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87화 (486/1,132)

< -- 487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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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베스는 오늘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오래된 신도’들의 모습에 내심 머쓱했지만 그들도 ‘새로운 신도’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뭐 신도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그냥 어떤 건지 경험해보려는 것뿐이니까......“

구르베스는 자신의 행동을 그저 호기심 따위로 애써 평가절하했지만 묘한 불안감과 거부감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덜했다.

제단에서는 서열 81위라는 성직자, 아니 병원의 한 흉부외과 의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구르베스는 니사가 몇 위의 신관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위급 성직자를 뜻하는 ‘신관’이라 불리는 것을 보니 그도 최소한 서열 20위 안에는 드는 고위급임에 틀림이 없었다.

구르베스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수나 마구스는 여전히 음지에 서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신도들도 저 사람이 유일한 ‘생존’ 마구스임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니 어딘지 재밌기까지 했다.

“옛날 ‘가타스’군요.”

옆자리에 앉은 다른 남자 신도가 구르베스의 손에 들린 책을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가족, 십여명의 노예들과 함께 매번 찾아오는 이 남자는 이곳 쿠트라스에서 제법 큰 식품업체를 운영하는 부유한 평민 사업가라고 들은 일이 있었다.

사교에서는 지금은 없어진 간택자 제도를 빼면 따로 계급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간택자도 세습은 아니었고, 상류층부터 하류층, 심지어 오르마즈나 세네피스처럼 대역죄인의 가족이라도 ‘조건’만 만족시킨다면 누구든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간택자제도 역시 성직자가 되는 자격을 제한하는 것을 빼면 ‘제도적인 서열’을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어느 정도 특권계급을 형성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간택 자체가 세습이 아니었고, 공직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최소한 숫자상으로는 비간택자들이 도리어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제국 법률에서는 세습적인 계급제가 있는데다가, 노예의 종교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보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교도들이 이렇게 ‘신도 노예’들을 돈을 주고 사들여 성소에 함께 데려오는 편법을 쓰곤 했다.

“그, 그런가요?”

“그럼요. 판본을 보니 이마(Yima) 500년 무렵 것 같은데요. 신학교 도장이 있는 걸 보니 성직자가 갖고 있던 것이군요.”

구르베스는 이들이 쓰는 연호를 지금의 연호로 바꾸느라 잠시 애를 먹어야 했다. 콜로니 이주민이 정착한 해를 기준으로 하는 ‘이마’ 연호로 500년이면, 리 리쿠가 죽은 해를 기준으로 하는 지금 연호로는 기원 11년 무렵이었다.

“어? 니사 라말라 신관께서 쓰시건 거네요? 세상에, 이걸 어떻게 나셨죠?”

구르베스의 책을 들쳐본 그 남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건 구르베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 이 책의 주인은 이미 처형당해 돌아가셨다고.......”

“돌아가시긴요. 여기 라말라 신관님의 서명이 있는데요.”

남자가 책의 한구석, 책 주인의 이름을 적는 칸을 가리켰다. 익숙지 않은 바람 어로, 그것도 잔뜩 흘겨 쓴 서명이다 보니 구르베스도 그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냥 성직자본이라면 제가 거금을 들여서라도 팔라고 졸라 볼 생각이었는데........이거 안 되겠군요. 그분께서 주신 것이라면 제가 감히 달라고 할 수가 없죠. 그분께서 신학교 시절부터 쓰시던 것일 테니.”

남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든 구르베스는 다시 뒤를 휙 돌아보았다. 수나 마구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구르베스 역시 마구스들은 개국 전 모두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의아해진 구르베스는 가타스를 펼치고 그 안에 쓰인 메모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안에 어떤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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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하셨군요, 전하.”

기원 56년, 3년 만에 아케메니안 궁을 찾아온 오르마즈가 샤미르에게 건넨 건 이 싸늘한 한 마디였다. 항상 그의 옆을 지키던 이젤은 흰 보자기가 씌워진 채 방구석의 시선 밖에 버려져 있었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책상 위에는 서류더미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젠 내 일은 내가 처리한다.”

샤미르는 오르마즈의 시선을 무시하며 마찬가지로 차갑게 대답했다.

“네 도움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어.”

“.......그러시다면 다행이고요.”

오르마즈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잘 알아.”

샤미르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강경파와 결탁한 듯 보이는 이 냉혹한 지도자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최악이었다. 그는 이미 2천 명이 넘는 성직자와 열성 신도들을 처형했고, 5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수용소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떨고 있었다.

게다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황 또한 그를 점점 더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민병대 병력은 오르마즈가 있을 때보다 갑절이 넘게 늘어났지만 옛날부터 있던 소수의 열성 전사들을 빼면 군기는 형편없었고, 새 사령관인 헤크마는 여기저기서 능력부족을 계속 드러내고 있었다.

“제 편지에 왜 답장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르마즈의 물음에 샤미르가 여전히 밋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할 때가 아닐 뿐이야.”

오르마즈는 샤미르를 말없이 올려보았다. 얼마 전, 수나 마구스와 그 주치의 니사 라말라 박사를 붙잡은 이후, 샤미르는 조금은 이상한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수나 마구스에겐 이미 처분이 결정되었다.”

샤미르가 오르마즈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처형을 미루신 것이 제 편지 때문이었습니까.”

“네 의견은 이제 참고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샤미르가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런 강한 부정은 긍정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실제 샤미르는 수나 마구스를 당장 처형하자는 강경파의 거듭된 주장에 ‘올해 내 생일 기념으로 죽일 거야.’라며 계속 버티고 있었다.

“그자는 조만간 머리에 산 채로 못을 박아 죽여버릴 것이야. 그 주치의라는 여자와 함께. 네가 편지에 쓴 대로 ‘실력행사’를 하건 말건.”

샤미르가 마지막 한 마디에서 더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자들은 지금 지하 2층에 갇혀 있어. 전사들이 10명이나 지키고 있으니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불가능해. 오늘은 X도 없고, 방에 보안장치가 오늘따라 가끔 말썽을 일으킨다지만 지하 1층에 있는 제어실만 제대로 돌아가면 아무도 못 들어가지.”

오르마즈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샤미르는 여전히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오르마즈도, 샤미르도, 지금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서로 전하고자 하는 ‘진실’과는 언뜻 동떨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제어실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불가능하겠군요.”

오르마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미르는 그제야 오르마즈를 돌아보았다.

“그간 마르셨군요.”

오르마즈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샤미르는 입가를 파르르 떨 뿐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음고생이 심하십니까. 원치 않는 피를 손에 묻히려니.......”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샤미르가 변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기왕 틀어진 거.......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해. 이번엔.......그게 나일뿐이다.”

“그래서 저와 거리를 두려 그렇게 애쓰십니까.”

샤미르는 별 대답도 않은 채 획 돌아서며 오르마즈에게 나가라고 손짓을 보냈다. 오르마즈는 샤미르의 책상 아래, 쓰다가 버려놓은 몇 장이나 되는 편지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매일같이 그에게 건네던 편지도 이곳을 떠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받은 일이 없었다.

오르마즈는 샤미르가 남극으로 떠나버린 자신을 단 한 번이라도 다시 찾아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오르마즈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빤히 알면서도 단 한 번 찾지도, 연락을 보낸 일도 없었다.

샤미르는 펜트하우스를 막 나서려는 오르마즈에게 마치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이름에 피를 묻히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해.”

순간 멍해진 오르마즈는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니 넌 내가 하는 일에 신경쓰지 말고.......내게 다가오지도 마라. 네 역할은 그 뒤에나 있을 테니.”

오르마즈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샤미르는 작은 캡슐 속에 든 수선화 화분을 만지작거리며 어느새 낮게 울먹이고 있었다. 이 29살 여린 청년의 좁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에서 오르마즈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가가 점점 아버님을 닮아가시는군요.”

오르마즈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심정을 이제 알 것 같아. 다른 형제들을 모두 놔두고 내게만 그토록 집착하시던.......너를 보니까.......”

샤미르의 긴 눈썹이 검고 맑은 눈동자를 천천히 덮었다.

“나도.......너와 2세를 갖고 싶었어.”

샤미르가 마치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르마즈의 대답은 차가웠다.

“전 전하의 2세를 가질 수 없다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왜!”

샤미르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지만 오르마즈는 여전한 표정이었다.

“제 피가 리쿠 가에 섞인다면 어쩌면 파멸의 씨가 될 지도 모르니까요. 글쎄요,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

“무슨 말이냐.......”

오르마즈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샤미르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눈물에 젖어 있는 그이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오르마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트라카 교단 소속 헤네티 특수요원의 소행으로 여겨집니다.”

그날 밤, 샤미르의 펜트하우스로 허둥지둥 뛰어올라온 정보사령관 베흔은 평소 자고 있을 이 시간까지 멍하니 깨 있던 지도자에게 이 충격적인 소식을 알렸다.

“수나 마구스와 그 주치의라는 여자가.......모두 달아났다고?”

샤미르가 짐짓 놀란 듯 다시 물었다.

“예. 지하 1층 제어실의 야근요원을 기절시키고 보안장치와 전원장치가 고장난 틈을 타서 그 둘을 빼갔습니다. 감옥을 지키던 전사들이 살해된 수법을 보아 이곳 내부 구조와 현재 상황에 익숙한 최정예 요원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누군가 정보를 흘린 것 같습니다.”

샤미르는 천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의 소행인지, 그 ‘정보를 흘린 자’가 누군지는 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베흔이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곳 아케메니안 시 전체를 폐쇄하고 당장 수배령을 내려서.......”

“자네 옷 벗고 싶은가.”

“예?”

“지난번 마구스들을 놓친 일로 오르마즈 카파키 장군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모르는가.”

베흔이 순간 움찔했다. 샤미르가 떨고 있는 베흔의 눈길을 살짝 흘겨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부인이 정보를 흘렸다면 강경파들이 자네라고 물어뜯지 않을 것 같나?”

“그건.......”

“자네가 조용히 해결하게. 수나 마구스는 어차피 우리나 교단 양쪽에 모두 쫓기고 있는 자야. 똑똑한 자니 일단 도망친 이상, 한동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다.”

샤미르는 마지막 말과 함께 천천히 돌아앉았다.

“마구스를 대신해 죽겠다는 광신도들은 넘쳐나.”

“알겠습니다. 소장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베흔이 참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샤미르의 이상한 태도에서 베흔은 무언가 미심쩍음을 눈치챘지만 더 이상 따져들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샤미르의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샤미르의 말대로, 마구스를 대신해 죽어 줄 광신도는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렇게 조용히만 처리된다면, 그리고 달아난 수나 마구스가 입만 다물어 준다면, 일단 이 위기는 조용히 넘길 수 있을 터였다.

“하긴, 강경파를 몰아낼 때까지만 버티면 되지.”

베흔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저 빌어먹을 강경파들을 쫓아낼 때까지만.......”

베흔은 허리춤의 칼을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강경파들의 독주가 이 ‘새로운 국가’를 계속 좀먹고 있음을, 그리고 베흔 자신, 그리고 지도자 샤미르를 위해서도 언젠가는 그들 모두를 쓸어내야 함을. 그는 그 ‘시기’만을 세심히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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