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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83화 (482/1,132)

< -- 483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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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의 허락을 받아 특별히 불러 온 남편 루시도프와 어린 딸이 새벽에 도착한다는 소식에 릴라크는 한참 막사 정리와 청소를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제롬의 느닷없는 호출을 받은 릴라크는 엉망이 된 옷매무새부터 정리해야 했다. 그간 혼자 지내 온 막사는 쌓인 서류와 쓰레기들로 도깨비라도 나올 것처럼 엉망진창이었고, 이 꼴로 남편과 아기를 맞을 수는 없었다.

“그분께서 갑자기 왜?”

릴라크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으며 자신을 부르러 달려온 장교에게 짜증스레 물었다. 하지만 근위장교는 머쓱한 웃음만 지을 뿐 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이 한밤중에 왜 갑자기........”

근위장교를 따라 제롬의 막사에 들어선 릴라크는 이곳을 지키던 근위병들이 눈치껏 자리를 비우는 모습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롬은 술 반병을 탁자 앞에 둔 채 안주도 하나 없이 자리에 혼자 앉아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한 잔 하게나.”

제롬이 빈 잔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릴라크는 바짓자락에 묻은 먼지를 재빨리 털어내고는 그가 내민 잔을 받아들었다.

“좀 바싹 앉아 봐.”

“예?”

제롬의 느닷없는 수작에 릴라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릴라크 라자루스 예리노프’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그는 제롬의 정실인 오르테 라자루스 부인의 사촌 언니였고, 혈연으로만 따지면 제롬에게는 처형(妻兄) 뻘의 손윗사람이기도 했다.

“너무 늦게 보내주지는 않을 테니까.”

제롬이 갑자기 히죽거렸다.

“공적으로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밤은 바빠서......”

릴라크는 제롬이 내준 잔만을 재빨리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제롬 역시 뒤따라 일어서며 그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내 말 끝까지 들어.”

“가겠습니다.”

“마누라가 그리운 남자하고, 남편이 그리운 여자하고 뒤끝 없이 딱 한 번만 즐기자는 거야. 어때? 비실대는 유학자 남편보다야 크고 힘도 세고 잘생긴 내가 훨씬 만족스럽게 해 줄 것 같지 않아?”

제롬이 옷깃을 풀고 우람한 가슴을 드러내며 릴라크에게 바싹 다가섰다. 순간 당황한 릴라크는 그의 손을 떨쳐내며 다시 뒷걸음쳤다. 물론 릴라크도 절개를 지키는 지고지순한 여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미 몇 번이나 못 볼 꼴을 본 그에게 제롬은 결코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거구의 남자는 릴라크에게 바싹 다가서며 그의 귓불을 깨물었다. 순간 릴라크는 온몸의 소름이 다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딱 잘라 대답한 릴라크는 제롬을 거칠게 떠밀어내며 출구 쪽으로 돌아섰다.

“뭐?”

술기운이 확 치솟은 제롬이 물러나는 릴라크의 왼쪽 손목을 꽉 붙들었다. 그의 괴력에 놀란 릴라크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릴라크가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지만 제롬은 평소 여자들을 범할 때처럼, 그를 강제로 끌어당겨 다시 품에 안았다. 궁지에 몰린 릴라크는 순간 ‘무장으로서의 본능대로’ 반응했다.

“이씨! 싫다니까! 씨발!”

릴라크의 욕지거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릴라크의 단검자루에 명치 옆, 갈비뼈 사이를 정확히 가격당한 제롬은 입을 쩍 벌린 채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악.......”

제롬이 자리에서 잠시 비틀거렸다. 그 사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릴라크는 어느새 검게 변한 손목을 붙들고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손목뼈가 으스러졌는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제롬을 놔둔 채 도망치듯 막사를 나섰다.

“썅, 날 뭘로 보고.......”

막사로 뛰어가는 릴라크의 눈가에서 눈물이 솟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저자가 자신에게 ‘전부터 연모를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면 지금처럼 분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저 문란한 최고제후가 근위기병대장인 자신을 고작 하룻밤 상대로 여겼다는 자체가 너무도 분하고 억울했다. 마치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소름끼치는 느낌에 릴라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바싹 움츠렸다.

“개새끼, 저 빌어먹을 발정난 개새끼........”

릴라크가 마구 욕을 지껄였지만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저지른 것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후회보다 불쾌감이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그리도 그리던 아내의 막사에 기쁨에 넘쳐 도착한 릴라크의 남편 루시도프 플라칼 경은 이상한 광경과 마주해야 했다.

“여, 여보.......어디 아픈 거야?”

반쯤 청소를 하다 만 듯, 사방에 쓰레기와 서류더미들이 널린 막사 안에서 릴라크는 손목에 간단한 프레임을 댄 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루시도프는 안고 있던 아기를 옆에 내려놓고는 아내에게 급히 다가가 얼굴을 짚었다.

“다친 데 없다며.......자기 손목이 이게 뭐야? 얼굴은 왜 이래? 울었어?”

릴라크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남편의 든든한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루시도프는 어찌된 일인지 영문도 몰랐지만 일단 아내의 떨고있는 어깨부터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나.......부탁 있어.”

릴라크가 한참만에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뭔데? 말해 봐.”

“내가 가는 대로 따라와 줘. 무슨 길을 가건간에.......”

릴라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편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의 젖은 눈빛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루시도프는 당황한 듯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릴라크가 그의 입을 막으며 선수를 쳤다.

“더 이상은 나도 못 견디겠어........”

하늘에서는 새벽부터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예보관들의 말대로, 살을 에는 듯 추웠던 황도의 날씨도 ‘5일 주기’의 따뜻한 시기에 접어들어서인지 그럭저럭 견딜만한 정도였다.

이 시기만 넘기고, 강물이 다시 얼어붙어 플라칼 가 보병대가 주둔중인 ‘늑대섬’이 다시 육지와 연결된다면 그때는 다시 처절한 피의 사투가 벌어질 터였다.

가는 눈발 속으로 남편과 함께 말을 타고 산책을 나온 릴라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은 아기까지 데리고 숙영지 남쪽, 얼마 전 약탈을 당해 휑해진 농장터로 천연덕스럽게 말을 몰았다. 루시도프는 난생 처음 타 보는 덩치 큰 수베르 산(産) 군마가 부담스러운지 조금은 어정쩡한 자세로 아내의 뒤를 따랐다. 릴라크가 그런 남편을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그러길래 평소에 승마연습 좀 하라니까.”

“승용마는 잘 타. 내가 이렇게 큰 말을 탈 일이 있어야지.”

“말은 바로 해. 그게 조랑말이지 승용마야?”

장난스레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는 이 둘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자연스런 ‘부부’의 평소 모습이었다.

“정말, 자기 전사가문 사람 맞아? 어릴 때 마상무술도 안 배웠어?”

“쳇, 그거 놓은 게 어느 세월인데.”

아내의 핀잔에 루시도프가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아내가 전장에 나갈 때 주로 타는 제일 빠르고 힘센 말을 자신에게 양보하고 일부러 두 번째 말을 타고 나왔다는 것을. 지금 그가 탄 수베르 산 이 덩치 큰 백마는 릴라크가 친정 예리노프 가에서 시집올 때 가져온 명마였고, 지금껏 수십 번의 전장에서 그와 생사를 함께 해 온 믿음직한 말이었다.

릴라크는 지금까지 뒤따라온 플라칼 가 출신 호위병들을 살짝 째려보았다. 부부간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20여기의 호위기병들은 그의 눈짓에 헛기침을 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하지만 거리만 벌려주었을 뿐, 눈길을 놓은 건 아니었다.

“내가 안을까? 자기 팔도 불편하잖아.”

루시도프가 아내의 팔에 안긴 딸을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아. 오른팔은 성해. 자기 말 모는 거나 신경 써.”

릴라크는 아기를 품에 꼭 안으며 행여 찬바람이 들까 망토자락으로 잘 감싸주었다.  뼈에 금이 간 왼팔은 일단 고삐를 쥐고 있었지만 거의 힘을 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자기야, 고마워.”

릴라크가 다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가 이번 일을 제안했을 때, 처음에는 기겁했던 루시도프였지만 제롬이 아내의 손목을 으스러뜨리고, 심지어 그를 범하려까지 했었다는 말에 바로 마음을 바꾼 그였다. 아기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기나 하는지,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품에 포근하게 안긴 채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더 가면 돼?”

루시도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들의 옆으로는 이곳을 떠난 농민들이 남겨두고 간 빈집들이 마치 흉물처럼 버려져 있었고, 그 너머에는 흥안령의 험한 산줄기가 여전히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쪽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10분 정도.......응?”

순간 긴장된 표정을 지은 릴라크가 짧게 대답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숙영지 쪽에서 이곳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는 2기의 기병이 사방으로 흰 눈발을 날리고 있었다.

“예리노프 장군님! 장군님!”

릴라크는 산자락과의 거리를 다시 어림하고는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산자락 숲과의 거리를 보아 지금 상태에서 저들을 따돌리기는 어려웠다. 특히나 승마에 서툰 남편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냐? 지금 비번인거 몰라?”

릴라크가 짜증스레 물었다.

“아, 최고제후님께서 급히 찾으시는데 갑자기 연락이 되지를 않아서.......”

“최고제후님‘이라는 말에 릴라크가 움찔했다.

“연락?”

릴라크가 할룩스를 들쳐보았다. 물론 할룩스는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었고, 연락이 온 흔적은 없었다. 이런 일생의 결정을 내리면서 릴라크가 할룩스를 끄는 ‘속 보이는’ 짓을 할 정도로 서툰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 새끼 제 발 저린 모양이군.’

릴라크가 코웃음을 쳤다. 어젯밤 일로 지레 걱정이 된 제롬이 ‘릴라크 경이 뭘 하고 있나 확인하고 와라’며 이들에게 시킨 모양이었다. 어쩌면 릴라크가 부인 오르테에게 고자질하지나 않았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르테의 그 유별난 성깔, 그리고 교활하기로 소문난 처가 라자루스 가를 안다면 그가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최고제후께서 뭐라 전하라 하셨나.”

릴라크가 평소처럼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전령에게 물었다.

“루시도프 경께서 오셨으니 간만에 처형(妻兄) 부부와 간단한 다과라도 함께하고 싶다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당황한 릴라크를 대신해 이번엔 루시도프가 나섰다.

“이런, 어쩌나, 아직 짐도 부리지 않아서 찾아뵈올 때 입을 옷도 없다네. 상하간에는 법도가 있는 법이니, 그를 지켜야 하는 유학자가 말을 타다 말고 이런 더러운 몰골로 윗분을 뵐 수는 없지 않은가.”

루시도프가 평소 잘 짓지 않던 유학자다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전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공무로 와 있는 것이 아니며, 이번 나들이도 내자(內子)와의 오랜 약속에 따른 것이라네. 내 한두 시간 후면 돌아갈 것이니 그때 의관을 정돈하고 손발을 깨끗이 한 후, 오찬 전에 함께 찾아뵐 테니 일단 돌아가게나.”

“복장 정도는 어차피.......”

무어라 반박하려던 전령은 루시도프가 ‘꼬장꼬장하고 답답한’ 유학자라는 것을 그제야 떠올렸는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최고제후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와 주셨으면 합니다.”

전령들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돌아섰다. 자신들이 ‘큰 사건’을 쉽게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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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로 연재 주기가 흐트러진 관계로 일정을 맞추기 위해 다음 연재는 금요일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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