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7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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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람이 입을 게 못 되는군.”
카렐은 답답한 방역복을 벗어던지며 큰 숨을 탁 내쉬었다. 날이 추워져서인지 하늘에서는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내가 이 짓을 도대체 왜 시작했나 싶어.”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그렇고, 샤미르 리쿠의 관은 보셨습니까? 어떻게 생기셨죠? 소문대로 이상하게 생긴 돌연변이셨나요?”
우베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어왔다. 다른 사람들 역시 카렐에게서 나올 대답만을 고대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글쎄, 누군가 밝히고 싶지 않아했던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게야.”
카렐이 우베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하고는 황궁을 향해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좀 피곤한걸. 날도 춥고......”
카렐이 눈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우베가 이 황제의 어깨에 두툼한 망토를 급히 덮어주었다. 북반구 내륙에 위치한 황도에서 1년 중 가장 추운 때가 겨울이며 우기인 바로 지금, 6월부터 8월까지였다.
“지금쯤 타르서스는 한여름이겠지. 맘 같아서는 거기 별궁으로 도로 이사라도 가고 싶군.”
“올해 겨울은 기록적인 한파가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저 강 건너 연합군들에게는 더 지독한 겨울이 되겠지요.”
카렐은 문득 고개를 돌려 멀리 언덕 아래 보이는 욱리하를 내려다보았다.
“욱리하 결빙 가능성은 알아보라고 했지?”
“예. 확인 결과 부분적인 결빙은 가능해도 전면적인 결빙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합니다........그건 아랫사람들이 이미 알아서 챙기고 있으니 폐하께선 옥체에 더 신경을 쓰시는 것이......”
“그래, 알아서들 잘 하고 있겠지.”
카렐은 평소 잘 쓰던 말을 또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보통 때에 비해 눈에 띄게 창백했다.
“난 그럼 들어가 봐야겠군.”
힘없이 멀어져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모렌 박사가 우베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폐하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나?”
“글쎄요, 오늘 하루 종일 오래된 시체만 보셔서 그러신 모양입니다.”
잠시 당황했던 우베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강 얼버무리고는 급히 카렐을 쫓아 달려갔다.
쿠트라스 트라카 교단 병원의 신경외과 병동에는 여전히 시한폭탄 같은 불청객이 머무르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독실을 쓰고 있는 이 ‘가벼운 뇌출혈’ 환자가 왜 이리 오래 머무르고 있는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경외과 과장인 니사 외에는 출입조차도 금지되어 있는지라 그저 ‘뒷심 좀 쓴 고위층 누군가겠지’하고 넘겨짚는 것이 전부였다.
여느 날처럼 안부를 확인하러 찾아온 니사에게 병실에 있던 구르베스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저어 이런 이야기 감히 드릴 자격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로 아픈 데도 없는데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니 정말 죽을 지경이군요.”
“책이라도 좀 구해다 드릴까요?”
니사가 묻자 구르베스가 정색을 하며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여기에서 제가 뭐 할 일 같은 건 없을까요? 궂은일이라도 별 상관없습니다. 제 신분 따위는 생각지 마시고......”
구르베스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니사가 차분한 표정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글쎄요,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시건 간에 어쨌든 아가씨는 한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제후의 적녀(嫡女)이십니다. 굳이 따지자면 황손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선택받은 혈통이시죠. 그런데.......”
“아실지 모르지만 전 기병대 일선 장교 출신입니다. 한번은 두 다리가 잘린 부하의 몸통만 지고 전장을 뛰어다니기도 했고, 5차 혼란기 때는 정글에 포위당한 채 열흘이나 벌레만 파먹고 연명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그저 집안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자란 영애로 보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휴.”
니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근위대 보안국 요원들로 보이는 저 괴한들은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떠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어차피 며칠 지나시면 아케메니아로 돌아가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며칠만 더 참으시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구르베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순간 당황한 니사가 다시 물었다.
“그 편지에는 며칠간 오지 않으면 카렐 폐하께 그대로 투항하라고......”
“그분의 안전을 모르는데 제가 어찌 혼자 비겁하게 도망치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제가 결정할 문제니 신관님께선 더 이상 참견치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니사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하신 건 아무래도 제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닌 듯 하니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깥으로 사라진 니사가 되돌아오기까지는 30분 정도가 더 걸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구르베스는 상대가 스스로를 소개하기도 전에 먼저 고개부터 숙이는 스스로의 모습에 놀랄 지경이었다. 이번에 나타난 여인은 누군지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그 위압감만으로 상급귀족이 먼저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6척(180cm)은 넘어 보이는 장신의 탄탄한 체격이었고, 니사와 마찬가지로 의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다정하고 친근한 그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지난번 말씀드린 그 사람입니다.”
니사가 구르베스를 가리키며 그 여자에게 공손히 말했다. 여자는 그제야 구르베스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구, 구르베스 슈트란이라고 합니다.”
구르베스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지만 여자는 자신에 관해 밝히지 않았다. 심지어 가슴에도 이름표가 보이지 않았다. 언뜻 40대 초반 정도의 중년에서 수명개조된 것으로 보였지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깨끗한 피부와 완벽하게 균형이 갖추어진 생김생김에서는 젊은 후세대를 능가하는 묘한 매력이 흐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먼저 압도당한 구르베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의 유난히 부리부리하고 까만 눈동자는 마주선 사람을 압박하는 묘한 광채를 품고 있었다.
그를 힐끔 올려보았던 구르베스는 내심 ‘이런 데서 사교도 의사로 있기는 정말 아까운 눈빛이군.’ 싶었다. 귀 밑에 별다른 표식이 없는 것을 보아 성직자도 아닌 것 같았다.
“안전 문제도 있으니 2별관에서 일하도록 하게.”
여자가 꺼낸 첫 마디였다. 큰 체구 때문인지, 여자 치고는 유난히 굵은 음성이었다. ‘2별관’이 무언지 모르는 구르베스는 잠시 어리둥절해졌지만 도리어 놀란 건 니사였다. 그는 여자에게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곳은 비신도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도로 만들던가.”
여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구르베스는 명색이 ‘신경외과 과장’이 이렇게까지 굽실거리는 상대가 도대체 누구인지 너무도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저어, 저는 개종할 생각은 조금도.......”
“누가 개종하라고 하였습니까.”
구르베스를 향한 여자의 목소리는 언뜻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성격 자체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인지 그는 필요한 말 외에는 입도 열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니사가 입을 열었다.
“가짜신분증이 있으니 그것으로 일단 신도로 등록하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괜찮겠지요?”
니사가 구르베스에게 다시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구르베스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종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도주용 가짜 신분으로 등록을 하는 정도라면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구르베스에게서 일단 대답을 들은 니사는 그 여자와 함께 병실 밖으로 사라졌다. 구르베스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 둘은 얼굴을 바싹 붙인 채 무언가 진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말입니까?”
니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여자에게 물었다. 그의 창백해진 표정에는 평소의 온화하고 귀엽기까지 한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경악과 공포감이 어려 있었다. 여자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니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자네가 가 주어야 하겠어.”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셔서 영광입니다.”
니사가 여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구르베스는 저 둘의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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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른 이름으로 더 유명해질 기원 52년 초입, TSG 민병대와 ‘침묵의 자매들’ 교단 사이의 첫 평화회담이 비로소 성사되면서 콜로니는 당장이라도 내전이 끝날 것 같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이번 평화회담 개회 합의는 그간 온건파를 강력하게 지원해 온 지도자 에르네스토의 정치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오르마즈와 함께 북극 푸엘 숲의 회담장을 찾은 TSG지도자 에르네스토를 맞아 준 건 제2서열에 해당하는 트라카 교단의 최고지도자 마구스인 ‘수나 빈트 트라카’였다. 원래대로라면 제1서열인 다하카르 교단의 대신관 ‘바즈라마구스’가 맞아주어야 적당했지만, 전임 대신관 야푸르의 죽음 이후 16명이나 되는 그의 자식들은 여전히 승계권을 놓고 지겨운 내분을 벌이고 있었다.
형제들간의 목숨을 건 이런 내분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12개 마구스 가문의 특별한 계승방식에 따라, 이들 중 대신관이 되지 못하는 형제들은 무조건 제거되어 ‘핏줄을 깨끗이’ 하여야 했다.
물론 지금까지는 마구스가 늙어 노년에 접어들 때 자식 혹은 손자들 중 ‘가장 우수한 유전형질의’ 후계자를 지명하고 나머지 자식들과 그들에게서 난 손자들 전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제거해왔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수명개조가 있은 이후, 12명의 마구스들은 손에 자식의 피를 묻혀야 하는 이런 후계자 지명을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임 대신관 야푸르 역시 몇 번 이런저런 의견을 보인 일은 있었지만 역시 공식적인 후계자 지명은 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렇다보니 형제들간의 이런 계승권 싸움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모든 후손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렇게 공석중인 대신관을 대신해 2서열의 마구스가 나왔으니 평화회담 자체는 그 형식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번 회담장은 북극 푸엘 숲의 풍광 좋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아담한 별장이었다. 주변 풍광을 보라는 배려인지, 유난히 큰 통유리로 3면이 둘러쳐져서 바깥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번 회담에 교단 측에서는 직속 보안부대인 헤네티 경호원 20여명과, 정규군 부대인 코메트 부대의 정예요원 30여명이 동행했고, 에르네스토를 호위하고 온 건 정보사령관 오르마즈와 베흔이 이끄는 X출신 전사 15명이었다.
교단의 광신도들인 이들 헤네티는 명목상 ‘치안조직’이라는, 언뜻 만만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개개의 능력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직업군인에 불과한 코메트와는 달리 교단 수호라는 마약같은 명제에 고도로 세뇌당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일설에 아라무트의 암살집단처럼 이들에게도 마약을 먹인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민병대의 X들에게는 자신들을 전혀 두려워하지조차 않는 저 미친놈들은 전장에서도 가장 상대하기 꺼려지는 자들이었다.
별장에 도착한 에르네스토는 집 앞에서 먼저 기다리던 흰 망토 차림의 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벌려 보였다. 교단의 손에 거열형을 당해 참혹하게 죽은 리 리쿠의 후손과 교단의 최고수뇌부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리 리쿠의 증손자이며 TSG지도자인 에르네스토입니다.”
“빛의 수호자인 트라카 교단을 이끄는 마구스 수나라고 하오.”
굵고 힘이 있는 마구스의 목소리가 바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얼굴에 드리운 흰 베일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여자의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번득이는 눈동자가 가는 광채를 뿜고 있었다. 지금까지 마구스들의 전통처럼, 그는 외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훤칠하게 큰 키와 당당한 자세만으로도 몇 대에 걸쳐 세심하게 선별되어 내려온 마구스 혈통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수나의 눈동자는 에르네스토와 함께 온 오르마즈에게도 잠시 관심을 보였다. 오르마즈는 그에게 가벼운 눈웃음을 보냈다.
“필요는 없을 듯 하나.......”
수나는 손바닥을 펼치고 소매를 걷어 손목을 에르네스토에게 내보였다. 반 뼘 정도 폭의 은빛 팔찌에는 12개의 교단을 상징하는 조각이 빙 둘려져 새겨져 있었고, 손등에 있는 가장 큰 혜성의 문장이 이 소유자가 트라카 교단의 마구스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마구스의 팔찌로군요.”
수나는 별 대답도 않은 채 손목을 다시 망토자락 속으로 감추고는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있는 에르네스토의 손에도 잠시 시선을 주었다.
“유전자 변이된 독사의 독에 기존의 보통 항독소를 쓰면 신경계에 심한 후유증이 남는 법이요. 가시는 길에 내 주치의에게 처방전을 준비해 드리라 하겠소.......니사 라말라 박사.”
수나 마구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트라카 교단의 성직자를 상징하는 흰 로브 차림의 마구스 주치의 니사 라말라 박사가 해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르마즈는 그의 가슴에 남아있는 다이아몬드 브로치---바로 자신이 헤어지며 선물했던---를 보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에르네스토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구스가 되시기 전 권위있는 병리학자셨다고 들었습니다. 친절 감사히 받겠습니다.”
에르네스토와 수나 마구스는 처음의 어색함을 떨쳐버리고 회담장 안쪽으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콜로니의 관심이 집중된 이번 평화회담은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위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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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공지입니다. ^^;;>
# 혈맥 출판본이 SK텔레콤 네이트의 모바일 서점에서 모바일 북으로 서비스가 개시되었습니다. 현재 1권이 시범서비스 중이고 곧 2권이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모바일 북에는 기술적 문제(아마도 다운받을때 패킷 문제인 듯)로 인해 개인지에 포함된 그림과 삽화가 빠졌습니다만 내용은 같습니다.
05년 7월 현재 오픈기념 이벤트가 진행중이라고 하니 일부는 무료로 보실 수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화면 오른쪽 혹은 메인화면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