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리에드의 경우처럼 이것이 직접적인 사인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샤미르의 수의를 다시 정돈해 준 카렐은 다시금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응?”

그의 머리칼을 짚었던 카렐은 숱이 이상하게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신의 머리를 조심스레 들고 그 안쪽을 헤집어 보았다.

“탈모?”

카렐은 그의 두피에 눈을 바싹 가져갔다. 보존처리가 잘 된 시신치고는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했고 안쪽에는 군데군데 탈모의 흔적까지 보였다. 죽기 직전, 무언가 심각한 병을 앓았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난감해진 카렐이 고개를 저었다. 시신까지 확인했지만 샤미르의 사인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400년 가까이 먼 옛날에 돌아가신 조상의 시신을 이제와 부검하겠다고 나선다면 유학자들이 또 벌떼같이 들고 일어설 것이 뻔했다.

“이런 예민한 때 문제를 일으킬 필요야 없지.......”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시료 병을 열었다. 그는 잠시 눈앞이 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 한 번, 묘실의 차가운 기운이 카렐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는 갑자기 멍해진 정신을 얼른 가다듬으며 서둘러 이런저런 표본을 채취해 병에 담았다.

급히 돌아나가려던 카렐은 관 옆에 세워져 있는 웬 이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그 베일을 걷어보았다. 이곳에서 발견한, 풍경화가 아닌 유일한 그림이었고 유일한 유화였다.

“흐음........”

카렐이 캔버스 위를 조심조심 더듬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한 남자, 그리고 그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다갈색 머리칼의 여인은 무척이나 공을 들인 듯 세밀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둘의 외모에서 카렐은 그들이 누구를 뜻하는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당혹스러워진 카렐은 그림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노란 꽃이 가득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밭이 이 두 사람 주변에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수선화.......”

꽃을 유심히 살핀 카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제로 보고 그린 듯, 꽃 하나하나의 디테일이 그대로 살아 있었지만 선이 어딘지 고르지는 않았다.

“도대체.......”

카렐이 다시 이마를 짚었다. 상황이 혼란스러워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별 것 아냐.”

카렐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며 묘실 바깥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샤미르는 이 어두운 묘실 안에 또다시 홀로 남겨진 채 비틀거리며 떠나는 카렐의 뒷모습을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묘실을 나서 회랑을 걸어올라 두 번째 문을 막 열려던 카렐은 돌문 안쪽에 새겨져 있는 오래된 고대 문자를 발견했다.

“아담.......티아.......파라바르탐.......파티야바람.......”

카렐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옛 사교 성직자들이 썼던 이 ‘바람문자’가 사교를 그토록 증오했다던 샤미르의 묘에 남아있는 것부터가 무척이나 어색했다. 게다가 그 뜻과 정황을 보아 누가 새겼는지를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카렐은 오르마즈가 새겨놓은 그 문장의 뜻을 되뇌며 돌문을 열었다. 석실로 스며드는 바깥의 빛을 본 순간 그의 기분도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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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자르기가 애매해서 좀 깁니다.....분량 나누기에도 신경을 좀 써야 되는데......맘먹고 길게 올렸으니 가시는 길에 한 마디 남겨주시는 거 (혹은 추천이라도) 잊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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