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77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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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후방에만 서던 헤즈 플라칼 장군답지 않게, 그는 상륙 1진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도착해 있었다. 이번 상륙전의 지휘를 맡은 그는 얼음물 속을 필사적으로 헤엄쳐오는 자신의 가문 병사들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애로움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작전에 따라 교전하다가 병사들이 죽는 것과, 다른 가문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격에서 동원되어 개죽음당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 와중에도 물에 빠진 병사들의 공격을 위한, 아니 살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기운이 빠진 병사들이 무수히 강물에 떠내려갔고, 적과 마주치기도 전에 이미 탈진해 축 늘어진 병사들이 강물 곳곳에 둥둥 떠 있었다.
“빌어먹을, 제롬 새끼.”
그는 평소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쿠키를 한 움큼 꺼내 입에 쑤셔 넣었다.
그와 함께 보트에 오른 건 30여명의 세닉 가 투창병단 지휘부였다. 2백여대의 보트와 급조한 뗏목에 분승한 3천여 투창병들에게는 헤엄쳐 건너오는 플라칼 가 병사들이 무사히 얼음 위에 오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처럼 이 얼음물에 뛰어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찌 보면 이들에게는 그나마 축복이었다. 최소한 지금 당장으로서는.
헤즈는 옆에 앉은 투창병 연대장 에우테르 대군, 아니 에우테르 세닉 리쿠 중랑장의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마도 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이 전장에 나오기 싫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곁에는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3명이나 되는 근위대 가디언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보트는 얇은 살얼음을 깨며 그나마 체중을 실어 디딜 수 있는 두꺼운 얼음 쪽으로 최대한 서둘러 접근했다. 이 와중에도 하늘에서는 발리스타가 무수하게 내리꽂혔지만 이 작은 보트들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잠시 후, 쿵 하는 울림과 함께 보트에 오른 병사들의 몸이 일제히 앞으로 쏠렸다.
“상륙한다!”
연대장 에우테르가 손을 앞으로 향하며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5스타디아 전방까지 전진! 전진! 중장보병대가 상륙할 자리를 만들어라! 여기는 위험하니 밀집하지 말란 말이다!”
얼음바닥을 처음 디딘 투창병단 하급 장교들이 조금씩 흔들리는 얼음에 기겁을 하며 병사들을 재촉했다. 일선 장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연대장 에우테르까지도 이번만은 모두 자신의 다리와 발로 체중을 버티어야 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투창, 그리고 전면에 설치할 파비스 방패, 기병을 막기 위한 창까지 모두 어깨에 짊어진 채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리스타! 발리스타다!”
보트 쪽에서 찢어지듯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불붙은 발리스타 몇 발이 정지한 배에 명중하면서 운 없는 투창병들 수십이 불꽃과 파편 속에서 갈가리 찢겼지만 아직 그다지 안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발리스타의 유효사정거리 경계 부근이어서인지, 포격의 상당수는 배가 아닌, 얼음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전진! 전진! 빨리 달려가!”
장교들, 병사들이 악을 쓰며 서로를 재촉했다. 반대편 강안에서 출발한 동맹군측 투창병단과 북부보병대, 에키트 보병대는 강안에서 가까운 단단한 얼음층 위를 이미 확보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기병들은 조금 뒤쪽에 적당한 간격으로 흩어져 있었다.
“적 전면 1스타디아까지 접근해서 3열 횡대를 이룬다!”
지난 수십일간을 굶주리며 지내 온 연합군에게 지금 남아 있는 건 그저 악밖에 없었다. 출발 직전 그들이 서로를 위로하던 말처럼, 그들에게는 굶어죽으나 이곳에서 적의 손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고를 반복한 강의 얼음은 유리판처럼 미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속력을 내 달려가려던 투창병들 중 상당수가 발이 미끄러지며 얼음 위에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그때, 조금 전 발리스타가 떨어지면서 약해진 얼음층 위를 막 디디던 투창병 십여명이 우르르 꺼지며 갈라지는 얼음과 함께 마치 괴물의 주둥이 같은 얼음물 속으로 한꺼번에 빨려들었다.
“살려줘!”
보통의 보병들에 비해 유난히 장비를 많이 짊어진 투창병들은 제대로 헤엄도 쳐 보지 못한 채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짧고 허망하게 저항할 뿐이었다. 강을 헤엄쳐오는 중장보병들에게 지급된 도하용 조끼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너희는 어차피 배로 갈 것이니 조끼 입을 바에는 투창 한 발이라도 더 가져가라’는 제롬의 호통 때문에 미처 입고 올 수가 없었다.
“쳐다보지 마! 모이지 말고 흩어지란 말이야!”
얼음물 속에서 채 2,3분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료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그들도 이번만은 서로를 도울 수가 없었다. 저들을 구하러 이미 균열이 간 얼음 위로 달려든다는 건 자신의 목숨마저 내버리는 것과 같았다.
“발리스타 떨어진 곳에 접근하지 마라!”
장교들이 돌진하는 병사들에게 외쳤지만 워낙 사방에 발리스타가 내리꽂혔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따르기 쉬운 명령은 아니었다.
“조심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리스타가 떨어졌던 남쪽 한구석에서 쩌억 하며 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재빠른 병사들이 얼른 몸을 날려 반대편 얼음 위로 뛰어올랐지만 그럴 정도의 행운이 따라주지 못했던 나머지 병사들 수십 명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음덩어리와 함께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와줘! 도와줘!”
그들은 잠시나마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을 도와줄 보트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얼음덩어리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잔혹한 강물은 이번에도 둔해진 병사들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쪼개지는 얼음의 소름끼치는 마찰음과 물에 빨려드는 투창병들의 비명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중장보병들은?”
투창병들의 사투를 말없이 지켜보던 헤즈가 애타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전위대인 투창병단이 자꾸 꺼지는 얼음과 씨름을 하는 동안 그들 역시 얇은 얼음이 낀 곳까지 도착해 있었다. 탈진한 병사들은 고작해야 한 치 정도 얼어붙은 얼음에도 먼저 뛰어오르겠다며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헤엄쳐 온 뒤로 하얗게 굳은 채 떠내려가는 무수한 시체들이 보였지만 헤즈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4분의 1은.......오는 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앞서 간 투창병단도 비슷한 것 같고......”
참모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헤즈는 짐짓 무표정하게 강 서쪽 건너편, 아군 본진을 쳐다보았다. 1진 중장보병대가 차가운 강물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본진에서는 2진 중장보병대가 조금 전 귀환한 수송선에 다시 오르고 있었다. 최소한 배만이라도 살려 병사들을 계속 쏟아 붓겠다는 제롬의 계획은 어느 정도 들어맞은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적의 발리스타는 앞서 달려가는 투창병들에게 계속 불벼락을 선사하고 있었다.
“투창병들 좀 천천히 나가라고 해. 뒤따라오는 중장보병들하고 너무 떨어졌다가는 저 야만족들이 투창병부터 노리고 덤벼들지 모르니까.”
헤즈가 동맹군 진영에 서 있는 에키트 경보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양측 모두 얼음 위에서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전투다보니 기병은 활용할 수 없었다. 다만 빠른 기동성에 포악함과 힘, 그리고 이런 추운 날씨에 적응력까지 겸비한 저 극지 야만족들이 연합군 측에게는 제일 문제였다.
“적 보병들하고 기병들을 떼어놓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아주 실패는 아니지.”
헤즈는 상황을 애써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다시 쿠키를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대오! 대오!”
그 무서운 얼음의 지옥을 뚫고 적의 앞에 도착한 남부 투창병들이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이곳 역시 완전히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디딜 때마다 발밑을 걱정해야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힘겹게 얼음에 오른 플라칼 가 1진 중장보병들 역시 그들 후미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 동맹군 진영에도 이미 동부 투창병들과 에키트 보병, 그리고 가장 후미에 북부보병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세닉 가의 투창병단을 그대로 모방한 동부의 아우들이 궁지에 몰린 형을 노리는 형국이었다.
사실 동맹군 후미에는 ‘특명’을 받은 서부 사역병단들이 전방의 전투병 대오 뒤에 숨어 몰래 ‘작업’을 진행 중이었지만 지금 다급한 연합군 측에는 그 모든 것을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순간, 동맹군 측의 발리스타 포격이 중단되면서 사방에 잠시 고요함이 번졌다.
“발사!”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직 채 대오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세닉 가 투창병들의 머리 위로 1천여발의 투창 무더기가 순간 검은 그늘을 드리웠다. 순간 놀란 세닉 가 투창병들이 재빨리 파비스 뒤로 몸을 감추었지만 그 틈새를 노리는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 3천의 동부 투창병들은 3개 조로 돌아가며 1천발씩의 투창을 번갈아 공중에 쏘아 올렸다. 같은 투창병인 세닉 가의 노련한 병사들은 이것이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닌, 엄호사격임을 바로 깨달았다.
“한바탕 벌려보자! 전투의 신께서 우릴 지켜보신다!”
생전 처음 듣는 억세고 괴상한 억양의 그 고함소리가 탈라스 원주민들의 것임을 알아듣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큼직한 원형 방패에 도끼 하나씩을 쥔 거구의 야만족들은 막 대오를 갖추려는 세닉 가 투창병단을 향해 괴성을 내지르며 돌격해왔다.
“이, 이런 멍청이들! 얼음 꺼지면 어떡해!”
세닉 가 장교 중 한 명이 바닥을 쾅쾅 울리며 달려오는 적들에게 경고하려는 듯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치 곰발바닥 같은 넓적하고 희한한 신발을 신은 그들은 얼음 따위는 상관도 않는다는 듯 도끼를 공중에 휘휘 저으며 괴성과 함께 계속 돌진해왔다.
“발사준비! 동부 투창병의 사격은 무시해라! 저놈들은 급조된 부대다! 우리보다 정확도도 낮고 위력도 떨어진다!”
일단 침착함을 되찾은 에우테르 대군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아직도 얼음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몰려오는 야만족들에 대한 공포, 그리고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사격까지, 3가지의 두려움과 동시에 마주하고 있었다.
“발사! 간격을 두지 말고 난사한다!”
다급해진 에우테르 대군이 일단 공격명령을 내렸다. 무작정 공격으로라도 일단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잡을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은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다. 돌진해오던 에키트 족 보병들 중 수십 명이 투창에 명중당해 쓰러지거나 방패를 얻어맞은 묵직한 충격에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저 야만족들은 쓰러진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도리어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미친 듯이 계속 달려왔다.
“계속 난사해! 적들에게 시간을 주지 마라!”
에우테르 대군이 직접 1선까지 나와 병사들을 필사적으로 독려했다. 아버지 예르마크 경이 만든 이 소중한 투창병단을 이 전투에서 헛되이 소모할 수는 없었다. 투창병단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오는 적에게서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적들의 돌격을 최대한 늦추려 애썼지만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중장보병들은 언제 오는 거야!”
에우테르 대군이 한 손에 칼을 뽑아든 채 뒤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물러난다면 그들은 다시금 위험천만한 얇은 얼음 위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음에 기어오른 중장보병들이 헐떡이며 그들의 후미에 막 합류하고 있었다. 이미 얼음물에서 많은 병사를 잃었지만 그들의 머릿수는 상대방인 에키트 보병대보다는 조금 많았다. 중장보병 상륙대 2진은 이제야 강물을 힘겹게 헤엄쳐오고 있었다.
“2진 동료들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텨! 적을 물리칠 생각은 말고 밀집해서 시간만 끌어라!”
뒤늦게 도착한 헤즈에게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맹군 보병대의 주력인 북부보병대는 강안의 안전한 얼음 위에서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남부 중장보병들은 뒤로 물러나는 투창병단을 대신해 재빨리 1선을 구축했다. 비록 병사들을 많이 잃었고, 하나같이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일단 1차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돌격!”
전투망치를 공중에 치켜든 에키트 보병대 대대장 베레트라는 직접 선두에 나서서는 남부 보병대 하급 장교 한 명의 투구를 단번에 두 조각으로 쪼개버렸다. 쩍 갈라진 투구 사이로 피와 뇌수가 튀었지만 그의 단말마의 비명소리는 에키트 족들의 괴성에 가려 들리지 조차 않았다.
“씨발! 짓밟아 으깨버려!”
그에 뒤질세라, 하나같이 6척(180cm)이 훨씬 넘는 떡 벌어진 거구의 무사들이 남부 중장보병들의 지친 어깨에 걸려 있던 큰 방패를 몸으로 힘껏 들이받았다. 기운이 남아있던 몇몇 병사들은 이 무서운 돌진에도 필사적으로 자리를 버티어냈지만 상당수의 병사들은 그들의 힘에, 혹은 미끄러운 바닥에 밀리면서 에키트 보병들의 그 큰 신발에 사정없이 짓밟혔다.
“자리를 지켜! 뒷사람이 앞사람을 받쳐주란 말이다!”
짓밟힌 채 도끼에 머리가 깨지며 죽어가는 비명소리, 적들의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지르는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조금씩 밝아오는 아침의 찬 공기를 잔혹하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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