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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73화 (472/1,132)

< -- 473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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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리하변을 감시하던 슬레이프니르의 관측병이 강 건너 남-동부연합군의 이상동향을 감지한 건 그들에게 더 이상 약탈할 곳조차 남지 않은 상태에서 2, 3일이 더 지난 후였다.

“이런 혹한에 식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저런 훈련을 할 리가 없습니다. 첩보에 따르면 일부 부대에 오늘 아침부터 배식량이 이전처럼 환원되었다고 합니다. 적들이 도하를 준비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슬레이프니르 4연대장 루코프의 보고에 이곳 황도 방어의 총 책임을 맡은 상장군 제네르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의 망원경에 들어온 남부 보병들은 방한복과 조끼를 입은 채 칼바람이 몰아치는 강변에서 무언가 훈련을 받고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워낙 서로를 빤히 보고 있다보니 작은 ‘훈련’ 따위도 상대방의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네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플라칼 가 보병들이군. 설마 냉수마사지를 하는 건 아니겠지.”

‘플라칼 가’라는 말에 베아트릭스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출신 가문에 정면으로 칼을 겨누어야 할 상황이었다. 망원경에서 눈을 뗀 제네르는 강물에 손을 살짝 담가보았다.

“보병들 다 잡겠다는 건가.”

한겨울의 강물은 손끝을 베어내는 듯 차가웠다. 문제는 날씨였다.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 날씨는 계속 빙점 아래를 보였고, 유속이 느린 몇몇 곳은 이미 조금씩 얼어붙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욱리하가 얼어붙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날씨가 영 심상치 않은걸. 욱리하가 혹시 결빙될 우려는 없나?”

제네르가 두툼한 담비털 망토자락의 털 날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사역병단 장교에게 물었다.

“올해는 기록적인 한파가 있을 것 같다는 예보입니다만 욱리하의 전체적인 결빙은 없을 거라고 하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욱리하가 완전히 결빙된 예는 500여년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분결빙은 있다는 뜻이겠지?”

“6년 전에 강 양안에서 10스타디아(1.5km)씩이 얼어붙었던 예가 있습니다. 1년중 이맘때의 기록입니다.”

“양쪽 합치면 20스타디아의 강폭이 줄어든 셈이군?”

“그런 셈입니다.”

“우리 발리스타는 강안에 접근하는 적 배를 노리고 만들어졌어. 적의 배가 강안에 가까이 다가올 필요가 없다면 우리 발리스타의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셈이다.”

“.......”

잠시 침묵에 빠져든 장교단에게 이번에는 베아트릭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강을 지키고 있는 우리 병력은 기병 위주야. 중량이 많이 나가는 기병은 얼음 위에서는 싸울 수가 없어. 다행히 에키트 보병들이 추운 극지 산악에서 싸우던 부족들이니 좀 나을지도 모르지만.”

베아트릭스는 옆에서 왁자지껄하고 있는 20여명의 호위대 에키트 보병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다른 병사들은 다 춥다고 움츠리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거의 제 세상 만난 듯 했다. 그들은 이 정도는 자기들 사는 곳에서는 여름이라며 이미 지급된 방한복도 숙소에 내버려놓은 채 두 팔을 훤히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신발 정말 쓸만하군요. 말 탈 때는 좀 번거롭지만.”

루코프가 발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정규군의 이미지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 북실북실한 털가죽 부츠는 에키트 족들이 신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네르와 베아트릭스 역시 같은 것을 신고 있었다. 갑주 위에 또 덧신어서인지, 이 신을 신은 사람들의 발은 마치 곰발바닥처럼 유난히 큼직해 보였다.

“그런데 정말 안 미끄러지는걸. 발도 안 시리고.......이거 재료가 뭐야?”

제네르가 신을 벗어 바닥을 뒤집어보며 물었다. 베아트릭스가 신발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에키트 족들이 겨울 사냥할 때 신는 방한화입니다. 신발 자체는 순록가죽이지만 바닥은 탈라스 극지에서만 나는 특수한 나무껍질 창을 덧댄 겁니다. 원래는 에키트 족 복지 차원에서 속는 셈 치고 5백 켤레 구매한 건데 반응이 생각 외로 좋습니다. 창은 자주 교체해 줘야 하지만 단가가 얼마 되지 않으니 별 부담은 없습니다. 이렇게 추워질 줄은 몰랐는데 운이 좋았죠. 신고 벗기 편하게 개량된 추가분 5천 켤레와 창 1만 개가 오늘 들어올 예정입니다.”

“일단은 3군단 보병대에 우선 지급하도록 해. 적들이 넘어오면 2차로 맞아야 하니까.”

지시를 끝낸 제네르가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먹구름이 잠시 끼더니 다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사역병단은 강안 전역에 흩어져서 결빙 상태를 확인하고 2시간 단위로 보고서를 올리도록 해. 어쩌면 장애물이던 이 강이 적들에게 도리어 길을 뚫어줄 수도 있어.”

명령을 내리고 돌아서며, 제네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왜 하필 이런 때에.......”

거동을 못 하는 카렐을 떠올리며, 제네르의 눈앞이 온통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최소한 50일 이상의 시간은 벌었다고 생각했었지만, 날씨가 계속 이렇다면 적은 열흘 이내에 강을 넘어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제 슬슬 결전을 준비해야 함을 깨달았다. 강 건너의 적과, 그리고 카렐에게 병을 옮겨놓은 어떤 세력과.

제롬에게 이번 겨울의 강추위는 양날의 칼이었다. 보급부족으로 시달리는 그의 부대에서 첫 번째 동사자가 나온 것도 이맘때의 일이었다. 물론 정찰 후 귀환하다가 밤에 길을 잃어 얼어 죽었으니 엄밀히 말해 사령관의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찰병에게 제대로 된 방한복과 발열팩을 지급했었다면, 아니 제대로 먹어서 체력만 충분했더라면 동료를 찾아나선 전우들이 그를 찾아낼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료가 얼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사들은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적을 코앞에 두고 강도 건너지 못한 채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느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강을 건너자는 극단적인 의견까지도 나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점점 악에 받혀가면서, 제롬에게는 그들의 이런 분노가 지휘부인 자신들이 아닌, 적에게로 쏠리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 일부가 얼기 시작했다는 보고는 그에게는 정신이 확 들게 만드는 희소식이었다.

그가 선봉대를 맡을 플라칼 가 병사들에게 배식량을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훈련을 재개하라 명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확실하나마 또 하나의 희소식이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입수한 정보지?”

회의장으로 향하던 제롬은 옆에 함께 있는 쿠베의 영상에 조심스레 물었다.

“꽤 오래된 정보원입니다. 지금까지 틀렸던 예가 거의 없으니 90%이상 확신할 수 있습니다.”

쿠베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카렐 놈이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니.......그거 우리 쪽에까지 막 퍼지는 거 아냐?”

“그건 아닙니다. 지난번 예상했던 대로, S혈통에게만 치명적일 뿐 보통 사람에게는 그냥 가벼운 독감 정도로 끝난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리에드 공주와 건연 대군은 며칠 버티지도 못 하고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그 녀석 역시도 이미 죽었든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일 겁니다.”

“그러니까.......카렐 놈도 조만간 그 사촌 꼴이 날 것이다?”

“아마도.”

쿠베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제롬 역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계속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동안 고생만 해 온 그의 연합군에도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미소짓는 것 같았다.

쿠베와의 연락을 일단 끊은 제롬은 이미 장교단의 회의가 한참 진행 중인 막사에 성큼 들어섰다. 장교들은 여전히 이번 강추위와 부족한 보급 문제로 요란스레 설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이제 제롬에게 그까짓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욱리하 결빙은 어때?”

제롬은 입을 열자마자 바로 본심을 드러냈다. 결빙은 곧 도하 공격임을 아는 장교들이 순간 긴장했지만 한참 기분이 들떠오른 제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함께 온 근위대 기술관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이곳에서 10스타디아 정도 북쪽에 자연적인 퇴적층이 있습니다. 게다가 중간중간 작은 바위섬도 있고 해서 그 일대가 부근에서 유속이 가장 느립니다. 결빙도 그곳에서 제일 먼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완전결빙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3일 정도 후면 최소한 3분의 1 정도는 결빙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게 웬 떡이야.”

제롬이 키득거리며 손을 비볐다. 이번 강추위가 이토록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잘만 하면 우기와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황도 공략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카렐의 죽음과 발맞춰서.

“아무래도 강 중심부가 가장 늦게 얼 테니 배를 그곳에 투입해 반대편 결빙 지점까지 실어 나를 수 있을 겁니다.”

“적은 기병 위주니 얼음 위까지 나와 맞설 수는 없을게야. 보병만으로 붙으면 우리도 충분히 승산이 있거든.”

제롬이 이번 작전을 위해 주류성에서 다시 불러들인 헤즈 플라칼 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간 주류성 밑에서 적군을 견제하며 비교적 편한 날을 보내던 플라칼 가 총사령관 헤즈는 이번 공략에 불려온 것이 불만인지, 아니면 자신의 가문 병사들이 이 위험한 공격에 동원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 계속 뚱한 표정이었다.

“케세크 놈이 죽은 게 정말 아깝군.”

케세크의 빈자리를 절감한 제롬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런 과감한, 아니 위험천만한 공격의 지휘관 감으로는 단순무식한 케세크가 제격이었지만 얼마 전 사르키스의 손에 죽었으니 그로서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워낙 자존심이 세고, 다른 가문 무장들의 지휘에는 잘 따르지 않는 것이 플라칼 가 병사들이다보니, 그도 어쩔 수 없이 헤즈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헤즈는 과감성이라는 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었지만, 죽은 케세크에 비하면 앞뒤를 잴 줄 아는 똑똑한 인물인데다가 가문 적장자의 신분이었다. 그렇다보니 상부의 명령보다는 가문의 이해득실을 먼저 따진다는 것이 제롬의 마음에 은근히 걸렸다.

“예보관들 말이 적어도 5일 후까지는 지금 같은 강추위가 계속될 것이라 합니다. 그 사이에 현재 있는 선박에 쇄빙장치를 설치하고 병사들의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려야겠습니다.”

“그 뒤로는?”

제롬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약 5일 정도 따뜻한 날이 계속되다가 다시 강추위가 반복될 겁니다. 다음번 주기에 도하를 감행하시면 훨씬 더 좋은 상황에서.......”

“아냐, 아냐, 기회가 왔을 때 저질러야 돼. 날씨라는 건 믿을 게 못 되거든.”

제롬이 손가락으로 헤즈를 가리켰다.

“5일 후, 하루 중에 가장 추운 때가 새벽이니까 얼음이 최대한 두터워진 아침 무렵에 도하를 시작하겠다.”

“알겠습니다.”

헤즈가 못내 내키지 않는 듯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하 후에는 따뜻한 날이 계속된다니까 그때 공성전을 벌이면 돼. 일단 도하만 성공하면 탄현성을 통해서 육로 보급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나머지 겨울을 따뜻한 황도에서 보낼 수 있다. 알겠나?”

제롬이 혼자 박수를 짝짝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지 장교단들도 마지못해 일어내 그를 따라 박수를 쳤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힘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 플라칼 가 장교단임을 제롬 역시 눈치 채고 있었다.

“이번 선봉대가 될 플라칼 가 모든 장병에게는 우리 델루지 가의 이름으로 2개월분 급여에 해당하는 특별 수당을 지급하겠다. 그리고 적의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디고 본대가 올 때까지 버티어낸 용사에게는 50년분 급여에 해당하는 포상금과 2계급 특진, 비엔의 고급주택, 노예 10명을 포상으로 내릴 것이니 모두 명심하도록!”

제롬의 이런 파격적인 조건에도 플라칼 가와 세닉 가 장교단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지금껏 그 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이런 크고 작은 포상을 받은 사람도 여럿 나왔지만 그들의 발밑에는 그보다 수백 배는 될 동료들의 해골탑이 있었다. 그동안의 전투에 지친 플라칼 가 용사들에게는 이젠 ‘포상 따위’의 약발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그들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제롬은 들고 온 희소식을 이제 공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사실 진위를 조금 더 확인한 후, 카렐 놈이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때 공개할 생각이었지만 자꾸만 처져가는 분위기를 다잡으려면 그만한 것이 없을 성 싶었다.

“저 아케메니아의 가짜황제 카렐은 이미 저세상 사람일 테니 아무 걱정할 것 없소.”

“예?”

제롬의 청천벽력같은 발언에 장교들이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는 황족에게만 감염되는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거라고 하오. 지난번 리에드 공주와 건연 대군을 죽인 독감 말이요. 믿을 만한 정보니 전군에 이 기쁜 소식을 당장 알리도록 하시오.”

느닷없는 선언에 회의장 안이 갑자기 왁자지껄해졌다. 거짓정보가 아니냐며 바로 의심을 드러내는 무장들도 있었지만 전쟁이 생각보다 훨씬 싱겁게 끝났다며 껄껄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어쨌든, 장병들에게 활력을 되찾아준다는 제롬의 생각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자자, 각자 위치로 돌아가.”

회의가 끝난 후, 장교단을 이끌고 나서던 헤즈는 제롬의 뒤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제수씨, 릴라크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 역시 다른 플라칼 가 무장들처럼 피로에 지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까 했던 헤즈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아마 저 제수씨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는 장교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출정 전 종가에서 있었던 마지막 술자리를 떠올렸다.

그 때는 이젠 적에게 가 버린 베아트릭스도 있었고, 첫 번째 전투에서 죽어버린 세베토 경, 마랄루에서 죽은 웰시 경, 그리고 얼마 전 죽은 케세크도 그곳에서 껄껄대며 웃으며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지금껏 많은 가문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어갔지만, 이번처럼 많은 숫자의 유능한 무장을 한 번에 모두 잃어보기도 처음이었다.

“다 가고 릴라크하고 히르직스만 남은 건가......”

헤즈는 새삼스레 무력감을 절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5일 후, 이곳 강물이 피로 물들기 전에 실컷 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렐이 죽었든, 아니든, 플라칼 가가 첫 번째 칼받이를 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강물을 사이에 둔 짧은 평화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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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차분하게 이어졌던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는 이번 편으로 끝을 맺습니다.

다음으로는 '욱리하 도하전'을 시작으로 작중 최대규모의 공성전이 벌어지는

'파트4. 떡갈나무처럼'

이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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