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59화 (458/1,132)

< -- 459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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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으십니까?”

카렐의 부름으로 150층을 찾은 베아트릭스는 창가의 식탁에 홀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렐은 그에게 식탁 반대편, 제일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가리켰다. 베아트릭스가 다시 물었다.

“오늘은 차관급 신료들과 만찬이 있다 들었는데.......”

“취소했습니다.”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바로 앞 촛대에 불을 켰다. 베아트릭스는 긴 식탁 반대편에 앉으며 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손님을 접대하는 곳은 아니었고 황제가 비빈들을 모두 불러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종의 가족모임 장소였다. 그렇다보니 5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원형 탁자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식탁이 바뀌었군요.”

베아트릭스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역시 촛대에 불을 올렸다.

“자리가 너무 먼 것이 아닌지.......”

그는 시녀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받으며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어쩔 수가 없군요.”

카렐이 시녀들에게 모두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사실 몸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황빈에게까지 병을 옮겨서는 곤란할 것 같아서 이렇게 했습니다. 오늘밤 황빈과 함께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자야 할 것 같습니다.”

베아트릭스는 그제야 카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유난히 둔한 자신의 눈썰미를 탓하며 무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카렐은 냅킨으로 입을 가리고 잠시 찢어질 듯 기침을 했다.

“요즘 유행하는 독감인가요? 폐하께선 이런 잔병치레를 안 하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혹시 큰 문제가.......”

“아아, 그건 아니에요.”

카렐이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땀방울이 송송 맺힌 얼굴을 보아서는 절대 제대로 된 몸 상태가 아니었다. 베아트릭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걱정 마세요. 나흘쯤 전에 잠시 독감이 걸렸습니다만 간단한 처방 받고 반나절 정도 쉬었더니 바로 나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니 염려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정말 다행이군요. 솔도 그맘때 걸렸다가 바로 나았다고 하던데.......명색이 황제가 이 모양이니 정말 창피하군요.”

카렐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간 조각을 입에 넣었다.

“황후 폐하에게서 옮은 겁니까.”

카렐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식사만 계속했다. 베아트릭스의 입 안에서 아메스에 대한 갖은 욕지거리가 맴돌았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카렐이 그런 눈치를 챈 듯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독감은 그냥 공기로도 전염될 수 있는 병이니 누구에게서 옮았는지는 하늘이나 알겠지요. 그러니 누구 때문에 걸렸느니 하는 이야기는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베아트릭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카렐은 또다시 터진 기침으로 베아트릭스의 가슴을 까맣게 태워놓았다.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고.......”

보다못한 베아트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카렐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는 창백해진 카렐의 뺨에서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오늘밤 혼자 주무시면 정말 곤란할 것 같습니다.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불편하시면 옆에 따로 침대를 놓고 눕겠습니다.”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기조각을 입에 넣었다.

“어차피 하룻밤 자면 떨어질 텐데 괜히 황궁을 뒤엎을 필요는 없겠지요.”

카렐은 입맛이 없는 듯 채 절반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오늘은 멀찍이 다른 침대에서 자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종들이 놓아 준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베아트릭스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조금 떨어진 큰 침대에 누운 카렐은 벌써 몇 시간째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잠시 머뭇거리던 베아트릭스는 절대 다가오지 말라는 주의도 무시한 채 카렐에게 다시 다가갔다. 무심코 이마를 짚어 본 그는 사람의 체온인가 싶을 정도의 뜨거운 열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손을 떼었다.

“폐하, 폐하.”

내심 걱정이 된 베아트릭스가 카렐을 살살 흔들어 보았다. 그제야 가늘게 뜬 황제의 눈에서는 이번에도 파충류 특유의 붉은 시색소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광채에 놀라 자빠졌겠지만 최소한 지금만은 베아트릭스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카렐은 눈만 가늘게 떴을 뿐, 말조차 하지 못한 채 거친 호흡만 몰아쉬고 있었다.

“맙소사. 시의! 시의를 불러와! 당장!”

순간 베아트릭스가 내지른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150층 황제 침실을 쩌렁 울렸다.

한밤중에 들어온 황제의 와병 소식에 내명부와 내의원이 순간 발칵 뒤집어졌지만 의사의 진단은 시시할 만큼 간단했다.

“즉위 전 탈라스에서 입으신 기도화상으로 호흡기 점막이 아직 완전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같이 전염력 약한 독감에도 쉽게 감염되신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증세가 심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벼운 폐렴 증상이 보이지만 다행히 심하지 않으니 일단 이 정도 처치하고 내일 다시 정밀검사를 해 보아야겠습니다, 폐하. 내일 하루는 푹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몇 개의 주사기들을 정리하며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의 내의원 내과의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항생제 처치를 받은 카렐은 약기운 때문인지 옅게 잠들어 있었다.

몰려올라온 다른 측근들은 물론이었고 함께 있던 베아트릭스와 자다 말고 달려온 네페티, 솔이 십년감수한 듯 큰 숨을 내쉬었다.

“황태후 폐하라도 계셨다면 아주 황궁이 뒤집어졌겠군. 그런데.......황후전엔 연락 안 한 거야?”

우베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하던 시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베가 눈치 챈 듯 그의 귀에 대고 다시 속삭였다.

“그게........그분도 독감이 있으셔서........독감은 술로 씻어내야 한다고.......여기 수비군으로 와 있는 페로 가디언들하고 밤새 술을 드시고 오늘은 그쪽 병영에서 주무신다고 합니다. 연락은 드렸지만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완전히 인사불성이시라......”

“뭐어?”

시로가 기가 막힌 듯 입을 쩍 벌렸다.

“지금 자기가 무슨 위치에 있는지는 아는 거야?”

시로가 주먹을 쥐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조용히 해.”

옆에서 귀엣말을 다 듣고 있던 제네르가 그 둘을 꼬집으며 대뜸 한 마디 꺼냈다. 당황한 시로와 우베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제네르는 침대맡에 있는 3명의 비빈들 눈치를 보며 우베, 시로를 데리고 황제 처소를 비워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후, 네페티가 베아트릭스와 솔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 황상의 곁을 계속 지켜야 할 것 같군. 셋 다 곁에 있으면 도리어 수침하기에 번거로워 하실 테니 한 명만 남고 자리를 비우는 게 좋겠네. 베아트릭스 자네는 내일 병영에 돌아가야 하는데, 오늘 계속 상의 곁을 지킬 수 있겠는가?”

네페티의 물음에 베아트릭스가 정색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제가 계속 있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자네가 수고해주게나. 내일은 솔이 곁을 지키는 것이 좋겠군. 나는 아직 독감이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다음날 모시도록 하겠네. 황후께선 지금 같이 독감을 앓고 계시니 한동안은 상의 곁에 머물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건 내 직접 황후께 말씀드릴 테니 자네들은 맡은 대로 자리를 지켜 주게나.”

네페티는 마치 황후가 된 듯 차분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 둘에게 말했다. 잠시 눈짓을 주고받던 베아트릭스와 솔 역시 그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혹 아메스라면 이렇게 침착한 모습은 보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제네르와 함께 카렐의 침실을 나선 시로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메스.......아니 황후 폐하한테서 옮은 걸까요?”

“알 게 뭐야. 알 필요도 없고.”

제네르가 시무룩한 얼굴로 앞장섰다.

그때, 사색이 다 된 페로가 허둥지둥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성벽에 있다가 달려온 듯 갑주 차림 그대로였다. 그는 이들에게 형식적으로 아는 척만 해 보이고는 카렐의 처소로 급히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제네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저 양반이 황후위가 되었다면 더 어울렸을 거야. 아니면 네페티 부인이나. 황후위는 결혼경험이 없어야 한다는 규정도 언젠가는 뜯어고쳐야 하겠어.”

“이왕 결정되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폐하께서 살아계신데 설마 새 황후를 맞는 일이야 생기겠어요?”

시로의 말에 제네르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제네르의 모습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우베가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시죠?”

“리에드 공주도 바로 저 독감에 걸렸다가 죽었어. 어쩌면.......이번 독감에 공식적인 첫 사망자로 기록될지도 몰라. 그것도 폐하와 같은 발현자였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고. 듣자하니 지금 사오시안트에 인질로 잡혀 있는 건연 대군도 독감에 걸렸다던데 증세가 심각한 모양이야. 폐렴 증세가 있어서 대공주께서 직접 가셨다는 거 보니까.”

“건연 대군이면.......레곤 대공주의 넷째 대군 말입니까?”

“응. 리쿠 학장의 여동생이지.”

제네르가 시무룩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사오시안트에도 같은 독감이 번지기 시작한 모양이야. 이상하지. 별로 심하지 않은 독감인데 왜 황족에게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조만간 리에드 공주 부검 결과가 나올 거야. 글쎄,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보건국에서 자꾸 결과발표를 미루고 있는 걸 봐선 무언가 이상한 것 같아.”

“보건국에서요?”

시로의 물음에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하면 귀띔이라도 해 줄 텐데 무슨 이유인지 잔뜩 얼어붙어있는 기색이 역력하더라고. 결과를 놓고 아직 자기들끼리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더군.”

“그래도 리쿠 학장이 멀리 탈라스에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군요. 정말로 황족에게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면.......”

우베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글쎄, 그게 다행일까. 혹시 알아. 도리어 딴생각을 할지.”

제네르는 코리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옛 원한이야 어쨌든, 이제 동맹군에 협조하는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데는 그 역시 동감이었다.

황궁이 카렐의 병으로 발칵 뒤집어졌을 그 시간, 코리온은 측근 하심, 그리고 마자리크 부인과 함께 탈라스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리고 막판에 합류한 ‘불청객’ 자이납, 네피도 함께였다. 그는 한때 자신이 샤드니의 손에 감금되기도 했던 익숙한 키타이 기지를 빙 둘러보았다.

이곳에 돌아온 그의 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서부가 아닌, 남부 군인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도착한 이그나토 가 중장보병 1만과 경보병 5천, 중장기병 5천 역시 수송선에서 내려서며 이 황량한 사막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연합군에서 탈퇴하고 황제령에서 퇴각한 마자리크 휘하 이그나토 가 병력 중 일부는 ‘온통 적에 둘러싸이게 된’ 영지 수비를 위해 고향인 일리안으로 귀환했고, 나머지 병력들이 마자리크와 함께 이곳에 와 있었다. 이들은 동맹군을 위해 싸우는 첫 번째 남부 군대였다.

그때, 어디서인가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웬 거구의 무장을 선두로 10기 정도의 기병들이 막 도착한 코리온을 향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큰 체격에 어울리지 않을 날쌘 몸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동부 7제후이며 이곳 탈라스의 주인인 카이두 바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딸이며 가문 적장자인 탈란입니다.”

코리온 역시 그의 소개에 바로 대답을 해 주었다.

“파예드 아카데미 학장이며 리 리쿠의 7대손이며 세나우스 2세 폐하와 데오도스 호지 사이에서 난 제6태자 레곤과 예르마크 세닉 사이에서 난 대군 코리온 세닉 리쿠일세.”

어딘지 복잡한 코리온의 소개에 카이두가 헛갈리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탈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대군 마마, 그간 학계에서 떨쳐 오신 놀라운 명성은 많이 들어왔사옵니다.”

코리온의 얼굴을 잠시 올려보았던 탈란이 대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코리온은 그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애마 조황비전을 끌고 중앙의 사령실이 있는 탑을 향해 무표정하게 걸었다.

“어럽쇼, 눈이 번들번들하네요.”

고개를 들던 탈란은 자기에게 혀를 내밀며 대놓고 놀리고 있는 자이납의 모습에 순간 발끈했다.

“이놈이.......”

탈란이 무어라 신경질을 내려 했지만 이 반쪽가디언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재빨리 표정을 거두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코리온의 뒤에 따라붙었다. 코리온의 등 뒤에 대고 잠시 코를 킁킁거린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이동의자에 앉아 있는 네피에게 놀리듯 말을 건넸다.

“히야아~ 이런 감미로운 남자의 향기를 몇 달이나 계속 맡을 수 있다니~ 좋아 쓰러질 것 같아요오~”

“몇 달이 될지 며칠이 될지 누가 알아.”

네피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하심이 자이납에게 대번 눈을 흘기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의 이런 신경전이 오가는 와중에도 코리온은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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