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71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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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니안 궁을 결국 수중에 넣은 샤미르였지만 개선식의 주인공은 지도자인 그가 아닌, 오르마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르마즈는 그 공을 ‘현명한 지도자’ 샤미르에게 돌렸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영웅’이었다.
오르마즈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샤미르를 대신해 그 모든 영광, 혹은 책임을 모두 짊어져야만 했다.
기원전 259년의 천도 이후로 300여년간 줄곧 콜로니의 정치, 행정 중심지가 되어왔던 유서깊은 아케메니안 궁은 하층부의 대연회장 아스트라이아 홀을 시작으로 그 최상부에 평평한 제단이 있는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그 높이 역시 건물 49층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콜로니의 웬만한 건물들도 높아 봤자 채 20층이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면 규모만으로도---최소한 당시까지는--- 콜로니 최대의 단일 건축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한때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던 이 아름다운 건물도 오르마즈와 민병대가 도착했을 때는 코메트 부대의 방화로 군데군데 불에 타 보기 흉해진 모습이었다.
꽃잎세례를 받으며 당당하게 아케메니안 궁에 들어섰어야 할 이 젊은 지도자는 도시를 점령하고 1달 가까이 지난 한밤중에, 그것도 특수하게 제작된 의료셔틀을 타고 마치 도둑질하듯 개선 아닌 개선을 했다. 그에게는 환호성을 올려 주는 민병대 전사들도, 마지못해 환영의 손을 흔드는 민간인도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마치 우주복처럼 온몸을 꽁꽁 가린 위생복과 그 위를 완벽하게 가린 검은 베일이 이곳 궁의 옥상, 샤미르의 새 처소를 지키던 소수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그가 무균실 밖에 있던 시간은 채 1시간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그 정도도 판지셰르를 평생 단 한 번도 떠나보지 못했던 샤미르로서는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그는 셔틀을 타기가 무섭게 쇼크와 호흡곤란을 일으켜 의사를 기겁하게 했고, 그가 새로운 처소에 처음 들어선 것도 거의 탈진한 채 오르마즈의 등에 업힌 상태에서였다.
“원래 대신관의 제2처소였지만 얼마 전부터는 콜로니 평의회 의장이 썼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전경이 아주 좋거든요. 지난 1달 동안 최대한 서둘러 공사를 했습니다. 작업자들에게는 실험용 무균실이라 말해 두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침실도 따로 있고 창도 있습니다.”
의사의 응급처치를 받고 그럭저럭 정신을 차린 샤미르에게 오르마즈가 두 팔을 벌려 보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샤미르의 새로운 처소는 아케메니안 궁 옥상의 정방형 광장 귀퉁이에 자리잡은 아담한 펜트하우스였다. 지난 삶 동안 바깥을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아 온 그를 위해 마련한 듯 4면 모두가 시원한 전창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앞으로 그가 다스릴 아케메니안 시의 야경이 군데군데 불에 탄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 앞쪽 옥상은 옛날에 제단으로 쓰였던 곳이지만 일단 관련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봉쇄했습니다. 이 펜트하우스도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햇빛을 피하고 싶으시면 안에서 빛을 완전히 차단해서 암실을 만들 수 있고요.”
오르마즈는 옥상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유레트의 모습을 내다보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유레트는 언젠가 저 넓은 옥상 모두를 예쁜 화단으로 만들겠다며 벌써부터 의욕이 대단했다. 오르마즈는 어쩌면 이곳에 이사를 와서 가장 기뻐하는 사람이 유레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겐 유리의 감옥이라는 건 여전하군........”
샤미르가 자신과 오르마즈 사이에 놓인 유리벽을 살며시 싶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르마즈는 현관 앞의 작은 알현실에 선 채 그런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응.”
샤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오르마즈를 올려보았다.
“붙잡은 마구스와 성직자들은?”
“바로 아래층에 있는 처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비록 포로 신분이지만 최대한 예의로 대하고 있습니다.”
“자네 생각엔 적들이 왜 저들을 남겨두고 간 것 같나? 그냥 자기들끼리 내분이 생겨서라고 믿는 것은 아닐 테고.”
샤미르의 물음에 오르마즈가 바로 대답했다.
“지난번 말씀드렸듯이.......저들의 처리 문제로 우리 쪽에 내분이 벌어지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우리 손을 빌려 자신들의 반대세력도 제거하는 일거양득을 원하는 것이겠지요.”
“저들을 죽이고 분열되었던 적들을 다시 통일시켜 주건, 안 죽이고 우리 내부 강경파의 저항에 직면하든, 결국은 적의 계략에 말려드는 셈이겠지.”
샤미르는 불에 타 시커먼 형상이 드러난 멀리 강안의 주택가를 내려다보며 잠시 한숨을 지었다.
“마구스와 성직자들을 여기 두는 것보다는 특무대가 있는 남극성당으로 일단 보내는 게 좋겠다.”
샤미르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는 조금 긴장한 듯한 그의 얼굴을 문득 올려보았다. 샤미르의 말을 ‘말뜻 그대로’ 받아들일 상황이 아님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호송합니까?”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충직한 장교 하나 구할 수 있겠나? 대위나 소령 정도면 적당하겠지. 가능하면 옛날에 사교도였거나 가족 중에 사교도가 많은 사람이면 좋겠어.”
오르마즈가 잠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샤미르의 뜻을 눈치 챈 오르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미르도 이 이상은 말을 꺼내지 않고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이곳에서 노획한 금품 처리는?”
“현금은 거의 없습니다만 상당량의 귀금속과 채권을 입수했습니다. 군수품 창고는 놈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갔지만 보관량의 절반가량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대단한 말이 한 마리 있다고?”
샤미르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절영’이라고 대신관들이 타던 검정색 수말입니다. 원래는 ‘그림자 귀신’ 이라고 해서 수베르 유목민들이 신성시하고 받들던 말이었는데 생전에 자하크 대신관이 자신과 함께 수명개조를 시켰을 정도로 아꼈다고 하더군요. 이곳 마구간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던 것을 겨우 잡았습니다.”
오르마즈가 가지고 있던 서류에서 절영의 사진을 꺼내 내보였다. 샤미르는 유리벽을 짚은 채 그 모습을 잠시 넋 놓고 쳐다보았다. 보통 말보다 머리 하나가 쑥 올라간 큰 키, 잡티 하나 없는 반짝이는 검은빛 털에는 윤기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길고 적당히 굵은 다리와 유난히 큰 말굽은 언뜻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정말 아름답군.......완벽해.”
“이젠 지도자 전하의 말입니다.”
오르마즈는 정작 스스로는 타 볼 수도 없는 말에 이렇게 넋이 나가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 내심 안쓰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부탁 있는데.”
“예?”
“내일 아침에.......이 말을 여기 옥상에 데려올 수 있겠나?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어.”
샤미르는 조금 전까지도 유레트가 혼자 기분좋아 뛰어다니던 넓은 옛 제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르마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뭐,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냐.......내일 아침이 좋아. 아참, 마구까지 다 갖추고 최대한 멋있게 해서 말이야. 대신관이 쓰던 거라도 좋으니까 최대한 멋있게. 자네가 직접 끌고 왔으면 좋겠어.”
샤미르가 뜬금없이 미소를 지었다. 오르마즈는 샤미르의 이젤을 힐끔 돌아보며 ‘이 양반 좋은 모델 하나 얻었나 보군’ 하며 혼자 이유를 넘겨짚었다.
“그러면 소인은 이만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동생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수용소에만 있다가 낯선 곳에 처음 나와서인지 혼자 있으면 유난히 무서워합니다.”
샤미르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이미 12시가 넘어 새 날이 시작된 시각이었다.
“혼자 있는 건 나도 무서워.......태어나 처음으로 낯선 곳에 와 봤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샤미르가 이전보다 훨씬 넓어져 휑하기까지 한 방 안을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오르마즈는 그제야 조금 전 자신의 말이 실수임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무안하게 이곳을 나서려던 오르마즈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 병약한 지도자는 홀로 있기엔 너무도 큰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 앞에 선 채 한참을 망설이던 오르마즈가 결국 다시 돌아섰다.
“유레트도 숙소로 돌아갔고........동생도 아마 잠들었을 겁니다. 오늘 밤은 제가 이곳에 함께 있겠습니다.”
샤미르의 눈썹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되돌아선 오르마즈가 소독실에서 몸을 씻고 위생복으로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줄곧 말없이 서 있었다.
“제가 옆 보조 침대에서 자겠습니다. 전하께선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그 옷차림으로 자기는 불편할 텐데.”
“어쩔 수 없죠.”
오르마즈는 합성수지로 된 위생복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무심코 내뿜는 타액에도, 피부에 맺힌 땀이나 각질에도 샤미르를 죽일 수 있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좀 씻었나?”
샤미르의 뜬금없는 물음에 오르마즈가 잠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수도 시설이 파괴되어서 한 달 넘게 고양이 세수만 했습니다. 수도가 복구되려면 아직 한 달은 있어야 하니 그때 가서 목욕이라도 해야겠죠. 게릴라 주제에 갑자기 목구멍에 기름칠을 해도 탈이 나는 법입니다.”
오르마즈가 입가에 애써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전하께서도 제가 씻고 난 깔끔한 모습을 보신 일은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래........”
샤미르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알현하러 찾아온 오르마즈는 매번 먼지 앉은 군복 차림에 제대로 감지 않아 떡진 머리를 한 몰골이었다.
“사령관이 그런 몰골로 있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으니.......여기서.......씻겠나?”
“예?”
“여기 욕실이 딸려 있으니.......어차피 자정 순환되는 물일 것 아냐?”
샤미르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지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오르마즈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
“이런 더러운 몸으로 어찌 감히 그곳에.......”
“어차피 들어오면서 소독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난 내 침대에 자고 있겠네. 기왕이면 깨끗해진 자네 모습을 보고 싶어.”
샤미르의 여윈 손에 무슨 이유엔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르마즈는 그의 눈동자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뿌연 김으로 가득 찬 샤워부스에 선 오르마즈는 자신이 왜 이곳에 들어왔을까 하는 후회가 문득 들었다. 제법 큰 샤워부스 천장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따뜻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냄새 한 번 고약하군.”
목욕물에서까지 풍기는 소독약 냄새에 오르마즈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 자신이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인지, 소독약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모처럼 느껴보는 그 따스함에 그의 경직되었던 근육도 조금씩 풀어져갔다.
“하아......”
더러워진 그의 몸을 씻어내고 바닥으로 흘러내린 물줄기는 마치 핏물처럼 붉었다.
오르마즈는 손등에 묻은 검붉은 얼룩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온 피인지, 누군가의 몸에서 묻은 피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것을 씻어내는 것이 마치 해서는 안 될 주제넘은 짓인 듯 느껴졌다. 오르마즈는 한숨을 내쉬며 몸에 비누를 바르고 전장의 이 묵은 때를 벗겨냈다.
“내 모습이 이랬던가.......”
뿌연 김이 잔뜩 어린 샤워부스의 거울벽에 오르마즈의 모습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오르마즈는 손으로 김을 대강 닦아내고 자신의 벗은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뽀얀 피부, 누가 보기에도 고귀함이 넘치는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온몸에는 상처가 마치 훈장처럼 곳곳에 널려있었다.
적들의 퇴각 이후, 잠잠해지리라 믿었던 적의 반격은 도리어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코메트들은 마치 오르마즈의 행로를 모두 알고 있는 듯, 거의 매일처럼 그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 이렇게 목숨을 위협하곤 했다. 수뇌부 어딘가에서 정보가 흘러나가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욱리하 인근에서 갑자기 출몰한 코메트 기습부대와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난 후였다. 그를 호위하던 소대에서 절반이 죽었고, 총사령관이며 원수인 오르마즈가 석궁과 칼을 들고 차에서 뛰어나가 십여 명을 직접 쓰러뜨려야 했을 정도였다.
오르마즈는 누군지 모를 배신자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지만 아직 민병대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강경파들은 여전히 그에게 비협조적이었다. 그들은 13번이나 계속된 기습에서도 오르마즈가 살아남은 것에 의문을 표시하며 심지어는 ‘자작극’이 아니냐며 얼토당토않은 주장으로 오르마즈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답답해진 오르마즈는 이럴 때 지도자인 샤미르가 떡 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 자신의 든든한 배후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기도 했지만 가망 없는 기대일 뿐이었다.
민병대 강경파 수장이던 슈엘러 쉐너 장군이 오르마즈의 손에 숙청당한 이후, 새 수장이 된 타르서스의 군벌, 굴부딘 헤크마 장군은 전임자보다 훨씬 음흉하고 야심이 강한 자였다. 그는 한번은 ‘모습을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자신 없는 자를 우리의 지도자로 받들 수는 없다’며 난동을 피워 다른 민병대 장교들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안하무인격인 그런 작자를 잘라냈어도 진작 잘라내야 했지만 그는 민병대 휘하 최대의 군벌이었고, 민병대 10만여 병력 중 4분의 1이 넘는 2만 8천이 그에 속해 있었다. 오르마즈도 자신에 대한 계속된 공격의 배후에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은 갖고 있었지만 별다른 물증이 없었다.
민병대 원수라는 이 그럴싸한 자리도, 결국은 서로서로 다른 속셈을 품고 모여든 민병대의 많은 집단들 중간에서 항상 시달릴 수밖에 없는 지위였다.
그때, 샤워부스가 갑자기 열리는 소리에 오르마즈는 잠시 자리에 굳었다. 그의 뒤에는 자신처럼 모두 벗은 한 젊은 남자가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들어가도.......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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