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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80화 (479/1,132)

< -- 480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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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십시오!”

전장을 말없이 지켜보던 카렐은 누군가의 외침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기관부에 여러 발의 발리스타를 명중당한 배 한 척이 불꽃에 휩싸인 채 제자리에서 빙빙 맴돌고 있었다. 말을 놔둔 채 겁에 질려 물로 뛰어드는 기병들과 승무원들이 갑판 위에서 잠시 아귀다툼을 벌였지만 조금 후, 그나마의 광경마저 물거품 속으로 사라지며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북쪽과 남쪽에 적 기병이 상륙합니다!”

카렐이 잠시 입술에 힘을 주었다.

“첫 번째 상륙기병들을 얼마나 빨리 제압하느냐가 중요해.”

카렐이 잠긴 목을 힘겹게 울려 목소리를 냈다.

“두 번째부터는 상륙시킬 수 있는 배가 줄어들면서 적이 한 번에 상륙시킬 수 있는 병력 또한 조금씩 줄어들 테니.......이번만 확실히 잡아라.”

그의 말대로, 기병을 내려놓기 위해 정지한 배에 발리스타가 기다렸다는 듯 계속 쏟아지면서, 기껏 병사들을 토해놓은 배는 결국 되돌아가지 못한 채 물 속으로 사라져갔다. 당초 30여척에 육박했던 연합군의 수송선은 ‘자폭 선박’들의 계속된 공격에 어느새 20척 아래로 줄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발리스타에까지 노출된다면 그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적 기병들이 양 측면으로 상륙하자, 2선에 미리 대기하던 나머지 슬레이프니르 기병들이 막 상륙한 동부기병들을 향해 베아트릭스의 지휘 하에 돌진하기 시작했다.

“음?”

언덕 위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덩어리가 되어 맞받아 돌진해 와야 할 적 기병들이 무슨 이유엔지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설마.......하크로딘 가 기병들인가?”

카렐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그쪽으로 움직였다. 쐐기꼴 돌격진을 이루고 진격해오던 하크로딘 가 기병들 중 몇몇이 등을 덮은 망토를 풀어 한 팔에 흔들며 대오를 속속 이탈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이 눈가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베아트릭스 경........잠깐만 진격을 멈추게.”

“야! 저 새끼들 뭐야!”

갑자기 흩어지는 돌격진형에 더더욱 놀란 건 그들을 이끌던 슈트란 가 장교들이었다. 대오를 이탈하고 있는 건 부대단위가 아닌, 몇 명의 하급 사관들, 혹은 말단 기병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나 둘씩 빠져나가는 기병들의 숫자가 만만찮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외곽에서 대오를 이탈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한 다른 기병들까지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이탈하는 놈들을 잡으라니까!”

장교와 참모진들이 흩어져 고함을 지르고 돌아다녔지만 말단 기병들, 그리고 몇몇 하급 사관들의 이 ‘반란 아닌 반란’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망치는 놈들을 쏴버려!”

새 연대장들이 앞서 달려가는 경기병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 역시 머뭇거리기만 할 뿐 전장에서 도망치는 동료들의 등에 차마 투창을 던지지는 못했다. 심지어 명령을 받은 경기병들 중 몇은 투창을 던지는 척 그들의 뒤를 따라 이탈하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당황한 연대장이 샤자한 공이 있는 강 건너를 돌아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차라리 부대 하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다른 부대를 동원해 막기라도 하련만, 어느 부대 할 것 없이 너도나도 하나 둘씩 병사들이 빠져나가면서 이들 기병들의 ‘돌격’은 순식간에 이런저런 기병들이 뒤엉킨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상황을 재빨리 눈치 챈 동맹군 기병들은 돌격을 멈춘 채 이 혼란통을 유심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연대장이 급히 돌격을 중지시켰다. 이 상태로 계속 돌격이 가능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베아트릭스가 이끄는 동맹군 기병대와 마주선 채 급히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다.

베아트릭스는 옆의 참모가 가지고 있던 확성기를 집어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동맹군 대장군 베아트릭스 플라칼이다! 너희 가문은 이미 샤르바누 부인이 장악했다! 아직까지 그쪽에 남아있는 건 가문에 대한 배신이다! 지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는 아무 조건 없이 너희 고향 코라산으로 되돌려 보내 주겠다!”

베아트릭스의 눈짓을 받은 경기병들이 적 주변을 맴돌며 같은 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무너지는 둑처럼, 말단 기병들이 붙잡는 사관과 장교들을 급히 뿌리치고 동맹군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끝장이다......”

측면을 쳐야 할 동부기병대가 싸움 한 번 벌여보지 못한 채 무너지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지켜보며, 에우테르가 탄식을 내뱉었다. 기병의 측면공격만을 기다리며 동맹군의 파상공세에 버티고 있던 연합군 중장보병대와 투창병단에게는 유일하게 기댈 곳이 사라진,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희망이 사라지면서, 지금껏 근근이 버티던 중장보병대의 대오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럭저럭 팽팽하던 승부는 이제 급격히 그 결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연합군으로서는 상륙군의 전멸이나, 일부라도 살리느냐의 기로였다. 다급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던 헤즈는 지금 밀리고 있는 곳 조금 남쪽에 비죽이 나와 있는 바위섬을 발견했다.

“저게.......‘늑대섬’ 이었던가?”

헤즈가 재빨리 지도를 펼쳐들었다. 유난히 유속이 빠른 지점에 위치한 그 섬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고, 수심도 깊어 양쪽 모두 그다지 큰 관심을 두고 있자 않던 ‘버려진 섬’이었다.

남북으로 길쭉한 그 섬의 장축은 고작해야 6스타디아(900m) 정도 되어보였지만 굳이 커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작은 편이 도리어 지키기는 편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초 살얼음으로 둘러싸여 있던 그 섬은 적들이 사방에서 얼음을 깨버리면서, 주변의 살얼음들이 모두 물살과 얼음덩이에 쓸려나가 이제는 다시 ‘섬’ 본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헤즈는 무언가 결심한 듯 할룩스를 작동시켰다.

“각하, 이곳에서 더 이상은 힘듭니다. 적측 강안에 인접한 늑대섬에 일단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겠습니다! 저곳만 점거한다면 욱리하의 통제권은 장악하고 언제든 다시 상륙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을 총사령관 제롬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샤자한 공과 무어라 한참 말다툼을 벌이고 있던 제롬은 헤즈의 급박한 연락에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알았으니까 물러나!”

격앙된 제롬의 대답은 이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어지간히 고집스런 제롬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버티기 어렵다는 것만은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섬을 점거하라는 것인지, 어떤 순서로 물러나라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해 주지를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군.”

헤즈는 강 쪽으로 계속 밀려나고 있는 플라칼 가 출신의 중장보병대, 그리고 양익에서 슈로기사단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세닉 가 투창병단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머리를 굴렸다. 제롬이 그렇게 명령을 내린 이상, 저 섬을 점거하기 위한 명령권은 이제 헤즈에게 있었다.

“지금 남은 배에 최대한 꽉꽉 실으면 절반 정도는 태울 수 있을 겁니다.”

참모들이 헤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지만 헤즈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곳까지 배가 접근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해. 작은 보트라면 모르지만 어차피 적 발리스타에 모조리 당할 거다. 적들이 노리는 대로 움직여줄 수야 없지.”

헤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전장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물로 헤엄쳐서 왔으니.......다시 헤엄쳐서 간다. 남은 동부기병은 얼마 되지 않으니 작은 배에 타도록 해.”

“예에?”

“우리 중장보병들은 도하용 조끼들 아직 입고 있잖아! 게다가 저 섬은 하류쪽이니까 거리는 멀어도 충분히 헤엄쳐갈 수 있다고!”

“그, 그렇습니다만.......투창병단은 조끼 없이 배로 상륙했던지라.......”

“투창병단은 이곳에 남아 시간을 벌라고 해.”

순간 지휘부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굳이 조끼 문제가 아니더라도, 플라칼 가 적장자인 그가 퇴각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지는 뻔한 일이었다.

“투창병단은 어차피 적 기병들하고 뒤엉켜서 무사히 물러날 가망이 없어. 기병들 붙들고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해. 적병들은 어차피 물속에 따라서 뛰어들지는 못할 테니 중장보병들은 모두 물로 뛰어들어서 저 섬으로 가도록 해.”

“모두 퇴각해! 물로! 물로 뛰어들어서 늑대섬으로 가! 빨리! 빨리!”

동맹군 보병들에게 무참히 몰리고 있던 1만이 넘는 남부 중장보병들은 장교들에게서 내려진 조금은 황당한 명령에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미 한 번 물을 헤엄쳐 온 그들이다 보니, 이제는 이 얼음물을 새삼스레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남부 중장보병들은 적들에게 등을 보이며 필사적으로 도망쳐 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쫓아가! 놈들이 물에 뛰어들지 못하게 해!”

헤즈의 계획을 눈치 챈 페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얼음 귀퉁이까지 적을 몰아붙였던 상황이다 보니 도리어 그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 동부에서의 전투에 이어 그는 이번에도 플라칼 가 보병대의 그 지긋지긋한 견고함을 깨지 못한 셈이었다.

연합군 중장보병들이 물속으로 도망치는 광경은 슈로 기사단의 기병들과 질긴 사투를 벌이던 투창병들, 그리고 연대장인 에우테르의 눈에도 바로 들어왔다.

“자, 장군님! 지금 퇴각하는 겁니까? 그럼 우리 쪽에는 선박이 안 오는 겁니까!”

당황한 에우테르가 급히 헤즈를 불러냈지만 헤즈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 섬을 장악하는 대로 기병들을 태웠던 배를 다시 보내줄 테니 투창병단은 그걸 타도록 해. 자네와 교위급 이상 장교들은 기병들과 함께 1차로 물러나.”

“동부기병대는 이미 붕괴되었지만 우리 부대는 아직 적을 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우리 부대가 우선이 아닌 겁니까!”

에우테르가 악을 썼지만 헤즈의 대답은 냉랭했다.

“명령이다.”

에우테르 역시 플라칼 가와 남은 동부기병 대신 세닉 가 군대를 희생시키려는 헤즈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그의 부대는 플라칼 가 보병대와 잔여 동부기병대가 퇴각할 동안 시간을 벌어주는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이었다.

에우테르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다투어 투항하는 하크로딘 가 기병들과 그래도 저항하며 뒤로 물러나는 나머지 동부기병들, 그리고 투창병들을 도륙하는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가 사방에 뒤엉키면서, 전투가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이 강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다 되어 있었다.

헤즈의 처분에 순간 격분한 연대 참모들이 에우테르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대로는 병사들 다 죽습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차라리 부대 전체가 항복하는 편이......”

‘항복’이라는 말에 지금껏 에우테르의 곁을 지키던 3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대뜸 허리춤의 칼을 붙들고 눈을 부라렸다.

“대군마마께선 귀한 몸이시니 명령받으신 대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동안 1진으로 물러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디언 중 한 명이 에우테르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투창병 1개 연대를 버리더라도 인질만은 버리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 손 놓지 못해! 지휘관이 병사들을 놔두고 먼저 물러나다니!”

에우테르가 악을 썼지만 가디언들의 완력에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말굽에 짓밟혀 죽어가는 병사들을 놔둔 채 마치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

그때, 측면을 빙 돌아 우회해 온 슈로 기사단 중장기병 수십 기가 투창병단 지휘부를 향해 돌격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에우테르와 투창병단 지휘부를 끌고 가던 가디언들이 급히 무기를 뽑아들며 기병들의 앞을 막아섰다. 감시 가디언의 손에서 잠시 풀려난 에우테르는 연대장을 상징하는 망토를 벗어던지고는 얼음바닥 위를 허둥지둥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투항하는 하크로딘 가 기병들, 그리고 곳곳에 벌어진 난전으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양쪽 모두 사방에 뒤엉켜있으나 잘만 한다면 적의 눈을 따돌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참모진들 역시 그를 따라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동맹군도, 자신의 부대를 버린 연합군 지휘부도 모두 적이었다.

“연대장님! 투항을.......”

“안 돼!”

에우테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눈가에는 어머니 레곤 대공주, 남부 루게에 있는 가족들, 2군 사령관으로 있는 아버지 예르마크 경, 그리고 누나 루이제 대군의 얼굴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혼자 살겠다고 동맹군에 투항한다면, 제롬이 그들을 무사히 놔둘 리가 없었다.

“아직은 안 돼.”

얼음 위를 비틀거리며 뛰어가던 그는 강 옆,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부서진 배의 파편을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던 그는 얼음바닥에 위험천만하게 꽂혀 있던 작은 쇳조각을 조심스레 뽑아들었다. 예리하게 잘려 있던 그 쇳조각은 고작 손가락 크기에 불과했지만 뻘건 녹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잔뜩 삭아 있었다.

쇳조각을 손에 쥔 에우테르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언덕 위에는 황제 카렐이 있음을 뜻하는 ‘다라프시 카비아니’가 펄럭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북쪽에는 검은 깃발에 백마가 새겨진 큰 군기가 보였다.

에우테르가 참모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게.......적 경기병단장 베아트릭스 플라칼의 깃발이지?”

“그렇습니다.”

에우테르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갑자기 뒤따르는 참모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돌아가라. 교위급 이상은 1진으로 물러나라 했으니.......”

“예?”

“빨리! 명령대로 하란 말이야!”

참모진을 쫓아낸 에우테르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베아트릭스의 깃발을 향해 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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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늘 자정 넘어 올려야 하지만 오늘은 개인 사정상 일찍 올립니다.

다음 연재는 평소처럼 수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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