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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70화 (469/1,132)

< -- 470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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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의 약탈로 남-동부연합군의 식량 사정은 얼마간 나아졌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릴라크의 예상대로, 약탈당한 마을들에서 주민들의 이유모를 ‘실종’이 계속되면서 인근의 농민들은 농장을 버려둔 채, 혹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챙겨서 동맹군들이 있는 산 속으로 잠적해 버리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일부 다혈질 농민들은 ‘기껏 길러서 빼앗기느니 거름으로나 쓰겠다’며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겨울밀밭에 불을 질러버리고 도망가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물론 그렇게 버려두고 가거나, 동맹군 쪽으로 도망 온 농민들의 창고는 산중에서 몰래 내려간 동맹군 경보병들이 깨끗이 ‘수거’해 가거나, 혹은 불태워 없애버렸다.

그렇게 더 이상의 약탈조차 어려워진 제롬은 창고에서 매일 줄어가는 군량을 보며 한숨만 내쉴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식량 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 곤두박질치던 기온은 며칠 전부터는 빙점 아래까지 기록해서 제롬의 어깨에 한 가지 걱정을 더 얹어놓았다. 하지만 빌어먹을 보급 때문에 방한복을 지급받은 병사는 총 병력의 채 10분의 1도 되지 못했다.

사실 나이만 분지의 보급기지에는 전군이 다 쓰고도 남을 방한복, 그리고 반년은 족히 먹을 식량이 쌓여 있었지만 동맹군의 계속된 기습 때문에 이곳까지 가져오는 도중에 절반 이상이 증발해버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배식량이 줄고, 날이 추워지면서 늘어난 건 병사들의 불만뿐만이 아니었다. 야전병원은 평소보다 2, 3배는 되는 환자들로 넘쳐났지만 보통의 군대에 있음직한 ‘외상 환자’는 거의 없었다. 배고픔에 산자락에서 아무 것이나 집어먹었다가 배탈, 중독에 걸려 찾아온 환자들부터 시작해 언제 옮아왔는지 모를 황도의 ‘독감’까지 이곳에서 퍼지고 있었다.

게다가 굶주려 면역력이 떨어진 병사들은 조금만 상태가 좋지 않은 음식이나 물에도 바로 이상을 호소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이런 ‘진짜 환자’들 말고도 ‘야전병원의 특별배식’을 노리고 무조건 꾀병을 부리며 찾아온 가짜 환자들도 수두룩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빌어먹을, 이놈의 독감 혹시 저놈들이 일부러 엿 먹으라고 퍼뜨린 거 아냐?”

회의실에 앉은 제롬이 목에 싸맨 얼음주머니를 더듬으며 투덜거렸다. 그 역시 어젯밤부터 독감 때문에 몸이 말이 아니었다.

“첩보에 듣자하니 저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던데요.”

보벤 경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니미럴, 이쪽 위생사정이 훨씬 안 좋은데 우리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벌여? 저 새끼들 바보 아냐?”

콜록거리며 몇 번 기침을 한 제롬은 다시 서류를 집어들었다.

“잠깐, 그런데 누가 없는 것 같은데?”

제롬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물음에 보벤이 냉큼 대답했다.

“근위기병대장 릴라크 예리노프 경이 없군요.”

제롬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황제령 출신인 릴라크가 요즘 자신의 처사에 부쩍 불만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비꼬듯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황제령 출신이라고 안 할까봐.......”

제롬도 대놓고 못 꺼내는 이야기를 먼저 입 밖에 낸 건 샤자한 공이었다. 제롬이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넌지시 눈짓을 주었지만 샤자한 공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남부 아니면 동부 지휘관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릴라크의 존재는 어쨌건 좀 이질적이기는 했다.

제롬이 옆에 앉은 3군 사령관 마누엘 경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샤자한 저 새끼 전에는 베아트릭스인가 그년 남부 혈통이라고 어지간히 들볶았다지? 이번엔 릴라크 경 차례인가? 아주 멋대로 편 가르기 선수네 그려. 저런 개새끼 때문에 괜히 우리 지휘관들까지 얼굴 붉히지 않게 조심해.”

“알겠습니다.”

제롬의 말뜻을 이해한 마누엘 경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은 다혈질에 잔혹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자신을 따르는 무장을 실망시키는 바보는 아니었다.

제롬은 이번엔 반대편에 있는 부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릴라크 경이 듣자하니 첫 아이 낳은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가족하고 오래 떨어져 있어서 요즘 기분이 영 안 좋은 것 같아. 본토에 있는 가족들이 한 번 왔다 갈 수 있게 조치를 좀 해 둬.”

“예. 알겠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일단 회의 분위기를 다잡은 제롬은 한쪽에 서 있는 베흔과 쿠베의 형상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사오시안트에서 아까부터 연결되어 있던 그들은 무슨 큰일이라도 당했는지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왜? 뭐 초상이라도 났어?”

제롬이 웃음까지 지으며 물었다.

“예. 정말로 초상이 났죠.”

베흔의 대답에 제롬이 움찔했다. 쿠베가 베흔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에 레곤 대공주의 둘째딸이신 건연 세닉 리쿠 대군께서 사오시안트의 처소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순간 제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레곤의 둘째딸 건연 대군은 근위대에서 황실 종친회와 세닉 가를 압박하기 위해 데리고 있던 2명의 인질 중 하나였고, 수우의 ‘후계자’가 아들일 경우 혼인시켜야 할 상대이기도 했다.

“아니........무슨 소리야? 그저 독감에 걸린 것뿐이라며?”

스스로도 독감에 걸린 제롬은 지레 놀랐는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만.......확실치 않습니다. 얼마 전 황도에서 리에드 공주 역시 이번 독감으로 사망한 것을 보아 황족 혈통에 유독 다른 증세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베흔이 비교적 차분하게 말했다. 황가 중시조인 샤미르가 면역결핍이었던 것을 잘 아는 그에게 황족의 면역체계에 결함이 유전되었을지 모른다는 건 그다지 놀라운 가설도 아니었다. 베흔은 잔뜩 겁에 질린 아들에게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각하께선 크게 염려치 마십시오.”

“그래.......뭐 그건 그렇다 치고.......그럼 어떡해? 이거 괜히 황족들이 우리한테 덤태기 씌우는 거 아냐?”

“뭐 저쪽에서도 리에드 공주가 죽었으니 우리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죠. 어쨌든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황족들의 조문을 일체 금지시켰습니다. 행여 황족에게만 치명적인 독감이라면 아주 곤란해지니까요. 대공주 역시 오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베흔이 이어 이번엔 쿠베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황도에서 들어온 첩보인데.......카렐 그자도 벌써 며칠째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응?”

제롬이 갑자기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이유가 뭔데?”

“아직 모릅니다. 지금 보안국 정보망을 총동원해 그 이유를 밝히려 애쓰고 있습니다.”

아픈 목을 잠시 감싸쥐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롬이 별 생각없이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그럼 그놈도 혹시 독감에 걸렸나?”

“뭐 그럴지도 모르죠. 믿을 수 있는 정보 소스는 아니지만.......녀석이 정말로 이번 독감에 걸려 못 움직인다는 첩보와 심증도 있습니다.”

“엥? 무슨 소리야?”

“황도에 남겨두고 온 정보통 연락에 따르면 보건국 연구원들이 총동원되어서 무언가 치료약을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치명적인 변종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던지, 누군가 중요인물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인데 지금 그쪽 인물들 중 행적이 확실치 않은 것은 카렐 그자 한명 뿐이지 않습니까.”

제롬이 잠시 생각에 잠신 듯 턱을 똑똑 두드렸다.

“함정이냐.......기회냐.......둘 중의 하나인데.......어차피 이대로 있다가는 우기 끝날 때는 다 굶어죽고 절반밖에 안 남아있을지도 몰라.”

제롬은 군량 재고가 적힌 서류를 살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초 우기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지금 같아서는 그 전에 아사자가 줄줄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궁지에 몰려서인지, 그의 생각은 자꾸만 ‘모험적인 선택’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제롬이 참모장 카산드라 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난번에 도착한 수송선단이 아직 안 돌아가고 있죠?”

“정확히는 못 돌아가고 있죠.”

카산드라 경의 대답에 몇 지휘관들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수로 중간을 가로막고 있는 건무성 때문에 이미 오다가 절반이 줄어버린 상황이었다. 다시 짐을 실어오라고 돌려보냈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할 판이었다.

그럴 바에는 온 배는 그대로 보유하고 차라리 새 배를 실어오거나 징발해 투입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제롬의 판단이었다.

“일단 저 강만 건너면 탄현성에 있는 근위대와도 합류할 수 있고, 그러면 보급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돼. 일단 강만 건너면.......”

제롬의 혼잣말에 몇몇 장교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기까지는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빈 화물선에 병력을 가득 실으면 얼마나 가능하겠소?”

제롬의 느닷없는 물음에 장교들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제롬은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를 추스르려는 듯 손을 저으며 얼버무렸다.

“별 것 아냐. 혹시 적진에 이상동향에 있거나 다리를 만들 수 없을 때 얼마나 많은 병력을 기습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묻는 것뿐이니.”

제롬이 얼버무렸지만 이 무모한 최고제후가 이 정도는 언제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물이라는 데는 장교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참모장 카산드라 경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중형 바지선 11척입니다. 그 중 2척은 반파되어서 수리 중에 있고요. 크기를 보아서 1척에 중장보병 2, 3백 정도는 가능하겠죠. 기병은 1백 정도. 작은 배들까지 총동원하면 3, 5천 정도는 한 번에 건널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너는 도중에 절반은 수장될 겁니다.”

마누엘 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욱리하 강물 위를 가리켰다. 적진 가까운 강안에는 행여 건너올지 모르는 이쪽 선단을 대비해 인화물질을 가득 실은 작은 배 수십 척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게다가 건너편 언덕 위에는 배를 잡기 위한 서부 사역병단의 발리스타 50여대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건너편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건 고작 3천 정도라는 뜻인가?”

“꾸역꾸역 더 태울 수야 있겠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커지는 건 각오해야 하겠죠.”

“그냥 도하용 조끼 하나씩 입혀서 헤엄쳐 건너게 할 수는 없을까?”

“강폭이 70스타디아(10.5km)나 되는 강을요? 이 겨울에 말입니까?”

카산드라 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강 반대편에 적당한 위치에서 병사들부터 푼다고. 한 30스타디아(4.5km)면 되지 않겠나? 그 정도면 발리스타 유효사정권 밖이고.”

제롬의 나름대로 진지한 제안에 마누엘 경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우기라 유속이 빨라서 절반은 뭍에 닿아보지도 못하고 떠내려갈 겁니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입니다. 저체온증 때문에 물속에서 몇 분도 버티기 힘듭니다. 사방팔방 흩어진 채로 기진맥진해서 올라가 봤자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습니까? 게다가 반대편에 있는 건 적 에키트 야만족들과 기병들입니다.”

과감하기로는, 아니 무모하기로는 제롬에 뒤지지 않을 마누엘 경이었지만 이번만은 반기를 들고 나섰다.

“조끼에 가스 추진팩이 있지만 완전무장한 중장보병 같은 경우는 힘을 조금 덜어주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배식량 부족 때문에 가뜩이나 체력이 떨어진 병사들이 이 추위 속에서 30스타디아나 헤엄을 치기는 불가능합니다.”

“절반을 버리긴 매한가지인데 뭘 그래. 최소한 배는 건지잖나. 후속병력을 계속 실어 나를 수 있으니 됐잖아.”

제롬의 말도 안 되는 계산법에 장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약간의 발열장치, 그리고 어깨에 조그만 일회용 보조추진 가스팩이 붙은 병사들의 도하용 조끼는 10스타디아(1500m) 이내의 도하에 사용하거나, 혹은 배나 교량이 수장될 경우에 대비해 최후의 생존책으로 입히는 것이지 처음부터 물에 빠뜨려---그것도 겨울에--- 적들의 사냥감으로 던져주자고 입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롬은 다시 강물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저 위를 봐. 이미 강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했다고. 이 한파가 며칠만 더 계속되면 강 양쪽이 얼어붙을지도 몰라. 강이 다 어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손 쳐도 최소한 양쪽이 다 얼어붙으면 도하할 거리는 훨씬 짧아진다고.”

장교들은 이번만은 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강 양단이 얼어붙는다면 우기 중 도하도 충분히 시도해봄직한 일이었다.

“어쨌든, 언제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슬슬 준비태세에 들어가도록 해. 플라칼 가 보병들이 추위에도 강하고 훈련도 잘 받았으니 그 녀석들이 앞장서면 든든할 거야. 세닉 가 투창병들이 엄호하도록 하고.”

플라칼 가와 세닉 가 장교단에서 바로 한숨소리가 새나왔다. 특히나 가문 피가 섞인 대군을 잃은 세닉 가는 가뜩이나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나 그들 중 한 명은 옆 동료의 어깨에 기대 울기까지 하고 있었다. 제롬은 ‘어디서 재수 없게 우냐’고 쏘아붙이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울고 있는 건 죽은 건연 대군의 남동생이며 중랑장인 에우테르 대군이었다.

사실 이번 원정이 시작될 때부터 ‘말 잘 듣고 잘 싸우는’ 플라칼 가 군대, 그리고 제롬의 눈 밖에 난 세닉 가가 가장 위험한 곳에 투입되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플라칼 가의 장교단 역시 가문의 별난 전통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전쟁기계로 키워져 온 자들이었지만 이번처럼 짧은 기간에 강도 높은 전투를 계속 치러야 하는 전쟁은 그들에게도 처음이었다. 연초부터 헤아려 수십 차례의 대규모 전투에 계속 동원된 플라칼 가 장병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리고 보병들에게 ‘저승길’이라는 말과 동의어인 ‘도하’와 ‘공성’은 이번에도 그들의 몫이었다.

3군 사령관 마누엘 경이 침울해진 그 두 가문의 분위기를 힐끔 살피며 총사령관 제롬에게 눈짓을 보냈다.

“며칠 후에 보급선단이 다시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는 기다려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배까지 합류하면 공격부대의 생존율과 성공 가능성도 대폭 높아질 겁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자네는 적 진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나 빨리 밝혀내서 알려줘.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할 테니.”

제롬의 표정은 당장 내일이라도 도하 명령을 내릴 사람처럼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목에 감은 얼음주머니를 풀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명심해 둬. 지금 우리는 식량이 부족하고, 병사들이 더 지치기 전에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는 걸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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