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64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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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은 150층 밖으로 외출하지 않은 것만 빼면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는 필터가 달린 마스크를 쓴 채 불덩이같이 달아오른 몸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일상적인 보고서들을 모두 살폈고, 필요한 것은 손수 결재를 해서 내각에 넘겼다.
하지만 그가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비서실장인 우베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침에는 딸의 병 소식에 놀란 세네피스 황태후가 남극성당의 집무실에서 혼절했다는 소식도 들어오기는 했지만 카렐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어머님께서 이곳에 오신다고 하셨나?’라고 짧게 물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 대답은 들으나 마나였지만.
“폐하, 신성에 주둔중인 조페 대장이 보낸 보고서입니다. 그런데 조금......”
카렐은 붉게 충혈된 눈을 애써 치켜뜨며 우베를 돌아보았다.
“조금.......뭐?”
마지막 보고서를 받아든 카렐은 머리가 어질어질한지 자리에서 잠시 휘청거렸다.
“폐하, 이것만 보시고 잠시 쉬셔야겠습니다.”
카렐은 우베의 참견을 들은 척 만 척 보고서를 먼저 펼쳐보았다. 보고서에는 몇 글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과, 감방에 갇혀 있는 한 자그만 여자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니사 라말라.......”
“지난번 제게 조사를 명하셨던 그 여자가 맞습니까?”
“그래. 어떻게 된 거냐. 이 여자가 어떻게.......”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서류를 떨어뜨렸다. 라마단 기간, 코리온과 함께 남부에서 쫓기던 중에 ‘우연히’ 도움을 받은 이후, 이 여자에 대한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떠난 일이 없었다.
우베가 메모를 보여주며 말했다.
“조금 전에 갑자기 신성에 찾아와서 폐하께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처음에는 기가 막혀서 그냥 쫓아내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의학 학위증까지 여러 개 가진데다가 신분 검색도 안 되고, 게다가 사교 성직자 표시까지 지니고 있어서 그냥 미친놈으로 무시하기는 꺼림칙했던 모양입니다. 4번 도시로 해서 육로로 신성까지 온 모양이던데 그곳 이후로는 아시다시피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보급품 수송선편에 이곳으로 호송되어 있습니다. 어떡할까요?”
카렐이 침을 힘겹게 삼키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감방에 가둘 사람이 아니니 이리로 데리고 올라오도록 해.......30분 후면 어차피 회의시간이니 내 직접 만나봐야겠다.”
황도로 끌려온 니사는 어찌보면 과할 만큼의 지독한 몸 검사를 당해야 했다. 보안국 요원들은 소지품은 물론이고 그의 옷까지 모두 벗기고 행여 다른 물건이 있지 않은지를 꼼꼼히 검사했고, 내의원의 의사들은 행여 잔병이라도 없는지, 몸속에 감춘 특별한 장치라도 없는지 별의별 검사를 다 한 이후에야 그에게 ‘깨끗하다’는 판정을 내려 주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군.”
보안국에서 내준 허름한 원피스로 갈아입으며 니사가 낮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따라오시오.”
보안국장 루토가 그에게 손짓을 보냈다.
니사는 황궁의 전경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이곳은 한때 자신들의 교단 총본부였던 아케메니안 궁이 있던 곳이었다. 이젠 그 건물도 없어지고 이렇게 초고층의 황궁이 자리잡기는 했지만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일부 시설들은 아직 지하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배 타고 들어올 때 보니 에아 신께서 머무시던 성전은 지하에 그대로 남아있더군요.”
니사가 앞서가는 루토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루토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니사를 이상하다는 듯 힐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교 성직자라면 이곳 지하의 시설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었다.
“지하감옥이나 카타콤베나, 여기 컴플렉스 지하에 깔린 옛 복도도 아직 있겠지요?”
“이곳 시설은 알려줄 수 없소.”
“어쩌면 이곳에 관해 제가 알고 있는 것 중에 국장님께서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
니사가 입가에 씽긋 미소를 품었다. 루토는 은근히 잘난체하는 이 괴상한 성직자를 돌아보며 대뜸 얼굴을 찡그렸다.
“이 궁 건립 당시에 이미 알 만큼은 모두 파악했소.”
“그러면 다행이고요.”
니사가 씽긋 웃는 모습에 루토가 다시 눈살을 찡그렸다.
“폐하, 루토이옵니다. 니사 라말라 박사를 데려왔습니다.”
니사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곧바로 열린 문 안쪽에서는 누군가의 힘겨운 기침 소리가 제일 먼저 들려왔다. 순간 니사가 양쪽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구면.......이로군, 라말라 박사.”
원래부터 그르렁거리는 카렐의 목소리는 잔뜩 쉰 탓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고개를 치켜든 니사는 천장에서 드리운 투명한 필름제 큐비클* 안쪽에 기우뚱하게 앉아있는 황제, 그리고 자그만 체구의 한 여인의 모습을 확인했다. 두 눈이 움푹 들어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황제는 언뜻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듯 보일 지경이었다.
“이 여자는 누구입니까, 폐하.”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10명 정도의 신료들이 이 낯선 손님을 의심어린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려던 카렐은 다시 터진 기침 때문에 잠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폐하, 말씀을 아끼심이 좋겠습니다. 제가 옮겨드릴 테니 종이에 써 주십시오.”
네페티가 카렐의 손을 짚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큐비클 바깥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세네피스 황태후는 이 별 것도 아닌 말에 느닷없이 이를 갈며 안쪽을 노려보았다.
니사는 저 안쪽에 있는 ‘황비’와 이 질투어린 황태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바로 눈치 챘다. 저 큐비클 안에 ‘황제와 함께 앉아있을 수 있는 권리’를 놓고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아직 괜찮습니다. 황비.”
카렐이 어머니의 험한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네페티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니사는 집무실에 흐르는 묘하게 차가운 기운을 일단 무시하며 자리에 공손하게 꿇어앉았다.
“트라카 교단 제5신관이며, 신경외과, 외과, 신경과, 내분비, 병리학 분야 의학박사인 니사 라말라, 지고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께 감히 인사드리옵니다.”
자리에 꿇어앉은 니사는 두 팔을 가슴 위에 X자로 모으고 허리를 굽혀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네 이년! 감히 어디서.......”
순간 발끈한 페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절이 조금 이상하지만.......”
페로의 과민반응에 놀란 제네르가 얼른 그를 막아서며 물었다. 하지만 페로는 바로 니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절은 저 사교도들이 자기네 상급자에게나 하는 절이 아니었던가!”
“그렇긴 합니다만 사교도가 사교도 식으로 절하는 게 뭐 어때서요. 제국은 ‘종교자유’가 보장되는 나라 아닙니까.”
제네르가 허허거리며 흥분한 페로에게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카렐의 허약해진 모습 때문인지, 페로도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교 신관에게서까지 지고하다는 말을 들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은걸, 안 그렇습니까, 자이센 총리.”
카렐이 해쓱해진 표정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격분한 페로를 달랬다. 그는 다시 니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학, 학.......지난번 자네와 만났던 이후 내 자넬 따로 찾아보려 하였으나........”
“소인 항상 신변에 위험을 느끼며 사는 신분인지라 누군가 찾는다는 소식에 지레 놀라 잠시 종적을 감추었사옵니다.”
“그런데 내 알아보았더니........”
말을 더 이으려던 카렐은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니사는 미리 짐작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예, 당시 민병대에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았사오나 이런저런 사연으로 구사일생하였사옵니다. 그 일에 관해서는 따로 말씀드리고 싶사옵니다.”
“그래.......그건 4백년 가까이 지난 일이니 뭐 나중에 따지도록 하지.”
말을 이으려던 카렐은 다시 가슴을 움켜쥐며 찢어질 듯 격심한 기침을 했다. 잠시 호흡조차 잇지 못하던 카렐은 겨우 숨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얼굴을 문득 올려본 니사는 그의 얼굴과 목 곳곳에 이미 붉은 발적이 희미하게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피부가 유난히 희어서인지 심하지 않은 발적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쨌든.......이렇게 자진해 찾아와 주어서 고맙네. 라말라 박사.”
카렐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게 찾아온 용건이 무엇인가?......헉, 헉.......내 지난번 일에 안 그래도 따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으나......”
“폐하께 부탁드리고픈 것이 있어서이옵니다.”
니사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탁?”
“소인 폐하의 곁에서 주치의가 되고 싶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니사의 뜬금없는 발언에 자리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렐 역시 놀란 듯 멍한 표정이었다. 물론 카렐이 몇 달 전 니사를 찾았던 것도 자신의 주치의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에서였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제 발로 찾아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터였다.
“사교도를 어떻게 믿고 폐하의 곁에 두겠는가! 아니, 사교도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수뇌부에 있는 자가 아닌가!”
제일 먼저 발끈한 건 아니나다를까 원리주의 유학자인 법무대신 두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네르가 웃으며 그를 달랬다.
“흥분하지 마세요, 법무대신. 어차피 제국 의사 중에 절반 이상이 사교도고, 그 중에 권위 있다고 손꼽히는 의사들은 모두 옛 성직자 출신들입니다. 내의원도 절반이 사교도고요. 사교 부설 전문 의학교는 그 권위에서 콜로니 아카데미가 감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죠.”
“모렌 박사처럼 사교도 아닌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렌 박사는 본래 유전학자지 임상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폐하의 곁에 그런 사교도를 두다니.......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오호, 지난 처형일에 리쿠 학장께서 내의원에 실려 오셨을 때 상태가 위중하니 사교도 의사를 데려오라고 소리를 치셨던 게 누구셨죠?”
“그건........”
“그만, 그만 해라.”
둘의 쓸데없는 설전에 카렐이 일침을 박았다. 궁지에 몰렸던 두겐은 휴우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카렐이 니사를 가까이 불러들여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내 자네가 옛 사교 교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네.......헉, 헉.......그런 자네가 몇백 년 만에 갑자기 황궁을 찾아와서는 교단 원수의 후손인 황제의 주치의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 그저 자네의 변덕 때문이라 생각하지는 않아. 지금 내 꼴을 보고도 내 주치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가.”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헐떡거렸다. 니사가 그런 카렐에게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하셨듯이, 소인 역시 그저 변덕으로 온 것은 아니옵니다.”
니사는 가져간 가방을 열고는 주먹만한 보석상자와 빛바랜 편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카렐의 큐비클 옆에 놓여있던 은쟁반에 그 두 가지를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함께 있던 카토가 재빨리 그 내용물을 확인했지만 별다른 것은 없는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냐.”
“상자를 열어보시옵소서.”
카토가 바친 은쟁반은 네페티의 손을 거쳐 카렐의 앞에 도착했다. 카렐은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그 작은 보석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이게.......무엇이더냐.......”
카렐이 집어든 건 파란빛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머리 셋 달린 용의 조각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의 작은 조각이었지만 그 섬세함은 말할 것도 없었고, 백금 테두리와 주변을 빙 둘러 박힌 12개의 미세한 보석들은 보통 정성이 들어간 물건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렐은 용의 눈동자에 박힌 작은 토파즈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돌아가신 오르마즈 경께서 젊은 시절 이마에 가지고 계셨던 다하카르 신의 상징물이옵니다. 그분께서 45세 되시던 해에 뽑아내기를 원하셔서 소인이 손수 뽑아드린 이후로 기념품삼아 계속 간직하고 있었사옵니다.”
‘오르마즈의 유품’이라는 말에 세네피스 황태후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페티 역시 그 조각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지만 곧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며 카렐의 손등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니사의 말대로, 그 조각의 안쪽에는 ‘간택자 오르마즈, 신의 이 특별하고도 위대한 선택과 영원히 함께하도다.’ 라는 글자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카렐은 그 조각이 신기한지 자신의 이마에 대고는 문득 거울을 돌아보았다.
“이거 생각 외로 잘 어울렸겠는걸.”
카렐이 수척해진 얼굴에 모처럼 미소를 지었다.
“이젠 폐하께서 간직하시옵소서.”
“자네에게 남긴 물건인 듯 한데.......”
카렐이 흐려진 눈동자에 잠시 힘을 주었다. 그는 오르마즈의 수술까지 했었다는 이 의사의 정체가 더더욱 궁금해졌지만 일단 그 문제는 이 자리에서 꺼내지 않기로 했다. 니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소인이 계속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소중히 간직해 주시면 소인 그만한 영광이 없겠사옵니다.”
“황상, 좀 보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네피스가 애가 타는 듯 카렐에게 말했다. 카토로부터 사파이어 조각을 건네받은 세네피스는 그것을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럼 이 편지는 무언가?”
“오르마즈 경께서 생전에 제게 남겨주신 편지이옵니다. 아니, 정확히는 폐하께 남기신 편지이옵니다.”
카렐은 이미 봉인이 뜯겨있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흐음........”
카렐의 눈길이 제일 먼저 멎은 건 그 내용이 아닌, 날짜였다. 기원 291년 9월 10일, 함께 적혀있는 사교 연호로 이마(Yima) 780년, 바로 하임달의 결전이 있기 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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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분만 보신 분께 약간의 혼동이 있을것 같아 설명일 덧붙입니다. ^^;; 니사는 출판본에서는 이미 1부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카렐(+코리온)과도 만난 일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대책이 서지 않아 그냥 나가기로 했습니다. (쿨럭)>
* 큐비클은 병원, 혹은 사무실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조립식 칸막이시설을 말합니다. 한쪽에서 잡아당겨 커튼처럼 여닫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