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62화 (461/1,132)

< -- 462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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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미르가 새 단일 지도자가 되면서 오르마즈가 선임자인 강경파 쉐너 중장을 제치고 대장에 올랐다는 소식에 강경파들이 일제히 격분했지만, 그들은 채 반발할 시간여유조차 가지지 못했다. 민병대의 지휘권을 움켜쥔 오르마즈는 그동안 조용히 감추고 있던 정보사령부 예하 X여단을 즉시 출동시켜 그동안 공방전을 계속해왔던 북극지역에 대한 총 공세를 개시했다.

월등한 장비, 2배에 가까운 압도적인 병력을 지닌 코메트였지만 그들도 이번만은 민병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간 X들을 상대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헤네티의 정예요원들 중 상당수가 수나 마구스에 대한 지난 공격에 격분해 궁지에 몰린 코메트들을 외면해 버렸다. 물론 트라카 교단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전처럼 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광신도 헤네티들은 교단으로서도 다루기 쉬운 존재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졸지에 ‘주인을 문 미친 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코메트 부대의 장병들 스스로도 이후 자신들의 거취 문제를 조금씩 걱정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교단에서 자금지원을 끊어 월급과 연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바로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개시한 1달간의 치열한 혈전 끝에, 코메트 부대는 결국 북극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그들은 ‘지난번 공격은 민병대 강경파들이 정보를 흘려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며 공개성명까지 발표해 심리전을 노렸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그렇다면 너희들이 속았군.’이라는 한 마디로 그들의 주장을 일축해버렸다.

오르마즈 역시도 비슷한 의혹을 품고는 있었지만 일단은 묻어둔 채 넘어가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된 강경파들은 도리어 그렇지 못했다.

민병대 정규군 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강경파 수장 쉐너 중장도 평소의 강경파답지 않게 처음에는 X여단의 이 무모해 보이는 공격을 반대했지만, 전황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기울고, 적들이 자신을 배신자로까지 지목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사령관 오르마즈가 북극의 전투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사이, 명령도 없이 자신의 강경파 민병대들을 동원해 그동안 은거해 있던 판지셰르를 벗어나 전군에 남진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코메트는 배신자로 지목당한 쉐너 중장의 과민반응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제수스 자이센 중장이 이끄는 2만의 코메트 기동군단은 이후 ‘1번 도시’가 될 아케메니아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남진하던 민병대 4만의 허리를 기다렸다는 듯 끊어 두 토막을 내 버렸다.

그리고 마누엘 델루지의 정규 1군단은 남쪽에 고립된 2만의 민병대를 몰아쳐서 처참하게 학살했고, 흥안령 산자락에 완전히 고립된 나머지 2만의 민병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을 개시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수비가 약화된 민병대 본부 판지셰르 계곡에 대대적인 역습을 시작했다.

기세등등해진 코메트는 이 대승으로 대번 전세의 역전이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패전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오르마즈는 이번만은 철저하게 냉혹했다.

그는 2만이나 되는 전사들의 떼죽음에도 눈썹 하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측근들이 고립된 2만부터 일단 구하고 최대한 방어에 치중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2만을 숲 속에 풀었으니 어차피 그걸 다 잡으려면 1년은 걸릴 거야.’라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대한 기습 공격을 명했다.

바로 교단의 두 번째 심장부인 남극 대성당이었다.

오르마즈가 직접 지휘한 남극성당에 대한 기습 상륙전은 개전 이래 최대의 격전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야푸르 대신관 암살을 위해 이곳에 들어와 본 일이 있었던 오르마즈와 베흔은 그 누구보다 이곳의 구조와 방어체계에 익숙했다.

상륙 전날 밤, 소수의 정예X들을 이끌고 잠입한 베흔은 이곳에 급파되어 있던 코메트 기동군단 사령관 제수스 자이센 중장과 지휘부를 사살, 생포해 적의 ‘머리’를 애당초 잘라내 버렸다.

그리고 당황하고 있는 코메트 수비군의 앞에 오르마즈가 3천의 X들을 이끌고 해안선에 직접 모습을 나타냈다. 평소 이곳에 주둔하던 3만의 코메트 정규군단 중 2만 가까운 병력이 판지셰르 역습을 위해 떠나있는 상황이었다.

기원 52년, 성전 초반기의 공방전은 말 그대로 역습에 재역습이 반복되는 치열한 혈전이었다.

오르마즈의 지휘를 받아 기습 상륙한 3천의 X들 중 4백은 무수하게 쏟아지는 집중 사격 속에서 적 앞에 닿아보지도 못한 채 목숨을 잃었지만 일단 적과 마주한 이후로는 일방적인 학살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오르마즈는 3백의 별동대를 직접 이끌고 핵심시설인 ‘아프라시아 관’과 신전을 급습해 그곳에 있던 6백여명의 성직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버렸다.

남극의 그 격전에서 민병대가 보유한 X의 4분의 1에 달하는 7백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 결과는 확실했다. 수비군이던 코메트부대 5천명이 전사했고, 포로만도 7천에 달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한 오르마즈는 생포한 6백여명의 성직자들을 손수 분류했다. 그가 성직자들을 분류한 기준은 철저하게 자의적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잡힌 성직자들 중 다하카르 교단 외의 다른 교단 소속 성직자들은 모두 석방했고, 다하카르 교단 성직자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로 석방했다.

그렇게 그가 골라 낸 50여명은 한때 자신들이 종교재판을 벌였던 해안가 처형장에서 모조리 목이 잘렸다.

나중에야 알려졌지만, 오르마즈가 목을 친 50여명 중 11명은 지금껏 대신관의 후계권을 놓고 내분을 벌여 온 선임 대신관 야푸르의 자녀들이었다. 대신관의 자녀들은 그간 남극성당 내의 대신관 하렘에 함께 머무르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 잡히지 않은 나머지 5명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오르마즈는 그렇게 남극성당을 장악했지만 그곳에 오래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마누엘 델루지가 이끄는 코메트 토벌군이 지도자 샤미르가 있는 판지셰르 계곡에 이미 육박해 있었다.

남극성당을 베흔에게 맡겨두고 1천여의 X들과 함께 화급히 판지셰르로 돌아온 오르마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녁이 된 지금, 계곡 남쪽에 자리 잡고 있던 민병대 보루들은 거의 무너져 있었고, 지휘부는 슈엘러 쉐너 중장의 명령을 받아 계곡 안쪽 바위산으로 모두 퇴각한 이후였다.

X여단을 데려온 이상, 반격을 통해 다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듯도 보였지만 문제는 샤미르였다.

“누가 멋대로 퇴각하라 하였는가! 내 명령도 없이!”

오르마즈가 쉐너 중장의 멱살을 움켜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도자 전하는 어떻게 하고 너희 멋대로 물러났냐는 말이야!”

“어디 계신지나 알아야 구해서 물러나지요.”

쉐너 중장이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대장님 혼자 꽁꽁 숨겨두고 계시니 그런 양반이 있기나 한 건지 알기나 하겠습니까?”

“이 새끼가!”

순간 발끈한 오르마즈는 그를 바닥에 힘껏 동댕이치며 씩씩거렸다. 그도 이 비열한 자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에르네스토의 부인들 중 둘째 부인과 넷째 부인이 살아있었지만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하나같이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들뿐이었다. 그나마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이 넷째 베다이티 사예브가 낳은 14번째 아들 마시야스였다.

베다이티와 결탁한 쉐너 중장은 지금까지도 ‘섭정을 할 어머니가 있는’ 마시야스가 새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이자는 이번에도 샤미르를 구할 생각도 않은 채 멋대로 지휘부를 이끌고 물러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그의 명령대로 지도자를 버려둔 채 물러난 장교들이었다.

“사령관인 내 명령도 없이 두 번이나 멋대로 군대를 이동시켰으니 내 권한으로 네 보직을 정지시키겠다! 솔로스 중장!”

오르마즈의 초강경 조치에 장교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쉐너 중장은 강경파의 수장이었고 민병대 설립 당시부터 종군해 온 터줏대감이었다.

오르마즈는 군수지원사령관 케레사스 솔로스 중장을 돌아보았다. 말 그대로 ‘전형적인 군인’인 이 남자는 강경파와도, 온건파와도 친하지 않은 비사교적이고 과묵한 장교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쉐너 장군이 지도자를 버려두고 물러나려 한다며 오르마즈에게 제일 먼저 알려준 당사자였다.

“이제부터 장군이 야전사령부를 임시로 맡도록 하시오! 구체적인 인사 조치는 지도자 전하께서 하실 것이니!”

“대장님께선.......”

솔로스 중장이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난 지도자 전하 곁에 있을 테니.”

오르마즈가 손에 익은 칼과 석궁을 손수 챙기며 말했다.

“내가 데려온 X들과 함께 최대한 빨리 전열을 정비하도록. 야간공격은 우리 쪽에 불리하니 내일 새벽에 날이 밝는 대로 반격을 개시한다. 17번 ‘검은 바위’ 계곡을 최우선을 탈환하도록 하게. 내 그곳의 동굴에서 밤새 지도자 전하와 함께 있겠다.”

오르마즈는 5명 정도의 믿음직한 X들에게 따라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오르마즈는 행여 발자국이 남을까 굳어진 현무암을 골라 밟으며 화급히 샤미르의 동굴로 향했다. 군데군데 적 정찰병들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지만 그들이 샤미르의 동굴까지 찾아냈는지는 미지수였다. 이런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그에게도, 심지어 함께 가는 X들에게도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같은 시간, 남쪽에서는 4만에 달하는 코메트와 퇴각한 민병대 사이에 간헐적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은 적들의 주 공격로에서는 조금 벗어난 위치였다. 게다가 군데군데 굳지 않은 화산재가 널려있었고, 풍화되지 않은 현무암이 뒹구는 거친 지면 때문에 진격하기에도 상당히 안 좋은 지형이었다.

“휴우, 그 양반이 위치 하나는 귀신같이 잡아놓으셨군.”

잡초 속에 숨겨진 샤미르의 동굴을 발견한 오르마즈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에르네스토가 아들의 처소를 워낙 은밀한 곳에 두었다보니 이곳을 지나간 적들 역시 찾아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사령관님?”

평소 동굴 앞을 지키던 3명의 전사들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들 역시 오르마즈의 모습에 구세주라도 만난 듯 일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도자 전하를 모시고 돌아가는 겁니까?”

전사 중 한 명이 당연하다는 듯 물었지만 오르마즈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일 아침이면 본대가 이곳을 탈환할 테니 그때까지 이곳에서 지도자 전하를 지킨다.”

“여, 여기서 말입니까?”

샤미르가 ‘움직일 수 없는’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전사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오르마즈는 함께 온 5명의 X들에게 골짜기 능선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X들은 저곳에 몸을 숨기고 적 정찰병들의 출입을 감시하도록 해라. 너희 전사들은 동굴 안쪽 첫 번째 철문 앞을 지키도록 해. 난 지도자 전하의 곁을 지키겠다. 가능한 적과 조우를 피하고 행여 적이 이 동굴을 발견한 경우에만 내게 알리도록 해라.”

지시를 마친 오르마즈는 동굴 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이전처럼 유리벽 너머에서 샤미르가 걱정에 찬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사히 있는 그의 모습에 오르마즈가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샤미르는 그동안 걱정이 많았는지, 오르마즈를 보자마자 목소리부터 높였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전황이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밖에서는 왜 이상한 고함소리가.......”

오르마즈에게 막 따지려던 샤미르는 그의 얼굴과 손, 옷에까지 흥건하게 남아있는 검붉은 피얼룩에 잠시 멈칫거렸다.

“다친.......거야?”

“아닙니다. 적의 피입니다.”

오르마즈는 남극에서 입은 몸 군데군데의 상처를 옷자락 속에 감추며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오르마즈는 한 손으로 칼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민병대가 이곳에 다시 진주할 것이니 심려 마시옵소서. 그때까지 소인이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그럼.......지금 이곳이 적의 수중에 있다는 말인가.......”

샤미르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적군이 진주하지는 않았으니 적의 수중까지는 아니옵니다.”

오르마즈가 애써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소인이 지켜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

오르마즈는 칼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출입문을 향해 책상다리로 돌아앉았다. 샤미르는 유리 너머 보이는 오르마즈의 등과 목의 칼라 사이로 드러난 얼룩진 붕대를 똑똑히 볼 수 있었지만 그 이상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애타는 시선 속에서, 오르마즈는 할룩스를 한쪽 귀에 꽂고 한 손에 석궁을 단단히 쥔 채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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