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65화 (464/1,132)

< -- 465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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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체가 왜........”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편지 본문은 짧았지만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글씨가 뒤죽박죽이었다. 글씨 중 일부는 공용어로, 일부는 고대어로, 일부는 바람어로까지 쓰여 있었지만 하나같이 선이 고르지 못하고 간격도 제멋대로인 것이 제대로 된 상태에서 쓴 것은 아닌 듯 싶었다.

“그분의 필체 같기는 한데 왜......”

“그분께선 돌아가시기 직전 정체불명의 병에 시달리셨습니다. 전투에 임하시기 전날 밤에도 수전증과 심한 근육통으로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하셨습니다. 소인 당시 군의관으로 카파키 가에 종군하며 마지막을 지켜드리려 하였으나, 그분께선 제게 그 편지와 함께 당시 푸엘 숲에 계시던 폐하를 지켜줄 것을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나를?”

카렐은 어느새 흐느끼기 시작한 어머니 세네피스 황태후, 그리고 편지를 힐끔 돌아보았다.

- 내 지금껏 많은 지도자를 내 품에서 보내고, 또한 지켜왔지만 정작 내가 가장 지켜야 할 존재는 버려둔 채로 떠날 운명인 것 같군.

내가 없더라도 자네가 나를 대신해 푸엘 숲의 그 아이를 지켜주게나. 그 아이가 나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네. 행여 내가 내일 살아남지 못한다 해도, 나의 영혼과 운명은 다시 그 아이에게 깃들 것이니 자네에게 나의 새로운 미래를 맡기겠네.

아이가 커서 나의 운명을 되밟아 가거든 내게 그랬듯 그 아이의 곁에 있어주게. 나와 똑같은 길을 밟지 않도록. -

291세 되는 해, (이마 780년) 9월 10일. 하임달의 병영에서.

평생의 벗 니사 라말라에게.

오르마즈.

카렐이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편지의 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도와 약도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문자가 다급하게 흘긴 필체로 쓰여 있었다.

카렐이 이미 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그분께서 내 존재를 알고 계셨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니사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셨습니다. 허나 당시 상황 때문에 폐하를 그곳에서 탈출시키지는 못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카렐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이 이상 묻는 건 그다지 현명치 않을 듯 보였다.

몇 분이 지난 후, 카렐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난 몸이 좋지 않아. 내 주치의가 되는 건.......헉, 헉, 어쩌면 목숨을 거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물론입니다. 병환으로 인해 행여 불상사가 생길 경우.......주치의도 책임을 지고 주살당해 능에 함께 순장됨을 알고 있습니다.”

니사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대신, 조건이 있사옵니다. 폐하.”

“조건?”

카렐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소인에게 두 명의 가디언과 4명의 경호병이 있었으면 하옵니다. 보시다시피, 소인은 의사일 뿐 스스로 몸을 지킬 능력은 없사옵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 헉, 헉, 황제 주치의라면 5품 내의원장에 황제의 측근이니.”

“그리고 소인의 지난 일과, 몸담고 있는 교단에 관한 것은 묻지 말아주시옵소서. 대신 소인 역시 주치의로서 폐하를 성심으로 보필하겠나이다.”

카렐은 잠시 머뭇거렸다. 안 그래도 이 여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지금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제안을 거부했다가 영원히 이 여자를 볼 수 없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 알았다.”

카렐에게 바로 고개를 숙여 보인 니사는 루토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이제 제 가방을 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쿠트라스에서 가져온 산더미같은 짐과 함께 143층 내의원으로 향하던 니사는 복도 옆, 테라스에 말없이 서 있던 한 여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훗.”

니사는 짐을 들고 있는 시종들에게 먼저 가라며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다지 곱지 않은, 거의 핀잔에 가까운 한 마디가 그에게 들려왔다.

“네년이 여기 왜 왔나. 오타네스.”

“그건 제가 더 묻고 싶습니다만, 스메르디스님.”

니사는 밀리타의 당장 잡아먹을 듯 사나운 시선을 살짝 무시하며 여전히 미소를 품고 있었다.

“사오시안트에서는 니딘투벨이 한건 올렸다죠?”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스메르디스님도 저 정도면 한건 올리신 겁니까? 다 죽어가시더군요.”

“넌 어차피 한발 늦었어.”

밀리타가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스메르디스님께서도 속이 편치만은 않으셨을 텐데요? 저분의 앓는 모습에 맘이 흐뭇하시던가요? 스메르디스님의 운명은 저분을 죽이는 게 아니라 저분 품에 안기는 쪽 아니었던가요? 그 운명은 어쩌다가 이라즈에게 내주시고 지금 이 꼴이 되셨죠?”

니사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밀리타가 잠시 움찔거렸다. 니사가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밀리타와 똑바로 마주섰다.

“‘그분’께서 이번 일에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퇴물 주제에 참견은.......”

밀리타가 다시 악담을 퍼부었다.

니사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음험한 미소와 함께 밀리타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시려면 깨끗하게 하셔야죠.”

“뭐?”

“저쪽 황비인 구르베스는 찾으셨습니까? 그 여자를 잡고, 저쪽 황제와 그 핏줄의 목숨을 끊지 않으면 일이 아직 마무리된 게 아닐 텐데요. 양쪽 황제와 그 후손까지 모조리 다 죽어야 그쪽 계획이 완성되는 것 아니던가요?”

니사가 히죽거리며 밀리타를 계속 몰아붙였다.

“그런데 어쩌죠? 베흔은 절대 도를 넘지는 않을 겁니다. 때때로 당신들 손에 놀아나는 못된 놈이지만 그분과 함께 지금까지 제국 황실을 수호해 온 건 그놈입니다. 구르베스를 잡아 그쪽 황제의 2세를 손아귀에 넣지 않는 이상은 그자는 자신의 지금 황제를 목숨 걸고 지킬 겁니다.”

밀리타가 순간 턱에 힘을 꽉 주었다. 니사가 눈을 쫑긋거리며 말을 건넸다.

“여기 한쪽만 죽을 바에는 양쪽 다 살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텐데요?”

“구르베스 그년은 곧 잡을 거다. 왜? 저놈을 살려달라고 내게 애원하는 거냐?”

“오호, 천만에요. 제가 애원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애원은 가진 것 없는 자가 하는 것이지요.”

니사가 다시 눈웃음을 보냈다. 그제야 그의 말뜻을 눈치 챈 밀리타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설마........그년을 네놈들이 데리고 있나?”

“치료약과 백신은 가지고 계시겠지요?”

니사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밀리타가 이를 갈며 대꾸했다.

“치료약 따위는 없다. 너 따위 배신자와 협상할 생각도 없고.”

“협상이요? 천만에요, 전 협상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그쪽에는 소질도 없고요. 그리고 백신과 치료약이 없다는 말을 제게 믿으라는 겁니까? 스메르디스님도 제 앞에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계신데. 설마 방화복도 안 입고 불구덩이에 뛰어드시지는 않았겠지요?”

밀리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니사가 그를 놀리듯 말을 이었다.

“저질러 놓은 일은 자진해서 책임을 지실 줄로 알겠습니다.”

“그래 봤자 어차피 저놈은 죽어. 그럴 운명이니까.”

밀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니사를 노려보았다.

“스메르디스님도 거역한 운명을 저분이라고 거역하시지 말라는 법은 없죠.”

니사가 밀리타를 휙 돌아보았다.

“아세요? 저분께서 돌아가신다면........저 역시 함께 죽습니다. 그건 법에 의해 정해진 운명이니까요. 이젠 저와 싸우실 건가요?”

“.......우리라고 방법이 없지 않아.”

밀리타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잠시 매서운 눈싸움을 벌이던 둘은 각자 반대방향으로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황태후 처소로 돌아온 세네피스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앓는 카렐의 곁을 밤새 지켜주고 싶었지만 ‘정밀검진을 받지 않으신 상태에서는 접근이 곤란하다’며 앞을 가로막는 내의원 의사들 때문에 결국 힘없이 돌아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밤 황제의 곁을 지킬 솔의 모습을 보며 그는 ‘황태후’로서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소로 돌아온 그는 카렐에게서 애원해 받아 온 그 벨벳 상자를 다시 열어보았다.

“오르 언니.......”

그는 파란빛 용의 형상이 새겨진 그 조각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며칠만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겠다며 받아오기는 했지만 마음만 같아서는 카렐의 이마에 이 조각을 박아주고픈 심정이었다.

그는 평소 품에 품고 다니던 카렐의 머리칼 묶음을 꺼내 그 내음을 한 번 들이키며 잠시나마 미소를 지었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그는 살아 숨쉬는 카렐의 체취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는 자신의 목에 여전히 걸려있는 작은 은제 목걸이를 살며시 꺼내보았다. 한때 카렐의 수정란을 숨겼던 이 목걸이는 그에게는 몸의 일부분이었다.

상자를 한쪽에 내려놓은 그는 자신의 짐 속에서 작은 악세사리 상자를 꺼냈다.

“그래.......한 쌍이군.”

세네피스가 상자 안에서 꺼내든 건 오르마즈의 것과 거의 똑같은, 파란색 다하카르의 조각이었다. 오르마즈와 마찬가지로 다하카르의 간택자였던 그가 남극성당에 입학하면서 이마에서 뽑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세네피스의 조각에는 주변을 빙 두른 백금 테두리에 보석이 박혀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간택자 세네피스, 오직 하나의 존재, 그리고 그의 분신만을 영원히 따를지니. -

세네피스는 2개의 조각을 나란히 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르마즈도, 카렐도, 공교롭게도 그는 이 둘 모두를 ‘가족’ 혹은 ‘혈육’으로서 받아들일 시간을 가지지 못했었다. 130년의 끔찍한 기다림 후 '생전 처음' 카렐을 만났듯이, 그가 오르마즈를 난생 처음 만났던 것도 35살, 그 지옥같던 수용소에서 35년의 긴 삶을 살고 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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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과 판지셰르의 어려운 승전과 동시에 콜로니 전역에서 민병대의 대대적인 공세가 개시되었다. 지도자 샤미르는 오르마즈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군령권(軍令權)과 군정권(軍政權)까지 모두 그에게 일임시켰다.

민병대의 총 공세와 함께 코윈에 주둔했던 민병대 역시 다른 지역처럼 코메트들을 압박해 몇 개의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사령관 오르마즈의 가족들이 갇혀 있던 수용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님.......오르마즈 누님이시죠?”

아케메니아에서 허둥지둥 달려온 오르마즈를 맞아 준 건 바로 밑의 남동생 일라드의 멍한 얼굴이었다. 해진 옷과 여윈 몸, 꺼칠해진 동생의 얼굴에서는 그 오랫동안의 고생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수용소의 광경은 처참했다. 포장이 되지 않은 땅바닥은 빗물과 이런저런 오물로 악취가 풍겼고, 그런 더러운 대지 위에 거의 마치 소, 돼지우리 같은 500여채의 허름한 집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보아서는 일라드의 바싹 마른 몸이 도리어 건강해보일 정도였다.

“네가.......일라드?”

오르마즈는 36년만에 만난 남동생을 꼭 안아 주었다. 하지만 일라드 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진 오르마즈는 주변부터 두리번거렸다. 동생이 물론 반가웠지만 그에게는 더 소중한 얼굴이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동생들은? 아버지도 오셨다며?”

오르마즈의 물음에 일라드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르마즈는 그동안 너무도 소중히 간직해 왔던, 이제는 도금까지 하얗게 벗겨진 로켓을 한 손에 여전히 움켜쥐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 아지드의 얼굴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고!”

오르마즈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일라드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덜덜 떨고만 있었다.

“저, 저기........가 봐.......”

일라드가 가리킨 곳은 허름한 집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까 싶은 그 끔찍한 돼지우리와는 다른,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이라고 부를만한 판잣집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그 마당 주변에는 바싹 말라 뼈만 남은 사람들 수십명이 웅성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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