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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58화 (457/1,132)

< -- 458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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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잘하면 앞으로 우리도 손에 피 묻힐 일 없겠군.”

X여단장인 베흔 준장이 함께 선 동기 즈바크의 귀에 대고 킬킬거렸다. 그의 말대로, 당초 칼끝을 걷는 듯 팽팽하던 분위기는 양측 지도자들의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첫 대화 덕분인지 어느새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음?"

에르네스토를 따라 막 별장에 들어가려던 베흔은 언덕 아래쪽 소나무 숲에서 느껴져 온 인기척에 잠시 움찔거렸다.

“여기.......반경 50스타디아 일대는 완전 소개시킨다 하지 않았던가?”

베흔이 앞을 휙 돌아보았다. 오르마즈와 에르네스토 일행은 수나 마구스를 따라 막 집 안에 들어서던 참이었다. 즈바크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바깥에 3명만 보내.”

즈바크에게 주변을 살피라며 눈짓을 보낸 베흔이 급히 달려가 수나 마구스에게 바싹 붙어서 섰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행여 딴생각은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에 뒤질세라 교단 측 경호요원인 헤네티 두 명도 갑자기 에르네스토에게 다가왔다. 그 사이, 먼저 들어간 코메트 요원들은 이 유리집 안쪽, 유일하게 벽이 덧대어져 있는 곳에 죽 도열해 섰다.

X들과 헤네티들 사이에서 갑자기 조성된 긴장감을 눈치 챈 오르마즈가 에르네스토의 앞을 가로막으며 팔을 덥석 붙들었다.

“지도자 전하, 잠시만......”

“응?”

에르네스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날카로운 파열음과 동시에 집 주변에서 무언가 시커먼 것들이 공중으로 확 솟아올랐다.

“적이다!”

X들이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지금 도대체 누가 ‘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뻥 뚫린 이 별장의 유리벽 때문에 집 안쪽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은 수많은 볼트들이 이 유리집을 향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도자 전하!”

오르마즈가 에르네스토를 몸으로 덮쳤다. 반대편의 수나 마구스 역시 두 명의 헤네티들에 깔려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사방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울리며 수백 개의 볼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리 파편들이 집 안팎 할 것 없이 공중을 날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째지는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그 뒤를 이었다.

“아악!”

2발의 볼트에 날갯죽지와 다리를 차례대로 명중당한 오르마즈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뒤이어 날아든 또 한 발의 볼트가 에르네스토의 겨드랑이를 푹 파고들었다. 바닥으로, 그리고 쓰러지는 사람들의 몸 위로 사방에서 부서진 유리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제기랄, 뭐야?”

첫 번째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후, 의자 뒤에 운 좋게 몸을 숨겼던 베흔이 조심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집중사격을 받은 X들은 물론이고 주변의 헤네티들까지도 성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뺨을 흐르는 핏줄기에 놀란 베흔이 움찔거렸다. 그의 팔과 뺨에 볼트가 스치긴 했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웬만한 사격은 피하거나 막아내는 X들이었지만 이렇게 엄청난 밀도의 집중사격 앞에서는 그들로서도 피할 곳이 없었다.

“가만히 계십시오! 상처가 더 커집니다!”

부상을 입은 오르마즈는 에르네스토를 한 팔에 붙든 채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철제 난간 밑에 몸을 숨기고 그의 얼굴과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 사이에도 무수한 볼트가 계속 바닥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자신의 상처를 확인하려는 에르네스토의 얼굴을 힘으로 꽉 내리누르며 악을 썼다.

“전 상관없으니 제발 꼼짝하지 마십시오!”

“빌어먹을! 어떤 놈 짓이야!”

여전히 숨어있던 베흔은 차마 몸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사방에 대고 악을 썼다. 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응?”

사방에서 쏟아지던 볼트 세례가 어느 순간 뚝 끊기자 베흔이 도리어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다 죽여!”

이 불안한 고요함을 찢어내며, 제일 안쪽 벽 뒤에서 미리 몸을 피해 있었던 30여명의 코메트 요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그만두지 못할까! 명령이다!”

그들을 제일 먼저 가로막은 건 온몸에 볼트를 뒤집어쓰고 죽은 2명의 헤네티들을 헤치며 나타난 수나 마구스였다. 그 역시 볼트가 박힌 쇄골 위쪽, 그리고 한쪽 팔 밖으로 엄청난 피가 흰 망토를 타고 번져 있었다. 수나 마구스가 코메트들을 저지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코메트는 바로 자신들의 통수권자인 이 마구스에게도 서슴없이 무기를 겨누었다.

“마구스님!”

부상을 입은 헤네티 두 명이 책상 뒤에서 튀어나와 마구스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숫자에서부터 절대적인 열세였다. 7명 정도의 움직일 수 있는 X들이---아마도 역사상 유일하게---헤네티들을 도와 이 싸움에 달려들었다. 비록 몸이 완전히 성한 X들은 한 명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즈바크, 넌 거기서 지도자 전하를 지켜!”

베흔의 지시에 즈바크가 비틀거리며 에르네스토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다리에만 3개의 볼트를 맞고 가뜩이나 둔해져 있던 그는 몇 발짝 가지도 못해 또다시 옆구리에 볼트를 명중당하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안 돼, 이건 안 돼.”

겨드랑이에 볼트를 맞은 에르네스토는 가슴 위에서 신음하고 있던 오르마즈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때, 몇 번의 짧은 타격음과 함께 에르네스토가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도자 전하.......”

오르마즈가 반사적으로 에르네스토를 다시 눌렀다. 하지만 그의 뺨과 목, 가슴을 타고 벌써 피가 조금씩 번져나가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다시 그를 몸으로 감싸려 했지만 이미 4발이나 되는 볼트를 급소에 명중당한 이상 별 소용이 없었다. 턱 밑에 비스듬히 꽂힌 볼트가 반쯤 벌어진 그의 입 안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아악.......”

잠시 멍해져 있던 그는 입 안에 잔뜩 고인 피를 공중에 분수처럼 토해냈다.

“지도자 전하!”

얼굴에 붉은 피를 뒤집어쓴 오르마즈가 죽어가는 에르네스토의 가슴을 마구 두들겼지만 이 현명한 지도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입을 세로로 꿰뚫은 볼트 때문에 마지막 말조차 남길 수 없었다. 오르마즈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얼굴에 뒤엉킨 피를 닦아내며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걱정 마십시오.......그분은 제가........지켜드리겠습니다.”

죽어가는 그에게 오르마즈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에르네스토는 피 묻은 손으로 오르마즈의 손등을 꽉 짚으며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안심하고 부인께 가십시오.”

오르마즈는 조금씩 힘이 빠져가는 에르네스토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에르네스토의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얼굴을 뒤덮은 피와 함께 바닥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희미하게 열려있던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단명한 조상들처럼, TSG의 8대 지도자 에르네스토 리쿠도 47년의 짧지만 치열한 삶을 이곳 북극 푸엘 숲에서 마무리지어야 했다. 이제 갓 25살이 된 젊은 아들 샤미르를 홀로 남겨둔 채로.

한쪽에서는 X들과 헤네티, 코메트들이 뒤엉켜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도 모를 혼란스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격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근접전에서는 코메트들은 X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가재도구들을 모조리 모아서 엄폐물을 만들어! 빨리!”

마지막 적병을 쓰러뜨린 베흔이 X들에게 악을 쓰고 지시를 내렸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생명력 강한 X들, 그리고 헤네티들의 필사적인 보호를 받았던 수나 마구스와 주치의 니사, 두세 명의 성직자들, 그리고 오르마즈가 전부였다.

그나마 가장 성한 베흔이 X전사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죽은 코메트 놈들 갖고 있던 무기를 모두 회수한다! 너희들! 손가락 움직일 수 있는 놈은 석궁이라도 쥐고 있어! 당장 인근 아군에 지원요청을 할 테니까! 몇 분만 버티면 된다! 알았나?”

하체를 움직일 수 없는 X들도 일단 바닥에 떨어진 석궁을 주워들고 창밖에 눈을 내밀었다. 집 밖의 숲에는 도대체 몇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적병들이 아직 매복해 있었다. 하지만 이쪽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남아있는지 적들도 짐작할 수가 없을 테니 이제 함부로 접근해오지는 못할 터였다.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은 베흔은 쓰러져있던 에르네스토와 오르마즈 쪽을 그제야 돌아보았다.

“이런, 맙소사.”

그가 지도자를 지키라며 보냈던 즈바크는 홀 중간쯤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한 베흔은 바닥에 몸을 바싹 낮추고 에르네스토에게 달려갔다. 그의 옆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꿇어앉아 있던 오르마즈가 끓는 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미 돌아가셨다.......”

베흔은 입을 쩍 벌린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르네스토가 죽었다는 한 마디는 이곳을 필사적으로 사수한 X들 사이에 순간 무서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씨발, 그럼 저년도 죽여.”

격분한 X들 중 몇 명이 대뜸 석궁을 수나 마구스에게 겨누었다. 교단 측 헤네티와 수행원들은 이미 거의 죽었고, 그를 지켜 줄 사람은 이미 두 발이나 되는 볼트에 맞아 함께 부상을 입은 주치의 니사뿐이었다. 이제 그들 둘은 분노한 ‘적’들에게 무방비로 드러나 있었다.

“마구스라는 족속들 면상이나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고 죽이지 뭐!”

놀란 니사가 비명을 지르며 수나 마구스를 얼른 몸으로 감쌌다. 하지만 이미 판단력과 자제력을 완전히 잃은 이 야수들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X 두 명이 달려들어 니사를 거칠게 차내고 수나 마구스의 얼굴 베일을 확 벗겨냈다.

“그 손 치워라. 명령이다.”

반대편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들이 잠시 멈칫거렸다. 바로 그들의 상관인 오르마즈 카파키 중장의 목소리였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군인’으로 돌아간 그들이 마지못해 한 발 물러났다. 오르마즈는 굳어진 다리를 질질 끌며 수나 마구스에게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오르마즈가 햇빛 아래 드러난 수나 마구스의 차가운 뺨을 살며시 짚었다. 그의 팔과 어깨에는 여전히 볼트가 박혀 있었고, 코메트 요원을 막으려다가 베인 목 옆의 깊은 상처에서 계속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가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반쯤 벗겨진 수나 마구스의 흰 베일 사이로 어느새 탁해진 까만 눈동자와 헝클어진 머리칼, 까무잡잡한 피부가 보였다. 같은 마구스들과 최측근, 식솔들 이외의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바로 그 마구스의 모습이었다.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중년의 중후함이 충분히 묻어나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오르마즈는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얼굴에 억지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얼굴을 다시 베일로 가려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위중하지는 않습니다.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피를 많이 흘린 수나 마구스는 조금씩 체온을 잃으면서 계속 떨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입고 있던 군복 자켓을 벗어 식어가는 그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 사이, 니사는 볼트에 맞아 쪼개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던 구급함을 급히 주워 돌아왔다. 오르마즈는 응급처치를 받는 이 마구스의 식어가는 몸을 꼭 안아주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수나 마구스가 분통한 듯 이를 꽉 악물었다.

“더 좋은 세상을 보고 싶었는데.......”

그 때, 또다시 조금 전 같은 소리가 울리며 수백 발의 볼트가 집 안으로 날아들었다. 놀란 니사가 다시 몸을 움츠렸지만 이번 공격은 첫 번째처럼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이미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진 시체들을 더더욱 참혹하게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할룩스로 어디에선가 연락을 받은 베흔이 이번에도 몸을 잔뜩 낮추고 오르마즈에게 다가와 말했다.

“X 1개 중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제 어떡할까요? 도대체 우리 적이 누굽니까?”

베흔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르마즈는 여전히 수나 마구스를 안은 채 말했다.

“평화회담을 반대하는 일부 세력과 코메트의 강경파 군부세력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일 테니 섣불리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마라.”

오르마즈가 헐떡이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베흔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정도로 충분이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번 사건, 아니 사실상 쿠데타로 직접 손에 피를 묻힌 건 표면적으로는 테번 델루지가 이끄는 교단 휘하 군부조직 코메트였지만, 문제는 오르마즈가 말한 ‘일부 세력’이었다. 온건성향 교단의 지도자격인 트라카 교단은 민병대의 강경파는 물론이고 일부 동료 교단과도 종종 대립하곤 했으니 그들이 누군지는 아직 섣불리 단정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 마구스를 어찌하실 겁니까? 인질로 데려가는 겁니까?”

“가까운 트라카 교단 신전병원에 모셔다 드려라. 지금 이분을 인질로 잡을 때가 아니다.”

순간 X들이 발끈했지만 베흔은 알았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남쪽에서 셔틀의 요란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쪽 창문으로 바깥을 급히 확인한 X 전사가 아군 셔틀이라며 수화를 보냈다. 그들의 등장에 이곳을 에워싸고 있던 적들도 급히 물러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들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회담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에르네스토를 죽이고 통수권자인 마구스를 공격해 치명상을 입혔다는 것만으로도 콜로니의 지금까지 정세와 코메트 부대의 지위를 완전히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다.

적이 물러난 것을 확인한 베흔이 살아남은 X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 이곳에서 퇴각한다! 아군 부상자와 시신을 모두 수습해 퇴각한다!”

오르마즈는 무수한 볼트와 유리파편으로 아수라장이 된 회담장,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무수한 주검들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의미 없는 전쟁을 피 없이 끝맺으려던 그의 주장은 저 부서진 유리벽처럼 이젠 돌이킬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오르마즈가 마치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기원 52년 초입에 북극 푸엘 숲에서 벌어진 이 참극은 이후 콜로니의 운명을 결정지을 역사적인 ‘성전의 해’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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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어 베타버전이 나왔군요;; 그런데 새 뷰어에는 추천버튼은 있는데 코멘트 기능이 없네요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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