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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79화 (478/1,132)

< -- 479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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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에우테르로부터 균열 소식을 보고받은 헤즈는 크게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중장보병 3진까지 거의 도착해 있었고, 이제 4진이 막 얼음 위로 기어오르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우지끈 하는 굉음이 사방에서 울리며 얼음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하던 균열이 순식간에 반 뼘 정도로 벌어졌다. 그때까지도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중장보병들은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별 것 아니다! 적을 계속 몰아붙여! 어차피 후속병력이 도착할 테니.......”

“상황이 안 좋습니다. 차라리 적 북부보병들이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빨리 퇴각함이.......”

에우테르가 애원하듯 말했지만 헤즈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얼음이 모두 꺼진다 해도 앞으로 밀어붙여 공간을 만들면, 아니 상륙만 하면 일단 목숨을 건질 수는 있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에우테르도 질세라 악을 썼다.

“이곳까지 도착하지 못한 4진 보병하고 후속병력을 싣고 올 배는 어쩝니까! 얼음이 꺼져서 디딜 곳이 줄어든다면 배는 이곳에 더 근접해야 할 테고, 그러면 동맹군 발리스타에 꼼짝없이 배가 노출됩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저 배들은 소모품이었다고!”

헤즈가 버럭 역정을 냈다.

“탄현성에서 어제 근위대 원정군이 출발했어! 일단 상륙만 하면 천 명이 죽든, 만 명이 죽든, 우리는 그네들이 도착할 때까지 여기를 사수만 하면 된다고! 알았나!”

에우테르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헤즈의 말이 틀린 건 아님을 그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하들의 죽음에 너무도 익숙한 백전노장 헤즈와는 달리, 그는 부대 전체가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는 단 한 번도 맞서 본 일이 없었다.

“다 집어치고 4진이나 빨리 합류하라고 해!”

격앙된 헤즈가 후방에 대고 악을 썼다. 바로 그때, 동맹군 북부보병대가 있는 동쪽에서 낮게 깔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거창!”

북부보병대를 이끄는 페로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1만 5천 보병대의 전위 6개 줄의 병사들이 천천히 창을 내려 정면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기하던 양익에 기병들 중 절반 정도까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전진!”

깃발이 앞으로 기울기가 무섭게, 1만 5천의 북부보병들은 그들 특유의 거친 함성을 지르며 2만이 훨씬 넘는 연합군 보병대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밀려나지 마라! 밀려나면 다 죽는다! 전진해! 우리에겐 전진뿐이다!”

헤즈가 조금씩 쪼개져나가는 얼음덩이를 쳐다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 사이 얼음이 쪼개지는 것을 본 4진 보병들이 필사적으로 달려와 이미 꽤 벌어진 얼음 사이를 다급히 뛰어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쩌억 하는 끔찍한 울림과 함께, 연합군 보병대의 뒤에 있던 거대한 얼음덩이는 아직 미처 도착하지 못한 수백의 병사들,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죽어간 천 구가 넘는 시체들을 가득 실은 채 물에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연합군에는 돌아갈 방법조차 없었다.

“사격준비!”

북부보병대를 맞아야 하는 중장보병들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건 슈로 기사단을 맞아야 하는 양익의 투창병 3천이었다. 그들은 마지막을 위해 남겨두었던 3발의 투창을 뽑아들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들은 각자 가져온 창을 발밑에 내려둔 채 자신들을 향해 접근해오는 슈로 기사단의 중장기병들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0.7스타디아에서 한 발, 0.5스타디아에서 한 발, 0.3스타디아에서 마지막 한 발을 쏘고 각자 창을 들어 기병을 저지한다. 알았나.”

에우테르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사격 후에 중장보병대 후미로 피해야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였지만, 이번만은 그들이 기병들의 일제돌격을 직접 막아내야 하는 처지였다. 최소한 강 건너 동부기병대가 건너와 줄 때까지 만이라도.

“병사들이 저 정도면 잘 버티어 주는군요.”

욱리하 건너편, 연합군 숙영지의 탑 위에서 함께 전황을 지켜보던 제롬이 샤자한 공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공의 기병대가 빨리 가서 도와주면 시간을 끄는 데 훨씬 유리할 것 같습니다만.”

제롬이 포구에 막 들어오는 선단을 내려다보며 신중하게 말했지만 샤자한 공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제롬은 그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목소리에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 탄현성에서 근위대 2만 5천이 오고 있습니다. 상륙부대가 오후까지만 버티어준다면 근위대가 저놈들의 뒤를 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전투는 끝입니다. 우리 상륙군이 설사 땅을 밟지 못하더라도 시간만 끌 수 있으면 우리 승리란 말입니다. 그러니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제로의 재촉에 샤자한 공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상륙부대는 소모품이라는 뜻인가요.”

“우리 공평하게 좀 합시다. 지금 저기서 죽어가고 있는 게 누구 병사들이죠? 동부도 밥값을 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샤자한 공의 이기적인 태도에 부아가 돋은 제롬이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전황이 기울기가 무섭게, 샤자한 공은 배를 타기 위해 포구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슈트란 가 기병대를 확 빼버리면서 제롬을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그래놓고는 ‘퇴각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요?’라는 말로 제롬을 인내의 한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다.

“기병들을 빨리 태워야지 뭣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배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애가 타기 시작한 제롬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샤자한 공은 못내 내키지 않는 듯, 그제야 기병들을 다시 불러냈다.

“......저놈들 누굽니까?”

눈썰미가 그다지 좋은 제롬은 아니었지만 샤자한 공의 손짓을 받아 포구에 들어서는 기병들이 방금 전 빠져나갔던 그 부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들의 망토와 깃발에는 슈트란 가를 뜻하는 맹호가 아닌, 재칼이 새겨져 있었다.

샤자한 공이 너무도 태연한 투로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우리 동부기병 아닙니까.”

샤자한 공의 속 보이는 태도에 제롬의 속이 또 한 번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배를 타기 위해 들어오는 기병들은 지난번 가문의 내분으로 부대 이탈 파문을 일으켰다가 중랑장 2명이 처형당하고 슈트란 가에 강제로 배속되었던 2천의 하크로딘 가 기병들이었다.

‘개새끼, 자기네 직속부대는 끝까지 소모품으로는 못 쓰겠다는 건가.’

제롬이 이를 빠드득 갈며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사실 그 역시도 이번 공격에 자신의 델루지 가 병력을 동원할 생각은 없었다보니 피차 매일반이었다.

어쨌든, 이번 ‘위험천만한 작전’을 명받은 하크로딘 가 기병들은 원래 있던 연대장과 중간 지휘관들 수십 명이 처형당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머지 장교들과 하급 사관까지 거의 물갈이가 되어, 이젠 그들의 자리를 슈트란 가에서 온 기병장교와 사관들이 대신 맡고 있었다.

이들 베테랑 동부기병들은 지금 자신들이 소모품 역할로 사지(死地)에 보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샤자한 공이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난번 이탈 시도에 대한 명백한 ‘응징’이었다.

게다가 동부 코라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크로딘 가의 후계권 싸움은 카렐과 손잡고 내분을 일으킨 샤르바누 하크로딘 부인 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는 상황이었다. 샤자한 공은 샤르바누 부인 파벌인 이들 기병대를 내보내 샤르바누 부인에게 명백한 경고의 의미를 보내려는 속셈임이 뻔했다.

게다가 이들 뒤에 대기하고 있는 2진 기병들 역시 하크로딘 가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그나마 이탈 파문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덕택에 1진이 되는 불운만은 피할 수 있었다. 기병들은 나귀에 실린 보급투창 수백 꾸러미와 함께 말을 몰고 흔들리는 배 위에 차례대로 올랐다. 배가 흔들리면서 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잠깐이었다. 어쨌든 전선에 풀어놓으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싸워야 할 테고, 시간은 끌 수 있을 테니.

같은 시간, 양익의 투창병단 전방을 향해 돌진해오는 2천여 슈로 기사단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그들 중 100기가 넘는 기병들이 투창 사격에 낙마하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졌지만 투창병들이 마음 놓고 투창을 던질 수 있는 기회는 고작 3번에 불과했다.

“거창! 거창! 기병을 막아!”

하급사관들과 지휘관들이 사방에서 악을 쓰는 가운데, 병사들이 발밑에 내려놓았던 창을 허겁지겁 들어 기병들의 앞에 겨누었다. 하지만 그들의 창은 길이를 최대한 잡아 늘린들 기병을 막을 만큼 긴 장창은 되지 못했다.

“밟아 으깨버려!”

슈로 기사단 기병들의 격앙된 고함소리가 마주선 투창병들의 귀까지 뒤흔들었다.

“밀리면 다 죽는다! 몸으로라도 막아!”

투창병단 사관들의 고함소리는 거친 수베르 군마들이 얼음을 박차고 달려오는 굉음에 파묻혀 들리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이 없어도 병사들은 밀리면 끝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아아아악!”

말굽에 채이고, 창에 꿰이고 짓밟히면서, 예르마크 경이 그리도 소중히 키워왔던 투창병 수십, 수백이 기병들의 첫 번째 돌격에 핏덩어리와 살점이 되어 공중을 날았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투창병들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첫 번째 충돌로 속력을 잃은 기병들에 개미떼같이 달려들며 무작정 창을 내질렀다.

“제기랄, 독한 놈들이네.”

기사단 돌격대의 바로 뒤에서 슬레이프니르를 이끌고 나아갔던 베아트릭스는 투구에 튄 핏자국을 급히 닦아내며 이를 갈았다. 이쯤 되면 지레 놀라서 우루루 무너질 것도 같았지만 이들은 알량한 창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채 기병들을 상대로 대오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봤자 잠깐입니다.”

그와 나란히 달려온 루코프가 애써 웃으며 그를 달랬지만 베아트릭스는 짜증스레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는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적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어. 탄현성에서 근위대들이 우리 후방을 노리고 접근해오고 있다고. 그리고 봐, 지금 적 기병들도 건너오고 있어. 최대한 빨리 이놈들을 싹 쓸어버리지 않으면 자칫.......”

베아트릭스는 연합군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와 북부보병대가 맞붙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군 쪽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북부보병대는 이미 지친 연합군 중장보병대를 힘있게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얼음 같은 찬물을 등 뒤에 두고, 숫자에서도 우세한 연합군 보병들의 발악 역시도 처절했다.

“말 그대로 배수진이군.”

베아트릭스가 이를 갈았다. 연합군 남부보병대에서도 가장 정예로 손꼽히는 플라칼 가 보병과 세닉 가 투창병단답게, 적들은 부분적으로 무너졌어도 상대에게 등을 보이지는 않았다. 등을 보인들, 기다리고 있는 건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고작이지만.

이들이 한 발 한 발 물러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건 뒤에서 배를 타고 다가오는 2천여 동부기병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배를 노리고, 수십 발의 발리스타가 또다시 거대한 불덩이를 공중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물에 병사들만 빠뜨린 채 도망쳤지만, 이번만은 저 배들도 얼음이 쪼개진 강안까지 바싹 다가와 기병들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배들은 조금 전 큰 얼음조각이 떨어져나간 그 양쪽의 조금 멀찍이 떨어진 측면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발리스타와의 거리가 그나마 가장 멀고, 또한 상륙한 기병들이 전선의 양익에서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었다.

“한 척이라도 더 수장시켜! 기병이니 물에만 빠뜨리면 끝장이다!”

동맹군의 발리스타에 명중당한 수송선 갑판에서 불이 확 치솟자 서부 사역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하지만 저들도 이번만은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불덩이 속에서 몸부림치는 기병들을 그대로 실은 채 최고속도로 강변의 얼음에 계속 접근해왔다.

“계속 쏴! 도착 전에 한 척이라도 수장시키란 말이다!”

어느새 환해진 맑은 하늘은 수십 대의 발리스타가 날리는 불꽃의 꼬리가 사방에 매캐한 연기를 그리면서 마치 먹구름마냥 뿌옇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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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에 대한 설명 그림은 팬카페의 tasawwuf's story에 올려져 있습니다.

그림파일이 크기가 너무 커서 조아라 뜰에는 올라가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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