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69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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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가족들을 북부에 남겨둔 채 다시 아케메니아에 돌아온 오르마즈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당초 오르마즈는 가족을 이 전쟁터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했지만 문제는 막내 세네피스였다. 안그래도 오르마즈와 최악의 관계에 있던 아버지 투르케스크는 막내는 네가 데려가라며 부탁, 아니 명령에 가까운 요구를 해서 그를 또 한 번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오르마즈는 ‘16살짜리 장녀 전쟁터에 떠밀고 마누라 목 졸라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 막내까지 죽이시려고요?’ 라며 발끈했지만 아버지의 속셈은 말하나마나였다. 그 뻔뻔한 남자는 자신의 잘못을 고자질한 저 꼴 보기 싫은 막내, 그것도 태어나 처음 본 낯선 자식을 영영 보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제가 안살림은 다 할게요, 언니는 바깥일만 신경쓰세요.”
오르마즈의 숙소에 함께 든 세네피스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릴라 생활이다 보니 사령관의 숙소라고 딱히 좋은 것도 아니어서, 좁은 동굴 앞에 세워진 흔해빠진 나무 오두막이 원수 오르마즈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네가 있던 수용소보다 그다지 좋은 것 같지도 않구나.”
오르마즈가 먼지앉은 창문을 활짝 열며 동생에게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정리도 안 된 삐거덕거리는 침대, 차 끓여먹는 찌그러진 주전자와 화로, 몇 개의 이가 빠진 잔, 이런저런 무기들과 허름한 옷가지들 빼면 집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중에 아케메니안 궁이라도 차지하면 그때가선 좀 사람답게 살 지도 모르지.”
“음식은 안 해 드세요?”
“명색이 원수가 그런 것까지 하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냐.”
오르마즈의 대답에 세네피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식사는 전사들 먹을 때 공동식당에서 같이 먹으니까 여기서는 뭐 먹을 일이 별로 없어. 그래봤자 마른 빵 양젖에 불린 거나 감자 찐 거에 삶은 야채하고 고기 조금이 전부지만. 식솔 딸린 장교들은 개별취사도 하지만 난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옆 오두막이 베멜러 중령 가족들 사는 데니까 나 없을 때는 얼굴도 익힐 겸 거기서 식사 해결하도록 해. 내 미리 얘기해 뒀으니. 그 친구 식솔들도 쿠트라스 출신이니까 너하고도 맞을 거야.”
오르마즈는 짐을 정리하는 동생의 어깨를 살짝 안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지도자 전하께 돌아왔다고 인사드려야 하지 않겠냐.”
세네피스는 자신을 놔둔 채 다른 사람을 만나러 떠나는 오르마즈의 뒷모습을 조금은 야속하게 쳐다보았다. 어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이곳에 올 때까지 오르마즈는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를 민병대에 다시 내주어야 할 때였다.
오르마즈가 나가고 빈 집에 혼자 남은 세네피스는 꺼진 화로에 불을 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금껏 이렇게 혼자 있어 본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어딘지 허전한 어깨를 감싸쥐었다. 갑자기 오르마즈의 빈 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샤미르의 동굴에 든 오르마즈는 햇볕이 드는 구멍 아래 만들어진 작은 화단을 발견했다. 희고 노란 수선화와 국화가 볕이 드는 그 좁은 자리에 저마다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에 쭈그려 앉은 유레트가 흙에 거름을 한참 주던 참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유리벽 앞에 말없이 앉아있던 샤미르가 막 동굴에 들어선 오르마즈에게 말을 건넸다.
“전부터 꽃을 키워 보는 게 꿈이었어. 물론 꽃가루 때문에 내게는 감히 허락되지 않는 꿈이지만 말이야. 다행히 유레트도 시골 출신이고 꽃을 좋아한다기에 여기에 화단 좀 꾸며 보라고 했어. 보기 좋은가?”
샤미르의 손에는 작은 수선화 화분 한 개가 캡슐에 싸인 채 들려있었다. 그는 화단을 손보던 유레트에게 손뼉을 두 번 쳐 보였다.
“그, 그럼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요?”
유레트가 얼른 손을 털고 일어났다.
“한 시간쯤 이따가 오도록 해.”
“예.”
유레트가 환해진 얼굴로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얼떨결에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게 된 저 아가씨에게도 이런 짧은 자유시간이 나름대로 소중할 터였다.
“이, 이걸 자네한테 주고 싶은데.......”
유레트가 나가고 난 뒤, 샤미르가 두 손에 화분을 꼭 쥔 채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는 반사적으로 벽 옆쪽의 서랍식 사출구를 쳐다보았지만 화분을 내보내기에는 너무 낮았다. 게다가 수선화 가지 밑에는 웬 하얀 천조각이 묶여 있었다.
“안에 들어와 줄 수 있지?”
샤미르의 이 속 보이는 ‘수법’에 오르마즈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꽃만 주실 건가요?”
오르마즈의 물음에 샤미르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는 갑자기 입가를 씰룩거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싫으면 집어 쳐. 자네 주려고 한 건 아니야. 그냥 내 방 안에 놓을까 하고 따로 빼놓은 것뿐이야.”
짜증을 내는 샤미르를 말없이 지켜보던 오르마즈는 결국 외투를 벗으며 쪽문에 들어섰다. 자그만 소독실 벽에는 유레트가 입는 자그만 위생복, 그리고 생전의 에르네스토가 입었던 위생복이 함께 걸려있었다. 물론, 오르마즈의 것은 없었다.
이 방에 들어가는 건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다.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소독을 한 후, 상하 한 벌로 된 갑갑한 위생복을 입고, 안면만 내놓은 모자를 눌러쓰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필터가 달린 마스크와 눈물로 인한 감염을 막기 위해 보안경까지 착용하고 확인차 다시 한 번 가스 소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게릴라 집단 처지에 이런 시설을 관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독약은 가끔 효능이 의심스러웠고, 때때로 고장이라도 날라 치면 앞뒤사정 모르는 엔지니어가 와서 고쳐줄 때까지 유레트는 소독약을 직접 몸에 분무하는 우스꽝스런 짓도 해야만 했다.
이전처럼 한참 걸려 소독을 마친 오르마즈는 에르네스토의 흰 위생복을 단단히 차려입었다. 에르네스토가 죽던 날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막 안에 들어선 오르마즈를 올려보며 샤미르의 입가에 자기도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수습하며 걱정스레 말했다.
“자네 어머님 소식 들었어. 괜.......찮나?”
“고향에 묻어드리고 왔습니다.”
오르마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샤미르의 가슴에도 오르마즈처럼 부모의 상장이 달려 있었다.
“지도자랍시고.......해 줄 말이 없군.”
오르마즈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얼마나 힘들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잠시 머뭇거리던 샤미르는 위생복으로 감싸여진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오르마즈는 전 같으면 자신이 그를 거칠게 밀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누구에게라도, 설사 불완전한 몸을 지닌 이 젊은 지도자라 할지라도 일단 기대고 싶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샤미르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전하께서도 나중에 책임감 있는 남편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최소한 가족에게라도요.”
갑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뇌리에 떠오른 오르마즈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는 보고 배울 아버지가 있지 않았습니까......”
오르마즈는 이를 악물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아버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만 기대고 있는 동생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는 장례기간 내내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계속해 흐르는 눈물 때문인지 보안경이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기대 줘서 고마워.”
샤미르는 오르마즈가 끼고 있던 보안경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눈물로 젖은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깔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홀린 듯 그의 아름다운 눈가를 쓰다듬던 샤미르는 말없이 떨고 있는 그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제1신의 성전이던 남극성당을 빼앗기면서 교단의 내분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제4, 5교단인 스루바라와 샤마시 교단은 제1교단의 동의도 받지 않고 회담장에 나간 트라카 교단을 격렬히 비난하기 시작했고, 반면 3교단인 에아 교단은 ‘내분중인 교단에서 어떻게 통일된 동의를 받으라는 말이냐’며 트라카 교단을 변호하면서 교단간의 대결은 조금씩 대결구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회의장에 나간 수나 마구스는 ‘다하카르 교단을 대표할 만한 인물에게 이미 동의를 얻었다’며 밝혔지만 살아남은 대신관 자녀들 중 그 누구도 그에게 동의를 해 주었다고 나서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남극성당에서 처형당한 대신관 자녀들 중 문제의 인물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넘겨짚었지만 사실 그들이 누군지 아는 사람도 같은 마구스들 뿐인데다가, 그들조차 16명 모두를 아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던 것이 마구스의 후계과정이다 보니, 마구스 후계자는 외부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그 핵심 측근들만이 자식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보니 이번처럼 마구스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을 때, 혹은 대표권이 문제가 될 때 상황을 더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내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번에 수나 마구스를 공격했던 코메트 부대, 그리고 사령관 테번 델루지와의 관계였다. 델루지 가문은 전통적으로 다하카르, 스루바라, 샤마시 교단과의 각별한 관계로 유명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 가문은 지금껏 세 교단에서 서열 20위 이내의 고위신관만 40명을 넘게 냈고, 사위나 며느리도 성직자 혹은 간택자가 아니면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얼마 전 오르마즈에게 점령당한 ‘남극성당’ 역시 당시 다하카르 3신관이던 테번의 할아버지 하다르 델루지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것이었다.
델루지 가문의 종손인 테번도 가문의 전통에 따라 다하카르 교단과 스루바라 교단 고위 신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그 역시 스루바라 교단의 간택자 출신이었다. 게다가 그의 두 여동생들 역시 각각 다하카르 교단과 스루바라 교단에 고위급 신관으로 봉직 중에 민병대에 살해된 일이 있었다.
그렇다보니 그는 교단세력 전체를 통틀어 민병대에 가장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지난번 회담장을 엉망으로 만든 것에 테번이 자신은 절대 관계없다고 주장했음에도 줄곧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이라고 주장하든, 최소한 그의 휘하 부대가 마구스를 시해하려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교단으로서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스루바라와 샤마시 교단이 기권을 하기는 했지만 나머지 교단의 마구스 6명이 앞장서서 이미 테번에 대한 파문과 해임안을 가결시키는 것까지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테번은 교단의 해임 명령에 정면으로 저항하여 아직까지 부대를 그대로 이끌고 있었고, 심지어는 후임자로 파견된 에아 간택자 출신의 장군을 멋대로 체포해 감금하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교단으로서는 이렇게 폭주하는 테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당면한 큰 과제였다. 그의 휘하에는 20만 가까운 막강한 병력이 도사리고 있었고, 다하카르, 스루바라와 샤마시 교단 간택자 출신의 측근 지휘관들이 그의 곁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회의에서는 코메트 부대 전체를 파문하고 일체의 자금지원을 끊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지만 민병대와 맞서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유일한 군 조직을 파문한다는 건 스스로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민병대 사령관 오르마즈가 ‘아케메니아 시만 접수하면 일단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교단과 타협책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샤미르에게 조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갈구하던 종교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라고 강조했지만 이 제안이 이후 그 스스로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테번의 저항이야 어쨌든, 종교회의 소식에 사기까지 땅으로 추락한 코메트 부대는 오르마즈의 대공세에 힘없이 무너졌고, 결국 수도인 아케메니아 초입까지 민병대들이 당당히 진군해오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그때까지 아케메니아 시를 지키고 있던 테번은 교단 통합본부가 있는 수도 아케메니아 시를 민병대의 포위망 안에 그대로 놔둔 채 명령도 없이 멋대로 퇴각해버렸다. 다하카르, 스루바라와 샤마시를 비롯해 친 테번 파 마구스들과 성직자들은 테번과 함께 소리소문없이 빠져나갔지만 트라카와 에아를 비롯해 테번의 파문에 앞장섰던 교단 사람들은 그곳에 그대로 남겨진 채였다. 심지어 그들은 도시 전체에 불을 지르고, 남은 사람들이 탈출할 셔틀과 배마저 모조리 태워 그들의 발을 묶어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성전의 해’인 기원 52년의 마지막 날, 오르마즈가 이끄는 3만의 민병대는 화마에 휩쓸려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콜로니 수도 아케메니아에 별다른 전투조차 없이 조금은 싱겁게 입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탈출로도, 지켜 줄 병력조차 잃은 채 망연자실해 있던 5명의 마구스들과 4백여명의 성직자들은 모조리 민병대의 포로가 되었다. 테번의 파문에 앞장섰던 6명의 마구스들 중 요양을 위해 잠시 쿠트라스에 가 있던 수나 빈트 트라카를 제외한 전원이 민병대의 포로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언뜻 민병대의 완승인 듯했던 이 사건은 이후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민병대를 뒤흔드는 단초가 되었다. 오르마즈가 원했던 것은 교단과의 ‘공존’ 이었지 이들을 짓뭉개는 것이 아니었다. 교단의 중요인물들을 놔둔 채 도망간 적들의 속셈은 그런 오르마즈에게 가장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성전’의 개시와 함께 잠시 가라앉았던 민병대의 분열까지도.
코메트는 더 이상 ‘교단의 무장세력’이 아닌, 미친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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