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68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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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리하 건너편에 주둔하던 남부연합군이 인근 농장을 처음으로 약탈한 건 나이만에서 올라오던 보급품 선단의 절반이 동맹군 자폭 보트의 공격으로 욱리하 강물에 수장된 직후였다. 다행히 나머지 보급품은 어찌저찌 도착하기는 했지만 워낙 손실분이 많아 제롬도 어쩔 수 없이 ‘다음 보급품이 올 때까지 배식량 증가는 없다’는 발표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 겨울은 날씨마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유난히 혹독한 올해의 겨울 날씨는 가뜩이나 체력이 떨어진 병사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안 그래도 두 번이나 배식량을 줄이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젊은 병사들은 제롬의 이번 발표에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낮에는 배식량에 불만을 가진 보병들이 급양대 사역병들과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식량과 담요를 훔치다가 붙잡혀 군법회의에 회부된 병사들도 이미 10명이 넘었다. 호지 가에서는 적은 배식량에 분노한 병사들이 ‘간부들이 식량과 방한복을 뒤로 빼돌리는 것이 아니냐’며 항명을 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민간의 식량창고와 가축에 눈독을 들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호지 가에서 온 경보병들은 바로 자신들의 제후가 ‘인종청소’를 명했던 2차 혼란기부터 ‘약탈’이라는 단어에 아주 익숙했다. 그들은 차량은 물론이고 하역용 중장비까지 수십 대 가져가서는 농장 창고에 쌓여있던 곡물과 육류를 모조리 실었고, 방목되던 소와 양, 돼지에 심지어 닭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차에 실었다.
이번 첫 약탈 소식에 가장 놀란 건 연합군의 근위기병대장을 맡고 있던 릴라크였다. 그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제롬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상황을 보고했다.
“인근 1백여 가구가 함께 일하던 공동농장이었다고 합니다. 식량이 없으면 이번 겨울을 날 수가 없다고 부대에 찾아왔습니다. 그자들을 어떡할까요?”
릴라크의 보고에 총사령관 제롬이 가소롭다는 듯 갑자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약탈해 온 양이 어느 정도냐? 그러니까.......우리 군대가 먹는 양 기준으로.”
제롬의 괴상한 질문에서, 릴라크와 참모들은 이번 약탈이 ‘우발적인 사고’가 결코 아니었음을 바로 눈치 챘다.
“농장이 커서 양이 제법 됩니다. 전군이 2일 정도 먹을 양이고, 상당한 양의 건초와 사료도 입수했습니다. 차들을 모두 동원해서 밤새 실어 나른 모양입니다.”
“풋, 이번에 배에 실어온 양의 절반이나 되는군. 이렇게 쉬운 걸.......당장 목록을 작성해서 올리도록 해.”
“주민들이 식량을 돌려달라고 계속 애원하고 있는데.......최소한 겨울을 날 식량만이라도 돌려주는 것이......”
릴라크가 불만스러운 듯 뚱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남부 매입가 기준으로 전쟁채권을 준다고 해.”
제롬은 명령서에 대강 서명을 해 릴라크에게 넘겨주었다. 릴라크는 순간 속에서 울컥 했다. 지금 시가인 남부연합군에 종군하고는 있지만 그 역시 이번에 약탈당한 황제령 사람이었다. ‘황제령 출신’으로서의 손톱만한 자존심 때문인지, 이 일을 그대로 넘어가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다.
릴라크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황제령의 농산물 시세는 남부의 2, 3배 정도입니다. 남부 기준으로 보상한다는 건 절반도 못 되는 헐값에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지금 1번 도시는 완전히 폐쇄되어서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전쟁채권은 종전 전에는 현금화할 수도 없는 휴지조각인데 저대로 놔두면 모두 아사.......”
“알아서 풀뿌리 파먹던가.......친척집에 빌붙던가 뭐 알아서 하는 거지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 되나? 우리가 공짜로 빼앗은 것도 아니잖아?”
제롬이 불쾌한 표정으로 릴라크에게 눈을 흘겼다.
“우리가 사겠다는데도 지들이 안 파니 당한 거 아냐. 앞으로도 거래에 응하지 않는 농장은 이번처럼 무조건 빼앗아서 채권으로 지급할 테니까 알아 둬. 표면적으로는 우발적인 약탈을 우리가 꼬박꼬박 보상하는 걸로 해 둬.”
제롬의 태도변화에 몇몇 참모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사건은 그동안 약탈을 금지해 왔던 연합군의 입장이 변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제롬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번엔 플라칼 가 무장들을 가리켰다.
“이번엔 플라칼 가가 나가도록 해. 북쪽으로 100스타디아(15km) 정도 떨어진 곳에 비슷한 규모의 농장이 있어. 동부기병들이 인근 농장들에 나가서 작물에 손 못 대도록 하고 있어, 농민들 도망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식량을 ‘수용’하도록 해. 모조리.”
릴라크는 더 이상의 명령을 듣지 않은 채 막사에서 그대로 돌아나와 버렸다.
한쪽에서는 식량을 제발 돌려달라며 숙영지 앞에서 울고 애원하는 이곳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는 근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릴라크도 약탈을 명할 수밖에 없는 제롬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껏 제국의 1등 시민으로서, 그리고 기술과 문예, 경제에서도 제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황제령 사람들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그런 황제령 사람들이 고작 ‘남부 촌놈’들에게 저런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내심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살려서 쫓아내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릴라크가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하얀 눈으로 뒤덮인 연합군 숙영지를 빙 둘러보았다.
한쪽에서는 병사들이 이 늦은 시각까지 불을 켜 놓고 고기를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젠 실력들이 늘었는지, 아니면 물가 고기들이 씨가 말라서인지, 자기들끼리 만든 뗏목까지 띄워놓고 제법 먼 곳까지 나가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다.
“운 좋은 놈들이군.”
릴라크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며 얼굴을 찡그렸다. 고기잡이 사역은 힘들기는 했지만 고기를 빼돌리거나 물 위에서 몰래 먹을 수 있다 보니 병사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
갑작스레 찬바람을 느낀 릴라크는 몸을 바싹 움츠렸다.
“날씨도 이 모양이고......”
올해 겨울이 유달리 추울 것이라는 예보는 불운하게도 정확히 맞아가고 있었다. 워낙 추위에 잘 적응된 남부 병사들이다보니 아직까지는 방한복도 없이 그럭저럭 버티어주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되고, 식량부족까지 겹친다면 저들도 계속 참아주지만은 않을 것이 뻔했다.
“끝장을 보려는 수작이군.”
숙영지 북쪽에서 플라칼 가 보병들이 약탈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거의 5백에 가까운 보병들과 1천여의 사역병, 노예들이 조금 전 식량을 싣고 온 화물차에 우루루 올라타고 있었다.
“제롬 저 새끼 조만간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겠군.”
릴라크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약탈을 마치고 돌아온 플라칼 가의 화물차 중 한 대에는 식량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 실려 있었다. 도살된 고기인 줄로 알고 자루를 생각없이 바닥에 내던졌던 급양대 사역병들은 풀린 주둥이에서 불쑥 드러난 사람 머리에 기겁을 하고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게 뭐야!”
“뭐긴 뭐냐, 시체지.”
화물차에서 뛰어내린 플라칼 가의 중대장이 침을 퉤 뱉으며 대꾸했다.
“이, 이걸 왜 가져오셨습니까?”
급양대 장교가 무슨 엽기적인 것이라도 생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약탈나간 부대가 시체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사방에서 놀란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민간인들이 저항한 겁니까?”
“자기네 양을 잡아간다고 식칼 들고 덤비더군.”
중대장은 별 감흥도 없는지 위에 실린 시체를 빨리 내리라며 눈짓을 보냈다. 실제로 그의 갑주 한쪽에는 칼에 조금 긁힌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군용 도검류라면 모를까 민간의 식칼 따위로는 중장보병의 갑주를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차에 실린 시체는 한두 구가 아니었다. 이건 누가 보아도 명백히 과잉방어였다.
몇몇 사역병들이 자루를 차례대로 벌려보며 치를 떨었다.
“도대체 몇 명입니까?”
“목격한 놈들은 다 죽였어. 한 40놈쯤 될 거야. 제기랄! 쳐다보기 기분 나쁘니까 자루 풀지 마! 어디 안 보이는 데다가 빨리 갖다 묻어버려.”
막 고개를 돌리려던 그 중대장은 눈앞을 막아선 웬 장신의 무장에 깜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이 개새끼야!”
배를 걷어차인 중대장은 한참을 밀려나 자신이 죽인 시체더미 위에 나동그라졌다. 중대장을 걷어찼던 릴라크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 마을에는 눈 달린 게 젊은 놈뿐이던?”
“예?”
“자루는 왜 발부터 씌웠냐? 머리부터 씌우는 게 훨씬 편할 텐데?”
순간 중대장의 표정이 파랗게 얼어붙었다. 릴라크가 사역병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체 모두 꺼내!”
당황한 중대장이 릴라크의 다리를 붙들며 애원하려 했다.
“저, 저 장군님, 저건........”
자루에서 시체를 끄집어낸 사역병들은 놀란 얼굴로 릴라크를 돌아보았다. 40여구의 시체들은 하나같이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던지 엉성하게 입혀져 있었다. 중간중간 성기에 이물질이 꽂혀있거나 저항하다가 폭행을 당한 듯한 시체도 함께 있었다. 릴라크의 분노에 찬 시선이 이 중대장을 따라갔던 5백여명의 보병들을 똑바로 향했다.
“야, 이 씨발 개새끼들아!”
격분한 릴라크가 병사와 장교들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잘못한 것을 잘 아는 병사들은 차려 자세를 잡은 채 그의 광기어린 발길질이 행여 자신에게 오지나 않나 벌벌 떨고 있었다.
“저, 저희 소대는 가담하지 않았.......”
변명을 하려던 소대장의 얼굴에 릴라크의 주먹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보고 있던 새끼들도 똑같아! 썅!”
완전히 이성을 잃은 릴라크는 악을 쓰고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걷어찼지만 5백명이나 되는 병사들은 그가 혼자 응징하기에는 너무도 많았다.
결국 차다가 지쳐버린 릴라크는 시체더미 앞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씨발, 빌어먹을........이 빌어먹을 전쟁 같으니......”
그때, 조금 떨어진 사령부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
대낮부터 숙영지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벌어진 소동에 급히 달려온 사령관 제롬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민간인들의 시체에 놀라 잠시 움찔거렸다.
“플라칼 가 선임무장 자격으로 보고 드립니다.”
바닥에 꿇어앉은 릴라크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전에 투입되었던 당 부대에서 민간인 학살 및 강간이 있었음을 보고 드립니다.......당장 해당 중대 전원에 대한 신체검사를 실시해 강간 및 은폐 가담자는 참수형을, 비가담자에게도 방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태형 및 강등 감봉조치를 처해 주실 것을 청원합니다.......그리고 소장 역시 관리책임이 있사오니 이 사건에 책임을 물어 파면 조치해 주십시오.”
릴라크의 요청에 경악한 병사들이 바닥에 엎드리며 저마다 무어라 울부짖기 시작했다. 릴라크의 엉뚱한 요구에 당황한 제롬은 바닥에 흩어진 시체와 병사들을 번갈아 돌아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 한심한 새끼 같으니.......”
릴라크의 눈치를 힐끔 살핀 제롬이 엎드려 있던 중대장의 얼굴을 힘껏 걷어찼다.
“이놈은 직위해제시켜서 사역대에 배치해. 해당 부대는 20일간 건설사역에 동원하고 배식량을 절반으로 줄여버려. 시체는 사람들 보기 전에 어디 으슥한 곳에 빨리 묻어버리고.”
생각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에 깜짝 놀란 릴라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 각하. 안됩니다! 이번 사건을 그런 식으로 넘긴다면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계속 빈발할 것입니다! 이번에 강한 처벌로.......”
“가뜩이나 사기도 떨어지는데 이까짓 일로 분위기 흐트러뜨릴 필요 없어. 군기를 엄히 다스리려는 자네의 충직한 뜻은 내 십분 이해하네. 자네도 책임이 없으니 업무에 그대로 복귀하게.”
제롬이 손수 릴라크를 일으켜 세워주며 짐짓 웃음까지 지었다.
“‘이까짓’ 일이라뇨? 이건 약탈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민간인이 40명이나 강간살해당했는데.......”
“그만 하라니까.”
제롬이 눈가를 살짝 일그러뜨리며 쏘아붙였다. 릴라크는 뒤돌아서 멀어져가는 제롬을 멍하니 쳐다보며 한참을 무력감에 떨어야 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보병들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이 그의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빨리, 빨리 치워!”
사역병들이 시체를 다시 자루에 담으며 사방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여기 온 게 잘못이야.......씨발.”
시체들을 뒤로 하고 돌아서며 릴라크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히르직스의 각별한 요구 때문에 소중한 첫 아기, 그리고 ‘불길하다’며 옷깃을 잡던 자상한 남편까지도 집에 놔둔 채 떠나온 전쟁터였다. 어딘지 조금씩 삐거덕거리는 연합군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이 혼란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문득 휩싸였다.
그는 멀리 강 건너, 높게 솟아오른 황궁의 휘황한 야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이유엔지, 갑자기 남편과 아기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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