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63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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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간 정도가 흘렀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야전사령부를 맡은 솔로스 장군의 보고만이 가끔 들어올 뿐 이곳 주변을 감시하는 X나 전사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어젯밤을 남극 상륙 준비로 꼬박 샌 데다가 낮 내내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오르마즈는 이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 몇 번이나 깜박 졸음에 빠지곤 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또다시 졸고 있던 오르마즈의 등 뒤로 누군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순간 접근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오르마즈가 고개를 번쩍 들여 석궁을 휙 겨누었다. 깜짝 놀란 여자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물컵을 쏟을 뻔했다.
“앞으로는 다가올 땐 미리 말하도록 해.”
잠시 당황했던 오르마즈는 석궁을 다시 내려놓으며 평소 샤미르를 시중들던 여자가 내미는 시원한 물을 받아들었다. 여자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그냥.......피곤해 보이시길래.......”
오르마즈는 정신도 차릴 겸, 그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죽은 에르네스토는 ‘예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오르마즈가 보기에 이 여자는 미인이라기보다는 나이 든 사람이나 좋아할 ‘인상 좋은’ 얼굴이었다. 5척 3촌(159cm)이나 될까 싶은 자그만 키에 왜소한 몸은 아마도 보통 키의 샤미르를 고려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안 그래도 병약한 샤미르의 곁에 우람하고 떡 벌어진 여자가 있는 모습도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을 테니.
‘저맘때 젊은 남자들 취향은 전혀 고려를 안 하셨군.’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컵을 비웠다.
“아직 제 이름을 한 번도 안 물으셨죠?”
여자가 먼저 말을 건네오자 오르마즈는 그의 눈을 힐끔 돌아보았다. 사실 오르마즈가 이 여자와 일부러 거리를 유지한 건 사실이었다. 여자는 머리에 쓰고 있던 위생복 모자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유레트 나이킨이라고 해요. 뭐.......아실만큼 아시겠지만.......여기 오기 전까지는 사창가에 있었어요. 손님들하고 잠자리까지 한 일은 없지만 별의별 희롱에 추행까지 다 당하면서 웃음을 팔았으니 따지고 보면 별반 다를 것도 없었죠.”
“.......”
“신분 높고 몸 안 좋은 남자 부인이 되어서 아이만 낳아주면 가족들까지 다 먹여 살려 준다기에 얼씨구나 하고 술집생활 접었죠. 하지만 저분도 저한테 마음이 전혀 없으시고.......솔직히 저도 무덤덤해요. 어차피 언감생심 부인 되는 건 포기한 지 오래고 이젠 그냥 직업 하녀 정도로 생각하고 살지만 별 불만은 없어요. 최소한 사창가 생활보다는 나으니까요.”
유레트는 유리벽 안의 샤미르를 힐끔 돌아보았다. 오르마즈와 함께 밤을 새겠다며 눈을 뜨고 있던 샤미르도 그 약한 몸으로 버티기 힘들었는지 이젤에 기대 졸고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어깨 주물러 드릴게요. 별 재주는 없지만 주무르는 건 잘 해요. 뭐, 이것도 사창가에서 배운 재주긴 하지만요.”
유레트는 잔뜩 굳어진 오르마즈의 어깨와 등, 팔을 꾹꾹 눌려주며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이젠 동생들도 다 자라서 컸고 가족들도 살만해졌어요. 전쟁만 끝나면 저도 언젠가는 이 생활에서 풀려날 테고, 그때는 정말 평범하고 좋은 남자 만나 알콩달콩 살림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유레트가 입가 가득 선한 미소를 지었다. 무어라 대답하려던 오르마즈는 갑자기 할룩스로 들어온 보고에 잠시 멈칫거렸다.
“들어가 있으시오. 문 잠그는 거 잊지 말고.”
오르마즈가 석궁과 칼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레트는 벗어놓은 위생복을 허둥지둥 챙겨들며 동굴 안쪽 자신의 허름한 숙소로 몸을 피했다.
오르마즈가 무기를 챙겨들고 급히 나갔을 때, 동굴 앞에서는 주변을 경계하던 X들이 코메트 병사들의 시체를 급히 치우고 있었다.
“적 정찰조 같았습니다. 동굴에 진입하려 해서 어쩔 수 없이 사살했습니다. 본대에 연락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르마즈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겨울이라 해가 뜨려면 아직 1,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늘 밤을 조용히 넘기려던 오르마즈의 계획은 완전히 글러버리고 말았다.
“보고를 했든 안했든 정찰조와 연락이 끊어졌으니 누군가 또 확인하러 오겠지.”
오르마즈는 석궁을 다시 확인하고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는 할룩스를 작동시켜 솔로스 장군을 불러냈다.
“이곳에 X 1개 중대와 정규군 1개 대대를 당장 보내라. 일출이 가까워오니 지금 출발하면 해뜰 무렵이면 도착하겠지.”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온 오르마즈는 초조한 듯 계속 시계만 보았다. 해가 뜰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이곳을 버티면 모두 끝이었다. 그새 잠이 깬 샤미르 역시 서성거리는 그의 모습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이 흘렀다.
“적들이 왜 안 오지?”
오르마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이 적들에게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적들이 실종 지점을 전혀 잘못 잡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계곡 입구를 지키는 X들에게도 아직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계곡으로 진입하는 적 병력이 있다면 그 누구보다 빨리 잡아낼 X들이었다.
멍하니 자리에 서 있던 오르마즈는 무언가 생각난 듯 위를 올려보았다.
“혹시.......계곡 입구가 아니라 반대편 능선 쪽에서 접근한다면.......”
그의 머리 위로 난 수직굴은 사람들이 거의 출입하지 않는 계곡 능선을 향해 뚫려있었다. 구멍을 덮은 창 너머 새벽하늘의 별이 그대로 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위를 스치는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까지도.
“이런!”
고막을 찢는 굉음이 울리며 머리 위, 유리창이 조각조각 깨지며 실내에 흩날렸다. 마치 에르네스토가 죽었을 때처럼, 이 작은 동굴 안은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유리 파편과 오르마즈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리프트를 건 코메트 요원 몇 명이 이 아수라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강하해 내려왔다.
“어딜!”
오르마즈는 유리조각들로 온통 시야가 흐려진 그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석궁을 겨누었다. 적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전히 직감으로, 그는 적이 강하할 곳을 향해 무조건 방아쇠를 당겼다. 틱 하는 짧은 소리가 울렸을 뿐, 이 자그만 암살수용 석궁은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무광 처리된 짤막한 볼트가 유리조각들 사이를 꿰뚫고 날아갔다.
“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어디를 맞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상대 역시 이쪽의 위치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리고 동굴 안의 이질적인 유리벽, 그리고 그 안의 낯선 청년에 잠시 시선이 쏠린 그들을 향해 또 한 발의 볼트가 날아들었다.
“아악! 아아악!”
눈에 볼트를 명중당한 한 명이 피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쥐며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적은 이제 3명 남아있었다.
‘수색대?’
적들의 정체를 파악한 오르마즈는 서류더미 반대편에 재빨리 몸을 감추었다.
“뭡니까!”
바로 그때, 바깥쪽 철문을 지키던 3명의 전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안쪽으로 달려들어왔다. 하지만 그 중 첫 번째로 뛰어든 전사는 문을 열자마자 2발의 볼트에 얼굴과 가슴이 꿰뚫리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악!”
그리고 미처 몸을 피할 새가 없었던 두 번째 전사 역시 목을 관통당하며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적의 재빠르고 정확한 사격을 보아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요원이 틀림없었다.
“걸렸다!”
오르마즈는 적들이 문 쪽에 정신이 팔린 새, 왼손에 짤막한 와키자시를 뽑아들고 바로 달려 나갔다. 죽은 전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 덕분에 오르마즈가 적에게 접근할 짧은 순간을 번 셈이었다. 이런 적들과 사격전을 계속 끄는 것은 오르마즈 쪽에 도리어 불리했다.
“뒤!”
놀란 적병이 뒤돌아서며 얼떨결에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상대의 반응을 이미 예측하고 있던 오르마즈는 막 격발되던 그의 석궁을 왼손의 와키자시로 힘껏 올려 쳐 박살을 내 버렸다. 그 사이, 문 뒤에 급히 숨었던 마지막 민병대 전사가 볼트를 쏘아 적병 한 명을 쓰러뜨렸지만 동시에 그의 이마에도 적병이 날린 볼트가 딱 소리와 함께 정확히 명중했다.
“잘못 들어왔구나!”
오르마즈는 석궁을 잃은 적병의 얼굴을 칼자루로 힘껏 내리찍었다. 동시에 뒤로 휙 뒤돌아서며 나머지 한 명의 가슴부터 얼굴까지를 대각선으로 그대로 갈라냈다. 번쩍이는 궤적이 공중을 한 바퀴 돌면서 피보라가 공중으로 솟았다.
“헉, 헉.”
오르마즈가 칼을 쥔 채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문 부근에는 아군 전사의 시체 세 구, 그리고 그의 발밑에도 적 수색대 병사 5명이 쓰러져 있었다. 적들 중 방금 칼에 베인 1명, 그리고 볼트에 명중당한 3명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항복, 항복합니다.”
칼자루에 맞아 쓰러졌던 적병이 칼을 버리며 두 손을 벌려보였다. 그도 군인이라면 고급 장교복을 입은 눈앞의 이 키 큰 여자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 챘을 터였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목숨을 비는 그에게 무표정하게 다가섰다.
“네가 내 부하라도.”
유리벽 안의 샤미르를 잠시 돌아보았던 오르마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에 샤미르는 두 손을 벌벌 떨며 멍하니 서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으로 확인한 첫 번째 ‘죽음’일 터였다.
오르마즈는 쓰러진 적병을 향해 짧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살려줄 수가 없군.”
오르마즈의 칼끝은 잠시의 머뭇거림조차 없이 그의 목을 향해 내리꽂혔다. 적병은 손을 모으고 마지막으로 목숨을 빌어보려 했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그의 목구멍을 찢어낸 예리한 칼날은 옆으로 홱 비틀리며 엄청난 피를 바닥에 쏟아놓았다.
X들을 선두로 한 4백여 민병대가 ‘검은 바위 계곡’에 재진주한 건 민병대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었을 이 작은 기습사건이 있고 15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자네 아직까지 살아있었던가. 이게 몇 년 만이지?”
오르마즈는 민병대 전사들 사이에 흔히 통용되는 이 인사말로 막 도착한 77대대를 반겼다. 대대장 바스토프 베멜러 중령은 민병대 사령관인 오르마즈가 10명이 채 안 되는 전사들과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발밑에는 5구의 적병 시체와 3구의 아군 전사 시체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남쪽 계곡에서 적병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어젯밤은 정말로 지옥 같았습니다.”
베멜러 중령이 온통 더러워진 모자를 털어내며 가리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새로 도착한 전사들과 X들이 죽은 전사들을 대신해 지도자가 머무는 이 동굴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한숨 돌렸으니 잠깐이라도 좀 자야겠어.”
오르마즈는 평소보다 더 움푹 들어간 눈을 비비며 힘없이 동굴 안으로 걸었다. 유레트가 유리 파편과 핏자국만 대강 걷어낸 굴 안에서는 샤미르가 여전히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맞아주고 있었다.
“이제 안전하옵니다. 지도자 전하.”
오르마즈가 유리벽 앞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소인 이제 이곳에서 임무가 끝났으니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겠습니다.”
“좀 씻고 잠이라도 좀 자지 그러나. 얼굴이 말이 아닌데.......”
샤미르가 유리벽을 짚으며 애타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가서 잠시 잘 것이옵니다. 물이 부족하니 씻는 건 이미 한 달 전에 포기했고요. 제 꼴을 보십시오.”
“자, 잠깐.”
“예?”
“뻔뻔한 말인지 모르지만.......여기.......”
자신의 욕실을 잠시 돌아보았던 샤미르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르마즈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바로 눈치챘지만 짐짓 모르는 척 크게 하품을 했다.
“그, 그래, 자네 처소가 편하겠지. 푹 자고 오게나.”
뒤돌아서서 동굴을 나서던 오르마즈는 유리벽 안에 다시 홀로 남은 샤미르가 이를 악문 채 흐느끼는 소리를 작게나마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보고픈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동굴 입구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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