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2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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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대에서 나온 오르마즈가 갈 곳은 많지 않았다. 아직 남은 교단 세력은 대놓고 ‘오르마즈 주살’을 선언하고 나섰고, 강경파들이 그를 살려둘지도 확실치 않았다. 마구스들을 죽인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강경파들은 사로잡은 토로 로버넬 대위를 계속 심문하면서 오르마즈를 죽일 구실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사형 집행을 당해도 열 번은 넘게 당했을 로버넬 대위였지만 강경파들은 그를 계속 살려둔 채 오르마즈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써 먹으려는 심산이었다. 로버넬 대위의 입놀림 한 번에 오르마즈의 생사가 오락가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간 그를 따르던 온건파들 역시 더 이상 그에게 힘이 되어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비참한 신세가 된 오르마즈의 곁에는 아케메니아에서부터 줄곧 따라온 동생 세네피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먼지구덩이네요.”
오르마즈를 따라 빈 집에 들어선 세네피스가 코를 막으며 투덜거렸다.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제법 고급스런 독채였지만 한쪽이 불에 탄 데다가 적어도 십 년은 넘게 버려졌던 듯, 유리창은 모두 깨지고 벽에도 그을음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
“저기가 남극성당이군요. 저기서 언니가 싸우셨겠네요?”
세네피스가 가리킨 창문 너머 해안가에는 지금은 민병대 X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옛 남극성당이 보였다. 바로 지난해, 오르마즈의 기습상륙작전 이후 민병대 손에 넘어온 그곳은 오르마즈의 명에 따라 거의 폐허가 다 되었고, 지금은 옛 병원 건물과 부서진 신전, 성직자들 숙소였던 ‘아프라시아 관’ 정도가 남아있었다.
“저길 유학교육기관으로 만든다는 말도 있더구나. 맘에는 안 들지만......”
집 안을 둘러보던 오르마즈는 방 한구석에 뒹굴고 있던 이 집 옛 주인의 타다 남은 사진을 들어보았다. 바로 이곳에서 만났던 그의 첫 남자, 나즈라 라카드 박사가 그 안에서 환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세네피스가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저 앞에 폐허만 없어지면 경치가 정말 좋겠네요. 근데 이 집은 사신 거예요?”
“아냐. 이젠 주인이 없어. 그냥 우리가 차지하면 우리 집이지 뭐. 내가 이런 집 살 돈이 어디 있겠냐. 사방에 빚만 그득하지. 그러고 보니 구내매점 아가씨한테도 밀린 외상값 안 갚고 왔구나. 내가 나와서 그 아가씨가 제일 슬퍼하겠다.”
오르마즈는 바닥에 흩어진 잿더미를 베란다 밖으로 차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아가씨 보아하니 외상값 받을 생각이 아예 없는 모양이던데요?”
세네피스가 언니를 흘겨보며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오르마즈는 아케메니안 궁에서 가져온 가방 꾸러미를 들고 올라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한 의심 하지 마라. 난 그냥 눈웃음 한 번 해 준 것뿐이었어.”
“근데 여기 살림살이는 꽤 남아 있네요?”
세네피스가 2층 거실에 남아있는 큰 장식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잠겼는데 이거 좀 열어 보실래요?”
잠금장치 앞에 다가온 오르마즈는 마치 자기 것인 양 태연하게 몇 개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제법 단단해 보이는 자물쇠가 그대로 열려버리는 모습에 놀란 세네피스가 이 ‘신기한 언니’를 휙 돌아보았다.
“세상에, 처음 보는 비밀번호를 어떻게 아셨어요? 어? 무기들이네? 여기 전 주인이 무장이었나?”
오르마즈는 장 안에 정성스레 정돈되어 있던 몇 개의 칼들과 마구, 장식품들을 조심스레 들쳐보았다.
“정말 좋은 칼이구나.”
오르마즈가 제일 먼저 집어든 건 그 한쪽에 있던 카타나였다. 조심스레 뽑아본 칼집 안에는 붉게 코팅된 아름다운 칼날이 섬세하고도 맑은 광택을 뿜고 있었다.
“잘됐다. 쓸 만한 장검이 없었는데. 정말 값나가는 칼 같다.”
카타나를 유심히 살피던 오르마즈는 자신의 허리에 채워져 있던 ‘크리스’ 단검을 뽑아 방금 구한 카타나와 나란히 들어 보았다. 구불구불하게 굽은 크리스의 푸른빛 날과, 방금 전 집어든 붉은빛 카타나 날 위에는 12교단을 상징하는 조각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조각되어 있었다.
“정리하는 데만 며칠은 걸리겠구나.”
무기들을 다시 제자리에 세워놓은 오르마즈가 한숨을 내쉬며 집안을 빙 둘러보았다. 세네피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여기 술집 차리신다면서요?”
“1층은 술집으로 쓰고 2층은 그냥 살림집으로 쓸 거야. ‘절영’이 지낼 마구간도 하나 만들어야겠지.”
오르마즈가 무기장을 다시 닫으며 힘없이 돌아섰다.
“종업원도 구해야 하고.......할 일이 많겠구나.”
“제가 도와드릴게요. 언니가 하는 일이라면.......”
“괜찮아. 넌 공부나 하도록 해. 나야 어차피 전쟁터에서 뒹구느라 이 나이까지 학교도 한 번 못 다녔지만 너라도 제대로 배워서 이름 있는 학자가 되어 주면 소원이 없겠다.......어머니도 그걸 바라셨겠지.”
동생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은 오르마즈는 창밖으로 ‘남극성당’의 폐허를 둘러보며 다시금 자신의 비참해진 처지를 절감해야 했다. 하지만 교단에도, 민병대에도, 그가 기댈 곳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 자신과 동생을 이 격동 속에서 홀로 지켜내야만 했다.
마구스들의 처형 이후, TSG민병대의 ‘폭주’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마구스들의 죽음과 함께, 이제 교단과의 ‘화합’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샤미르에게 남은 방법은 ‘힘’으로 그들의 저항을 억누르는 것뿐이었다.
샤미르는 이전에 선언했던 ‘정교 분리안’을 일방적으로 철회했고, 오르마즈가 놓아주었던 고위 성직자들, 그리고 친 교단 인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여 처형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제니안과 TSG에 대한 세간의 반감 또한 조금씩 높아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샤미르는 ‘핏빛 비수’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어야만 했다.
실제로 오르마즈가 물러난 이후, 민병대는 필사적인 군사작전을 벌여 잔여 교단과 코메트 부대를 압박했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그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정작 점령지역은 오르마즈가 있던 시기의 지역에서 손바닥 하나만큼도 더 나아가지 못했고 52년의 영광스런 ‘성전’은 이제 고참병들의 추억 속에서나 남아있었다.
사교도가 대부분인 아케메니아의 주민들은 지난번 마구스들의 처형으로 민병대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고, 코메트와 교단 잔여세력들은 이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민병대에서 이반한 보통 시민들을 그 추종자로 끌어들였다.
반면 각 지방에서 봉기한 지방유지, 속칭 ‘호족’들은 전후의 ‘떡고물’을 노리고 앞다투어 민병대에 가담했다. 그 덕택에 민병대의 자금은 그동안의 가난을 씻어내고도 남을 만큼 넘쳐나게 되었지만, ‘종전 후 봉건국가화’를 주장하는 강경파들의 힘 역시 갈수록 더 강해져만 갔다.
‘최소한 당시까지는’ 생각이 있던 베흔이 ‘지금의 부유함은 봉건국가가 된 후 군주가 겪을 비참함에 대한 싸구려 보상일 뿐입니다.’라고 샤미르에게 조언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샤미르로서도 일단 당겨진 방아쇠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민간인들은 도덕성을 잃은 민병대를 더 이상 ‘낭만적인 자유주의자’가 아닌, 폭군과 악질적인 지방세력의 앞잡이로 여겼고, 처형당한 교단 사람들은 도리어 평등한 시민권의 순교자가 되었다.
오르마즈가 물러나고 겨우 2, 3년 사이, 이렇게 양측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55년 말, 그간 코메트와 민병대 양쪽에 모두 쫓기고 있던 교단의 전 2인자 수나 빈트 트라카 마구스와 그 보좌관이며 주치의 니사 라말라 박사가 민병대에 전격 체포되면서, 이런 정세도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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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에게 오늘 하루는 지옥에 한쪽 발을 들어놓았던 끔찍한 날이었다. 늑대섬으로 전군을 퇴각시킨 헤즈의 막판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상륙군 전체가 얼음 위에서 적들에게 모조리 도살당했을 것이 뻔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의 군대는 언제든 도하를 시도할 수 있는 막강한 교두보를 확보했고, 그는 병사들에게 ‘이번 전투는 명예로운 승전’이었다고 대대적으로 공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전군에게 이전과 같은 양대로 푸짐한 저녁을 선물로 선사했다.
하지만 숙영지는 운좋게 돌아온 부상자들, 그리고 풀 죽은 병사들과 어렵게 물에서 건져 올린 퉁퉁 분 시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총사령관인 그는 다음번 대처방안을 생각하고, 생존자들을 격려하고, 시체들의 약식 장례를 모두 주관해야 했다.
물론 그 외에도 해결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샤자한 공과 대판 싸우고 저녁 늦게야 돌아온 제롬은 분을 이길 수가 없는지 막사의 탁자부터 뒤집어엎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씨발, 저 한심한 노인네 같으니! 지가 뭐 할 말이 있다고!”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 할룩스로 연결되어 있던 베흔은 아들의 이런 격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베흔 역시도 최소한 지금만은, 자신이 저 자리에 있어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 늙은이만 아니었어도 완전한 우리 승리였다고!”
제롬이 씩씩대며 언성을 높였다.
전투 후 벌어진 연합군 두 최고제후 간의 싸움은 원래 전투에 못지않게 험악한 분위기였다. 제롬은 샤자한 공이 1천2백이나 되는 하크로딘 가 기병들을 적들에게 ‘고스란히 바친’ 덕택에 다 잡은 완승의 기회를 놓쳤다며 언성을 높였고, 샤자한 공은 적들이 얼음을 쪼개놓고 도망갈 때 이미 승패는 결정난 것이 아니냐며 플라칼 가 보병대를 ‘패전의 원흉’으로 몰아붙이기만 했다.
하지만 제롬이 보기에 플라칼 가 보병대, 그리고 투창병단은 그 힘든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할 만큼 한 것이었다.
제롬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저 빌어먹을 늙은이가 뭐 도움이 되는 게 있어야지! 정예기병이 3만이 아니고 30만이 있으면 뭘 해! 밥값만 축내지 지휘관이 저 따위인데”
“그런 정예기병이 카렐 휘하에서 각하께 창끝을 겨누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죠.”
베흔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제롬을 달랬다.
“솔직히 그 기병들이 모두 용감히 싸웠다고 해도 우리가 승전했을 가능성은 어차피 반반이었습니다. 적은 황제가 직접 나온 친정이었고, 적진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 병사들은 지친 데다가 카렐 놈의 깃발에 이미 주눅이 잔뜩 들어있었고요.”
베흔의 냉정한 평가에 제롬이 알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래, 그래, 알아, 알아. 어쨌든 이젠 카렐 놈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야. 저 따위 늙은 놈팽이하고 어떻게 1년 가까이를 손잡고 있었을까? 그때만 해도 우리가 ‘동부기병’ 하면 그렇게 무서워했는데, 왜 내 밑에 들어오니까 저따위가 되어버렸나고?”
제롬의 넋두리에 베흔이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말로 표현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 다혈질 아들과 카렐과의 ‘비교’가 그다지 의미 없다는 것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럼 쉬십시오.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롬의 지친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던 베흔이 쓴웃음과 함께 통신을 끊었다. 술병 반을 비운 제롬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나마 부족하던 식량 재고는 이번 공격을 준비하느라 다시 뚝 떨어졌고, 내일 재보급이 들어온다고 해도 이전처럼 환원은 불가능했다. 주변에 약탈할 농장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고,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게다가 제파가 이끌고 오던 근위대 원정군까지 이곳에서 패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진격을 멈추고 샤마시 평원 한중간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키던 제롬은 막사 한쪽을 지키고 있는 근위장교에게 괜한 짜증을 부렸다.
“계집은 왜 안 와?”
“예? 저어.......각하께서 얼마 전부터 막사에 여자들을 들이지 말라고.......”
“이런 씨발, 야! 내가 평소에나 들이지 말랬지 술 먹을 때까지 이렇게 혼자 궁상을 떨고 싶다고 했어? 네놈은 눈치는 어디다가 달고 다니냐!”
“아, 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당장 여자를 불러.......”
“됐어, 집어 쳐.”
제롬은 짜증을 부리며 술 한 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그년들도 이젠 진절머리나니까.”
빈 술잔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제롬은 조금 전 한 말을 바로 후회했다. 오늘 밤만은 아무 여자나 붙들고 마음껏 기분을 풀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시 여자를 불러오라며 변덕을 부리기도 조금은 민망했다.
“어디 나같이 몸 달은 여자 없으려나.”
혼자 잔을 비우던 그는 뜬금없이 한 얼굴을 머리에 떠올렸다. 잘생긴 남자만 보면 좋다며 히히덕거리고, 비번인 날엔 군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멋내기에 열중하던 한 여자의 모습이 그의 눈가에 맴돌았다. 그 정도 여자면 지금쯤 남자가 그리워 혼자 몸을 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유부녀가 차라리 뒤끝없고 깨끗할지 모르지.’
제롬이 손을 들어 문가의 근위장교를 다시 불렀다.
“이봐, 릴라크 경 좀 불러와.”
제롬의 손짓에 그 근위장교가 순간 움찔했다.
“저어.......그분께선 내일 남편이 오신다고........”
“그게 뭐?”
제롬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네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냐? 총사령관이 상의할 게 있어 아랫사람 부른다는데!”
속내를 들킨 제롬이 무작정 역정을 내며 그 근위장교를 몰아붙였다. 당황한 장교가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당장 모셔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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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