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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74화 (473/1,132)

< -- 474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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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리하 도하를 겨우 하루 앞둔 날 밤, 제롬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회의실도, 병영도 아닌, 식량창고였다. 돔(Dome) 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천막은 웬만한 연병장 규모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지만 지금은 거의 비어있었다.

“내일 실패하면 끝장이군.......”

제롬은 긴장된 가슴을 달래려 애썼지만 거의 바닥에 깔리다시피 한 식량재고 앞에서 그도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4일 전, 그의 도하계획 발표 직후 두 번째 보급선단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절반이 조금 못되는 배를 적에게 빼앗기거나 강물 속에 수장시킨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식량 역시 이곳에 있는 30만의 대군이 고작 3,4일 정도 버틸 양이 고작이었다.

공격을 앞두고, 선봉에 설 플라칼 가의 장병들에게 급식량을 이전처럼 환원시키면서 그나마 부족하던 재고량은 더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 유지되고,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더 이상의 식량 보급이 끊긴다면 30만의 연합군은 5, 6일 후면 개인별 비상식량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 판이었다.

그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번에는 빈 배를 육상의 수송대와 함께 전진시키는, 나름대로 변칙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는 했지만 이번 도하공격만 성공한다면 다 필요 없는 짓이었다.

“오늘밤 제대로 자긴 틀렸군.”

제롬이 힘없이 중얼거리며 돌아서서 창고를 나섰다. 참모들과 함께 병영을 걷는 그에게 야간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경례를 붙였지만 제롬은 하지 말라며 손짓을 보냈다.

“몸이나 녹이고 있어.”

제롬은 스스로를 무척이나 자상한 지휘관으로 여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은 강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하나같이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그나마 저들이 지금 입고 있는 방한복도 바깥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돌아가며 입다보니 어떤 놈은 너무 작아서, 어떤 놈은 너무 커서 조금은 꼴사나운 모습들이었다. 지금 연합군에게 식량만큼이나 부족한 것이 방한복이다 보니 별 도리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내일 공격에 동원될 플라칼 가와 세닉 가 병사들도 1진 병사들 외에는 방한복 없이 이 추위를 몸으로 버티어내며 공격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얼굴도장이라도 찍어둘 겸, 내일 전위대로 출발할 세닉 가 투창병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그의 모습에 투창병단 사령관과 세 명의 연대장들이 급히 달려 나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롬은 그들 중, 제일 말끔하게 생긴 한 청년에게 문득 시선을 주었다.

“이번에 자네 연대가 나간댔지?”

제롬의 물음에 그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최고제후님. 제가 지휘하는 3연대가 이번 공격의 전위대로 나가게 됩니다.”

제롬은 그 청년의 말끔하고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며 내심 ‘누가 세닉 가 핏줄이라고 안 할까봐.’라며 내심 조소를 퍼부었다.

“황족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용감히 싸워주게나. 에우테르 대군.”

제롬이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씽긋 웃음을 지었다. 그 청년, 레곤 대공주의 막내아들인 에우테르 세닉 리쿠 대군은 인질인 자신의 신세가 떠올랐는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사오시안트에 누나 건연과 함께 인질로 잡혀 있었던 그는 건연이 독감으로 쓰러진 직후, 위험한 그곳을 떠나 원래 있던 투창병단 3연대장 신분으로 다시 와 있었다. 가뜩이나 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예르마크 경은 딸 루이제에 이어 막내아들까지 전장에 투입된다는 말에 펄쩍 뛰었지만 제롬은 본대와 떨어진 이암성에서 따로 대군을 거느리고 주둔중인 그에게 아직 의심의 눈길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내 가능한 자네는 전장에 내보내지 않으려 했으나.......”

제롬이 조금 불만스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투창병단의 3개 연대 중 나머지 2개 연대는 어찌 보면 이번 전투만큼이나 중요한 보급부대 호위임무 때문에 따로 불러낼 수가 없었다. 이번에 에우테르의 연대가 동원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번 공격의 전위대를 맡았으니 황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에우테르 대군이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그놈이 죽었을까.......”

세닉 가 병영을 나선 제롬은 문득 욱리하 너머 황도 쪽을 쳐다보았다.

지난번 ‘공개’ 이후, 적진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세작들의 보고에 따르면 적군은 틀림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카렐은 여전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래, 맞아. 이미 죽은 게 틀림없어.”

제롬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참모들과 함께 강변으로 향했다. 매사 활동적이던 카렐이 밑의 병사들이 이 정도로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쁘지 않군.”

제롬은 꽁꽁 얼어붙은 강물 위에 처음으로 서 보았다. 강물 위 군데군데에서는 내일의 공격을 위해 엔지니어들이 얼음 두께를 재고, 어느 시점에서 승선, 하선을 해야 할 지를 결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내일이야. 내일 이맘때는 저 건너편에 서 있겠지.”

제롬이 마음을 다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카렐의 와병 소식을 퍼뜨리면서 제롬이 노린 건 연합군의 사기 진작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동맹군의 와해 여부가 더 중요했다. 적에게 일부러 생포된 몇몇 포로들, 그리고 황도에 남아있던 세작들을 통해 이 소식은 삽시간에 황도 전역과 동맹군 장병들 사이에도 퍼져나갔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나타나 몸소 아침 조회를 열던 황제가 며칠 전부터 나타나지 않은 데 의아해하던 황도와 욱리하 주둔군들에게 이 사실은 더더욱 충격이었다.

“내가.......곧.......죽는다고?”

투명한 큐비클 안에 누워있던 카렐은 제네르의 다급한 보고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혈관에 인공 면역제제를 투여하던 니사는 눈동자를 힐끔 움직여 제네르와 그 뒤에 말없이 서 있는 밀리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며칠만에 이곳에 든 밀리타는 지금쯤 다 죽어가고 있을 줄로 알았던 카렐이 비교적 성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광경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함께 있던 네페티는 고열로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연신 얼음팩으로 식혀주고 있었다.

카렐이 보고서를 읽으며 잠시 키득거렸다.

“글쎄.......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최소한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카렐이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주치의 니사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라말라 박사가 명의는 명의인 모양이야.......특별히 나아지지는 않지만 언젠가부터 아주 심각하게 나빠지지도 않았거든.......신경외과 의사라더니 내과에 한눈을 더 많이 팔았나.”

“소인의 능력이 아니라 소인이 쿠트라스에서 가져온 훌륭한 약제 때문이옵니다. 1년 전 저희 교단 내과의들이 개발한 면역제제이옵니다. 부작용이 좀 있지만 폐하라면 충분히 견뎌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사용했사옵니다.”

니사가 밀리타 들으라는 듯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카렐은 찢어지는 듯 기침을 했다.

“자네가 지난번 남부에서 내게 놓아준 것도?”

“그렇습니다. 함께 썼던 진통제도 임상실험중인 것이었습니다.”

“어쩐지, 효과가 완전히 다르더구만.”

무어라 더 말하려던 카렐은 또다시 터져 나온 기침 때문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우리 병사들이 많이 흔들리고 있겠군.”

겨우 기침을 멈춘 카렐이 제네르에게 물었다.

“예, 폐하께서 한시바삐 모습을 드러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저 가벼운 감기로 쉬시는 중이라고 공표하고 폐하의 성명 영상을 공개해 수습하는 게.......”

“아냐, 아냐.......이렇게 아파서 골골대는 거 보여 봤자 좋을 거 없어.”

카렐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가벼운 감기 때문에 쉬는 것이라고만 발표해.”

“하지만 그 정도로는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적들이 꽤 구체적인 정보까지 흘려서.......”

“그래그래, 그건 알았으니까.......그냥 감기라고만 해. 내 따로 생각이 있으니까.”

카렐이 끓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통스러운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제네르는 무어라 더 따지고 싶었지만 카렐의 상태를 보아 더 이상 말을 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믿고 싶어 하는 걸 골라서 믿는 법이야.......적들도 그럴 테고.......어느 순간에 그 믿음을 깨버리느냐가 중요한 거고.......”

카렐이 침대에 누우며 짧게 덧붙였다.

“그, 그렇군요.......”

그제야 카렐의 뜻을 깨달은 제네르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제네르를 따라 카렐의 처소를 나서던 밀리타는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자리에 멈춰 선 그는 손을 닦으며 뒤따라오고 있는 니사에게 잠시 사나운 눈길을 주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던 ‘대응책’이 고작 이런 거였습니까?”

니사가 비웃듯이 물었다. 밀리타는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구르베스 아가씨를 너무 얕보셨더군요.”

“......”

“저쪽에 저분의 와병 정보를 흘린 것도 아마 당신.......아니, 아스탈의 소행이겠죠? 왜요? 이분이 그렇게 두려우셨습니까? 양쪽을 동시에 몰락시키려 했는데 모두 뜻대로 풀리지 않으니 당황하셨나요? 일단 이분이라도 쓰러뜨리고 다른 계획을 도모하시는 모양이죠?”

“닥쳐.”

할 말이 없어진 밀리타가 괜한 신경질로 감정을 대신 드러냈다.

“네년이 면역제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하, 어렵지 않았습니다. 150년 전, 저분께 팔찌를 설치할 때 저도 함께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잊으셨나요? 니딘투벨 녀석이 팔찌 암호작업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저분의 혈액샘플과 줄기세포를 몰래 채취했죠. 만일을 대비해 예비용 혈액과 항체 클론을 잔뜩 만들어 두었습니다.”

“......”

“병을 치료는 못 하지만 저 상태로 아직 수십 일은 더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당신들의 계획은 벌써 어그러졌죠.”

니사가 밀리타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가며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밀리타가 이에 질세라 저주섞인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래.......네년이 우릴 수십 년이나 속이고 이중첩자 행세를 했었지. 하지만 넌 오르마즈도 생명을 구차하게 질질 늘려 놓기만 했지 결국 살리지는 못했어.”

‘오르마즈’라는 말에 조금 전까지도 웃음 짓던 니사의 표정이 순간 확 굳어버렸다.

“그분은 그 병 때문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습니다.”

니사가 이를 갈며 밀리타를 노려보았다. 밀리타 역시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어차피 죽을 걸 베흔 놈이 일찍 끝내준 것뿐이야. 저놈도 며칠 더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그놈처럼 죽을 거야. 저 강 너머에 있는 똑같은 바보 아들놈 손에. 운명은 이렇게 반복되는 거지.”

“아뇨.”

니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저분은 그때의 오르마즈님보다 훨씬 강하십니다. 그리고 스메르디스 당신도 그때의 당신이 아니고요.”

니사가 다시 씽긋 웃었다.

“오르마즈님이 돌아가시고 당신이 숨어서 울어야 했다는 걸 잘 압니다. 당신 역시 의사시죠? 모든 걸 당신의 공으로 돌려드릴 테니 저분의 치료제를 빨리 내놓으시는 편이 현명할 겁니다. 저분께서도 당신의 공훈을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보답해 주실 지도 모르죠.”

니사의 두 번째 설득에 밀리타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니사를 그대로 놔둔 채 뒤로 휙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니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년이 언제까지 강한 척을 하나 두고 보지.”

니사를 놔둔 채 숙소에 돌아온 밀리타는 방문을 닫기가 무섭게 입을 싸쥐었다. 지난 며칠간 꾹꾹 눌러놓았던 눈물이 갑자기 솟구쳐 올랐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 잠시 눈물을 삼키던 그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짐가방에 다가갔다.

“이러려는 게 아닌데.......왜 난.......”

가방 앞에 꿇어앉은 그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입술을 꽉 악물었다.

“빌어먹을 이라즈 그 새끼........그놈만 아니었어도........”

잠시 혼자 흐느끼던 그는 가방을 열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저온 보관함을 집어 들었다. 그 투명한 상자 안에는 여러 빛깔의 작은 주사약병 50여개가 가득 들어있었다. 바로 자신을 위해 마련해 온 백신과 치료약이었다.

“이까짓 거........”

상자를 쥔 밀리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한참을 갈등하던 그는 결국 상자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어야 했다.

“아버지.......왜 그렇게 가셨나요.......”

밀리타는 결국 바닥에 엎드리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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