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76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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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리하 동쪽에 주둔하던 동맹군은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 여명 너머 유난히 크고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장교들의 언질과 지난 며칠간 보여 온 적들의 동향에서 어차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그 거대한 형상에 병사들도 딱히 놀라거나 허둥대지는 않았다. 적의 ‘도하 지점’을 확인한 동맹군들 역시 적에게 대항해 새벽부터 서둘러 위치를 정렬하고 있었다.
“강안에서 1스타디아 지점의 얼음두께는?”
이번 전투에서 총사령관을 맡은 페로의 첫 질문이었다.
“15촌(45cm) 정도입니다. 중장갑을 차려입고 뛰기에도 충분한 두께입니다. 상륙이 예상되는 10스타디아 밖의 두께는 5촌(15cm) 정도입니다. 오랫동안 조금씩 두꺼워진 얼음이라 강도는 꽤 높습니다.”
서부 사역병단 장교의 대답에 페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밀집 대오를 이루기도?”
“5스타디아 밖 정도면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기병도 그 정도까지 분산 기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밀집 돌격은 어렵겠지만.”
페로의 이맛살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3만 6천 대 30만이라.......거 재밌는 싸움이군.”
평소 대담무쌍하던 페로답지 않게, 이번 싸움에는 그도 걱정이 서린 기색이 역력했다. 지형적인 이점이 있다손 쳐도, 이번 전투는 개전 이래 가장 큰 병력 수 차이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3천의 유목민 중기병하고 서부 사역병단도 있으니 4만으로 정정하시죠.”
베아트릭스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의 말대로, 강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건 동맹군 4만이 전부였다.
“어젯밤에 탄현성에서도 근위대 2만 5천이 출발했다지?”
“예.”
베아트릭스가 짧게 대답했다.
“양면공격을 노리고 있는 것이겠죠. 하크로딘 상장군이 아메샤 스펜타하고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출동했지만 워낙 평야지대라 저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저들을 빨리 물리치지 않으면 큰 낭패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페로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의 전투는 2곳에서 동시에 벌어질 예정이었다. 이곳 욱리하변에서 페로와 베아트릭스가 이끄는 4만의 병력이 상륙해오는 적 연합군을 막아내는 것이 일단은 ‘주된 전투’였다. 그리고 한편 동쪽의 샤마시 평원에서는 제네르가 이끄는 아메샤 스펜타 1만과 5천의 기병대 연합병력이 욱리하의 아군 후미로 접근해 올 근위대 원정군을 찾아내 차단할 임무를 지고 있었다.
욱리하의 이번 방어선은 중앙이 특별히 두터웠다. 중군에서 강과 바로 맞닿은 제1선에는 5천의 동부 투창병들이 파비스 방패 뒤에 몸을 감춘 채 사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들 바로 뒤에는 5천의 슬레이프니르들이 역시 투창으로 적에게 사격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줄에는 1만5천의 동맹군 3군단 보병대가 마지막 최후의 저지선을 만들고 중군의 3중 라인 제일 끝자락을 이루고 있었다.
페로가 맡은 중군에 비하면 베아트릭스가 맡은 양익은 철저하게 기동성과 충격력을 극대화한 배치였다. 미끄러지지 않는 얼음신을 신은 거구의 에키트 보병들이 이미 얼음 위에까지 나와 적들을 쳐다보며 피의 난장판을 애타게 기다렸고, 그 뒤에는 5천의 슈로 기사단이 베아트릭스의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전장 주변의 강가에는 얼마 전 보강된 3천의 유목 중기병대가 강 주변에 흩어져 적 소부대 처리와 감시임무를 맡고 있었고, 가장 후미의 강둑 위, 높은 지점들에는 서부사역병단의 자랑, 발리스타 70여대가 적의 접근만 기다리며 포격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바람이 무척 차군요. 다행히도.”
베아트릭스가 거센 강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워낙에 추운 사막 출신답게, 그는 이 추위 속에서도 털망토 하나 두르지 않은 채 갑주 위에 ‘슬레이프니르 단장’을 상징하는 검은 망토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탈라스 출신인 에키트 족 전사들들 역시 이 매서운 추위, 그리고 그들이 ‘신과의 교합’이라며 신성시하는 ‘전투’를 앞두고 잔뜩 들뜬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 야만족들의 앞에는 이번에 새로 부임한 에키트 경보병 1대대장 베레트라 알부르즈 교위가 평소 쓰던 얼룩진 전투망치를 든 채 병사들과 함께 히죽대고 있었다. 동료 타슈카 라코타와 함께 이암성 서성을 끝까지 사수한 공으로 1계급 특진했던 그는 그곳에서 이 야만족들에게 푹 빠져버렸는지, 그동안 있던 북부보병대를 박차고 나와 이 부대의 대대장으로 자리를 옮겨버린 터였다.
그러더니 하고 있는 모양까지도 그새 휘하의 야만족들과 거의 구분 못할 지저분하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저네들은 무슨 축제라도 하는 것 같군.”
신경이 곤두서있던 페로는 에키트 족들을 쳐다보며 괜한 짜증을 부렸다. 베아트릭스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가뜩이나 병사들 사기도 좋지 못한데 저놈들이라도 축제 분위기니 그나마 다행이죠.”
페로가 입술을 꾹 다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베아트릭스의 말대로, 에키트 보병대를 빼면 동맹군 전체의 사기가 바닥이었다. 카렐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에 북부 병사들은 ‘그러면 우리가 뭣 하러 종군하냐’며 불안해했고, 서부 병사들 역시 ‘하루라도 빨리 학장님을 새 황제로 옹립하는 게 맞지 않냐’며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되살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걱정과 불만이 쌓이면서, 동맹군 사이에서는 조금씩 불협화음이 생기고 있었지만 카렐은 이들에게 아직 모습을 보여주지조차 않았다.
새벽의 어슴푸레함과 물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멀리 강물 너머 ‘시커먼 형상’의 정체가 조금씩 또렷해져갔다. 거대한 바지선 30여대, 그리고 작은 뗏목과 보트 수백여대가 건너편에 총 집결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빙판 위에서 기병의 기동은 아무래도 위험성이 높으니 놈들의 공격 1진은 투창병과 중장보병이 될 거다. 발리스타의 절반은 보병을, 절반은 배를 맡고 우리 기병은........”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페로는 갑자기 말을 딱 멈추었다. 강 남쪽, 황도가 있는 곳에서 2백여기의 기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베아트릭스가 이마를 붙들었다. 기병 무리의 선두에 있는 거대한 검은빛 깃발에서는 금빛 용, 그리고 황소의 머리 모양을 한 철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로 그 행렬에 황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황제기(旗) ‘다라프시 카비아니’였다.
그 우렁찬 기병들의 말굽소리에 놀란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같은 시간, 강 반대편에서 적들의 상륙 선단이 출발했지만 병사들은 지금 그곳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폐하께서 이곳에 오신다!”
누가 제일 먼저 외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남쪽 대오의 슈로 기사단에서 시작된 고함소리가 마치 물결치듯 수십 스타디아 떨어진 북쪽 대오까지 빠르게 일렁였다.
“친정(親征)이다!”
격앙된 북부 병사들이 창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우렁찬 고함으로 이 강변을 마치 지진처럼 뒤흔들었다.
“설마.......폐하께서 그 몸으로.......”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다라프시 카비아니를 쥔 카토를 선두로 달려오는 저 기병들은 틀림없이 카렐을 호위하는 가디언 근위기병대였다. 그리고 깃발의 바로 뒤에는 금색 자수가 화려하게 놓인 검은 망토를 펄럭이는 장신의 무사가 검은 말 ‘시알피’에 앉아 있었다. 그 위, 어깨에 얹힌 두툼한 흰색 모피가 거센 겨울 찬바람에서 알량하나마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황상의 행차이시니 모두 꿇을지어다!”
선두에 선 카토의 고함소리에 이미 대오를 갖추고 있던 4만여의 병사들이 마치 물결치듯 남쪽부터 북쪽까지 차례대로 꿇어앉는 광경 또한 장관이었다. 페로를 비롯한 무장들 역시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가슴을 손에 가져가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폐하십니까?”
보다 못한 베아트릭스가 재빨리 그곳에 합류해서는 시알피에 바싹 다가갔다. 내심 설마설마 했지만 검은 망토 안쪽에서 반짝이고 있는 건 틀림없는 그레이오팔 눈동자였다. 그의 바로 뒤에는 흰 망토로 얼굴까지 모두 가린 주치의 니사가 함께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폐하의 뜻은 알겠사오나.......”
“황제로서 나를 지키지 못한다면........죽음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소.”
마스크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탁하게 들렸다. 카렐은 자신의 망토라도 벗어 덮어주려는 베아트릭스에게 하지 말라며 손을 저어 보였다.
“이리 줘.”
그는 ‘다라프시 카비아니’를 한 손에 낚아채서는 번쩍 치켜들고 동맹군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으로 뒤덮인 강변을 가로질러 대오를 이룬 병사들의 앞을 무섭게 질주했다. 비록 마스크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고작 ‘가벼운 감기’에 걸린 황제가 마스크를 하는 것 정도를 이상하게 여길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바람에 벗겨진 망토 후드 안쪽으로 어느새 꽤 길어진 적갈색 머리칼이 깃발과 함께 흩날렸다. 이마에 드리워진 백금 서클렛과 용이 새겨진 사파이어 장식은 감히 황제 외에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오의 남쪽 끝부터 북쪽 끝까지, 우렁찬 함성과 환호성이 깃발을 든 황제의 질주를 따라 파도치듯 울렸다.
“친정이다! 폐하의 친정이다! 우리 부대의 가치를 보여드릴 때다!”
사방에서 사관들과 하급 장교들의 악을 쓰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황제가 직접 전장을 지켜보는 ‘친정’은 야심만만한 무장들, 그리고 자부심강한 부대에는 ‘명예와 출세’를 걸고 벌이는 거대한 시험장이었다.
2백여 기병들과 함께 대오의 남북을 가로질러 달린 카렐은 다시 중군 선봉의 지휘부로 돌아와 깃발을 높이 치켜들어 ‘대기’ 명령을 내렸다. 사방에서 울리는 함성 때문에 지금 그가 무어라 말한다 한들 들릴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카렐이 그것을 노리고 이번 ‘쇼’를 벌인 것이기는 하지만.
카렐은 행여 함성이 작으면 가디언 근위기병들에게 먼저 함성을 지르라 말해두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귀가 떠나갈 듯 시끄러웠다.
카렐은 옆에 있는 페로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해진 것을 눈치 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 했다. 따라온 가디언 기병들이 카렐의 주변에 사람 키 정도 높이의 긴 비단천으로 장막을 빙 둘렀다. 물론 주변 병사들의 눈길에서 카렐을 가리려는 것이었지만 병사들은 그저 황제의 위엄을 세우기 위한 다소 요란스런 장식물 정도로나 생각할 터였다.
“본대 20스타디아(3km) 전방! 적들이 입수합니다!”
그때, 전위대로 있는 동부 투창병 쪽에서 제일 먼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얇은 얼음을 깨고 강안에 최대한 접근한 적 수송선에서 수천의 병력들이 이 살을 베어내듯 차가운 강물 속에 떠밀리듯 뛰어들고 있었다.
“빨리! 빨리 들어가! 최대한 빨리 상륙해!”
작은 추진 장치가 달린 도하용 조끼를 입은 연합군의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은 악을 쓰며 몸을 움직여 앞으로 헤엄쳤다. 움직임을 멈춘다면 당장이라도 체온을 잃으며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사이, 발리스타에 당할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소형 보트들은 전위대로 상륙할 세닉 가 투창병단을 한가득 싣고 살얼음이 낀 강변에 최대한 빨리 돌진했다.
“전진! 전진!”
병사들과 함께 헤엄치는 하급장교들이 팔을 저으며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몇몇 약한 병사들은 물에 뛰어들자마자 바로 심장발작을 일으키거나 다리에 쥐가 나면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들을 구해 줄 배는 없었다. 병사들을 물에 쏟아놓은 수송선은 2진 병사들을 싣기 위해 바로 선수를 돌렸다.
“뭐야! 뭐야!”
선수를 돌리던 배 중 몇 척이 당황하며 자리를 맴돌았다. 배가 선수를 돌리기가 무섭게, 그 뒤를 쫓아온 웬 보트 한 대가 바지선 중 한 대와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동맹군들이 미리 띄워놓았던 인화물질 ‘자폭 선박’에 당한 첫 번째 불운한 배였다. 충돌 직전 물 속으로 도망친 자폭 선박의 선원들이 다른 배로 옮겨 타며 손을 치켜들고 환호성을 지르는 광경이 보였다. 불붙은 배는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돌아갈 데도 없다!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 가!”
물에 던져진 병사들에게는 물에 빠져죽던지, 아니면 이 차가운 물을 헤엄쳐 적들에게 무작정 돌진하던지 오직 두 가지의 선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적에게, 그리고 자신들을 이런 곳으로 내몬 지휘부에 저주의 폭언을 퍼부으면서 필사적으로 물을 갈랐다.
“저 새끼들 미쳤나!”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쪽의 예상은 저들이 수송선에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 얼음이 두꺼운 강안에 최대한 접근해 상륙하는 것이었고, 저들이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온다는 것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병사 대신 배를 살리자는 수작인가. 발리스타 사정거리 바로 바깥에 내려놓다니 나름대로 머리는 썼군. 훗, 그래도 우리 보트에 당하기는 했지만.”
페로가 여전히 밋밋한 목소리로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뒤이어 카렐의 잔뜩 쉰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상관없어. 계획대로.......얼음 위 안전지대를 우리가 선점한다.”
“........알겠습니다.”
페로가 잔뜩 불만어린 표정을 애써 감추며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키트 보병대가 전위가 되어 상륙하는 적을 치고.......북부보병대는 강안에서 3스타디아 지점에 대기한다. 학, 학......”
힘겨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카렐의 손을 베아트릭스가 살며시 잡아주었다. 카렐은 말 위에서 잠시 휘청거렸지만 주변을 에워싼 가디언 기병들과 비단장막 덕택에 바깥에서 눈에 띄지는 않았다.
카렐은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천천히 앞으로 기울였다.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라프시 카비아니’를 통해 내려진 명령에 이미 격앙되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악 소리를 지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순간, 후미 언덕에 있는 발리스타 발사대가 거의 폭음에 가까운 굉음을 울리며 70여발의 불붙은 발리스타를 동시에 하늘로 날려 올렸다. 사방으로 불꽃을 뿜는 그 육중한 불기둥은 검고 긴 연기꼬리를 아직 채 밝지도 않은 새벽하늘에 그리며 바람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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