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86화 (485/1,132)

< -- 486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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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안령 산자락에 널린 동맹군의 경보병 ‘초소’들은 연합군 입장에서는 꽤나 귀찮은 파리떼들이었다. 초소 규모래야 제일 커 봤자 소대 규모의 토굴이었고, 대다수는 4명 이하가 머무르는 잘 위장된 비트였다. 게다가 그들은 공격을 받으면 싸울 생각조차 않은 채 바로 도망을 쳐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토벌대가 초소를 불태워 버리면 그 부근에 또 다른 초소 세우기를 반복해가며 가뜩이나 지친 연합군의 얼을 쏙 빼 놓았다. 산은 거대했고, 비트 만들 곳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사실 초소의 경보병들을 모조리 합쳐 봤자 채 연대 병력도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연합군에게는 꽤나 귀찮은 눈엣가시였다.

결국 배고픔과 추위에 지친 연합군들은 자신들의 숙영지 인근만 가까스로 ‘청소’한 후, 수백 개나 되는 나머지 초소들을 ‘멍청한 적들의 병력 낭비’로 치부하는 선에서 애써 자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 초소들은 동맹군이 연합군 정보를 수집하는 말단조직이었고, 연합군 정찰대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였다. 실제 에키트 족들로 이루어진 초소 하나는 고작 3명이 10명 가까운 정찰대의 목을 모조리 기념품으로 가져가 연합군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연합군 숙영지 남쪽에 주둔하던 최일선 전진초소 병사들도 웬 ‘기병대’의 접근에 일단 도망칠지, 숨어서 지켜볼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던 분대장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했다.

“뭐, 고작 셋 뿐이네........잠깐, 델루지 가 근위기병 같은데.......앞에는 민간인이네? 저거 남극성당 교복 아냐?”

“말은 군마 같은데요? 쫓기는 거 아닙니까?”

그들은 말을 타고 정신없이 도망치는 루시도프와, 그의 뒤를 바싹 쫓아오는 2기의 기병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갑자기 내리는 눈 때문인지 시계(視界)도 별로 좋지 못했다.

“함정이면 어쩌죠?”

“고작 쫄병 5놈 잡자고 근위기병대가 나와서 저 생쇼를 벌이냐.”

분대장이 키득거리며 비트 안의 두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비트 옆 높은 나무 꼭대기에 숨어있던 2명의 투창병 겸 관측병이 8스타디아(1.2km) 정도 떨어진 곳에 다른 기병 2기가 또 오고 있다며 수화를 보내왔다.

“근위기병이 나설 정도면.......어쩌면 꽤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르지. 혹시 모르니 소대장님께 연락하고 옆 초소에 지원 요청해. 기왕이면 에키트 족들 좀 보내달라고.”

결정을 내린 분대장이 병사들에게 위장포를 걸치라며 손짓을 보냈다.

루시도프는 꾸깃꾸깃해진 지도를 주먹에 쥔 채 필사적으로 말을 몰았다. 어린 시절 말을 타던 감각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도움을 청하던 아내의 죽어가는 목소리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인지, 그에게는 더 이상 겁나는 것도 없었다. 지도에는 동맹군 초소들이 있는 ‘위험지대’가 표시되어 있었지만 그곳은 그에게 더 이상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부부가 원래 가려했던 길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위험지대’를 피해 일단 산맥을 넘고, 흥안령 건너편 마을을 거쳐 처가인 예리노프 가가 있는 인근 5번 도시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 끝이었다.

“좌측으로 돌아서 앞을 막아!”

뒤쫓던 선임 기병이 함께 달리는 동료에게 고함을 질렀다. 뒤를 급히 돌아보았던 루시도프는 또다시 뒷덜미를 잡을 듯 가까이 다가와 있는 기병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눈앞에 확 나타는 거대한 나무둥치에 깜짝 놀라며 고삐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제발, 제발!”

순간 공중으로 확 솟구쳐 오른 루시도프의 백마는 그 주인, 아니 주인의 남편을 실은 채 반대편 눈밭에 사뿐하게 내려섰다. 십년감수한 루시도프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응?”

루시도프가 움찔했다. 그의 뒤를 당장 잡을 듯 쫓던 기병의 모습 대신 주인을 잃은 말만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잡았다!”

그새 루시도프를 앞서간 다른 기병이 그의 앞을 확 가로막았다. 깜짝 놀란 루시도프의 백마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며 자리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순간 중심을 잃은 루시도프는 그대로 말 옆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놈!”

급히 말을 세운 기병이 쓰러진 루시도프의 얼굴에 창끝을 겨누며 무어라 고함을 지르려 했다. 순간, 어딘가에서 강력하게 날아온 2발의 투창이 그 기병의 등과 팔을 그대로 뚫어냈다.

“아윽!”

놀라 움찔거리던 기병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출발시키려 했지만 눈 속에 숨어있던 3명의 경보병들이 장창을 쥐고 사방에서 튀어나와 말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그리고 뒤이어 2발의 투창이 또다시 그 기병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미 부상을 입고 있던 그 기병은 뒷덜미를 강타한 일격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말 옆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휴, 이봐, 말에서 떨어져 주길 다행이야. 신나게 달려가는 기병은 솔직히 잡기 어렵거든.”

분대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루시도프를 일으켜 주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는 길게 늘였던 창을 다시 짧게 줄여 등에 메고는 나무 위에 있는 2명의 투창병들에게도 잘 했다며 손짓을 보냈다. 나무 둥치 너머에는 병사들이 미리 설치한 함정에 걸려 낙마한 또 다른 기병이 겁에 질린 채 쓰러져 있었다.

잠시 얼떨떨해져있던 루시도프는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는 분대장의 다리를 무작정 껴안으며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제발, 제 아내하고 딸을 살려주세요, 지금 적에게 쫓겨서.......”

루시도프의 애원에 분대장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여보슈, 우리도 정의의 용사 노릇 해 주려고 여기 있는 게 아냐. 댁 마누라가 누군지는 내 모르지만.......”

“아내는 연합군 근위기병대장 릴라크 예리노프 장군이란 말이요! 난 플라칼 가 종가 적생자인 루시도프 플라칼 교리이고!”

루시도프가 귀밑의 상급귀족문, 그리고 줄이 세 개 그려진 남극성당 머플러를 급히 내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라고요?”

분대장은 자신이 들은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정말로, 바지자락을 잡고 매달린 이 남자의 귀 밑에는 틀림없는 상급귀족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루시도프가 그의 허리띠를 붙들며 다시 악을 썼다.

“연합군 근위기병대장 릴라크 예리노프 장군이라고!”

“뭐, 뭐라고요?”

아직까지 살아있는 아기의 낮은 호흡을 느끼며, 릴라크는 품 안의 딸이 너무도 대견하다고 느꼈다. 시간감각은 없었지만, 떨어진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어쨌든, 아기의 따뜻한 숨결과 드문드문 들리는 낮은 울음소리는 이미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을 그에게 지금까지 버틸 초인적인 힘을 준 버팀목이었다.

“조금만.......참으렴......”

릴라크는 보이지도 않는 아기를 꼭 안으며 계속 같은 말을 속삭였다. 그 사이에도 그의 피를 뒤집어쓴 할룩스는 희미하게 깜박이며 자신의 위치를 계속 알리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릴라크는 무언가 눈을 밟는 소리에 눈을 떴지만 이제는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면서 뇌를 심하게 다친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소리로 보아 최소한 사람은 아니었다. 릴라크는 들개, 혹은 늑대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가........”

릴라크가 아기를 몸에 더 가까이 붙이며 씩씩거렸다. 잠시 그의 주변을 맴돌던 그 정체불명의 존재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쩝쩝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저항하는 이 골 아픈 ‘사람’ 대신 먹을 것도 많고, 이미 숨도 끊어진 말을 뜯어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릴라크는 저들이 행여 아기에게 접근할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의미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저들이 말을 다 먹어치운 후, 어디에 눈독을 들일지는 뻔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허겁지겁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고대하던 사람의 발소리가 느껴져왔다. 릴라크는 누가 오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불가능했다.

“여보?”

릴라크의 귓가를 울린 건 그리도 기다리던 루시도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내를 부르던 그의 목소리는 곧 충격의 신음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여보, 여보.......이게.......이게........”

끔찍한 몰골로 눈에 파묻혀 기적적으로 숨을 잇고 있던 릴라크의 모습에 루시도프가 울며 다가서려 했다. 하지만 함께 온 동맹군의 의무병이 충격을 받은 그를 급히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함께 온 20여명의 경보병들과 십여명의 에키트 족들이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는 새 의무관과 들것을 든 의무병들이 릴라크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맙소사.......어떻게 살아 있었지........”

환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아는 의무관이었지만 이번만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눈밭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그의 쪼개진 머리 사이로 골이 조금 드러나 있었고, 오른팔은 이미 잘려나가고 없었다. 사방에 번진 피, 부러진 채 돌아간 목과 뒤로 꺾인 허리는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의무병들이 꺾인 그의 목과 허리에 급히 부목을 대고 옮길 준비를 서둘렀다.

“아기.......아기 먼저........”

릴라크가 왼팔을 조금씩 움직이며 안고 있던 아기를 가리켰다. 의무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기요?”

“아기.......먼저........”

의무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릴라크가 계속 으르렁거렸다.

“아기가.......울잖아.......”

“아기는 이미.......”

“귀가.......먹었냐?.......”

릴라크가 이를 빠드득 갈며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순간 경악한 의무관이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릴라크가 품에 안고 있는 건 이미 죽은 지 한참은 되어 보이는 아기의 하얗게 얼어붙은 시체뿐이었다.

“설마......”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의무관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루시도프를 돌아보았다. 상황을 눈치 챈 루시도프가 울음을 애써 참으며 아내의 가슴에서 죽은 아기를 안아들었다.

“아이는 별로 안 다쳤으니까.......내가 직접 데려갈게. 고마워. 모두 당신 덕분이야.......”

딸의 뻣뻣해진 시체를 안아든 루시도프는 앞을 볼 수 없는 릴라크의 입가에 번지는 안도의 미소를 보며 자꾸만 솟구치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감추었다.

“지켜줘서 고마워........”

루시도프는 피로 범벅이 된 딸의 작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이를 악물었다. 시체가 된 아기를 건네주며 기뻐하고 있는 아내 앞에서, 그는 차마 울 수도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릴라크는 들것에 실리며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시력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딸의 맑고 큰 눈동자와 가슴에 전해지던 따스한 온기를 떠올리며, 릴라크는 모처럼 느끼는 행복감에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엄마 노릇’을 했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엄마를 찾던 아기의 슬픈 울음소리도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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