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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88화 (487/1,132)

< -- 488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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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을 내보낸 샤미르는 발밑에 펼쳐진 아케메니아 시의 야경을 말없이 둘러보았다. 저곳 어딘가에서 오르마즈가 수나 마구스, 그리고 니사를 데리고 있을 터였다.

“보고.......싶어.”

그는 낮에 오르마즈를 그대로 보낸 자신의 경솔함을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가 앞에 나타난다 해도 그는 자신이 그를 다시 그대로 돌려보낼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구석에 세워진 이젤에 천천히 다가가 보자기를 걷었다.

“기억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유화 안에는 활짝 웃고 있는 오르마즈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샤미르 자신이 이런 그의 모습을 정말로 본 일이 있기나 했던 것인지, 그의 천재적인 머리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움을 잊기 위해, 그는 3년간 머릿속에서 오르마즈의 모습을 지우려 무진 애를 써왔다. 그래서인지 정작 필요한 이 순간, 그의 모습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그림 위를 더듬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지만 역시 그려지는 모습은 없었다. 오르마즈의 다른 표정, 다른 모습, 심지어 둘이 처음으로 서로를 확인했던 그날 밤까지도.

“그런데, 나와의 2세는 싫다고?.......”

갑작스레 배신감을 느낀 샤미르가 이를 악물었다. 샤미르와의 사이에 2세를 절대 가지지 않겠다는 오르마즈의 조금은 엉뚱해 보이는 고집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2세를 얻는 데 목말라있는 샤미르에게 오르마즈의 이런 쌀쌀맞은 태도는 매번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곤 했다.

게다가, 3년만에 모습을 나타낸 오르마즈는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빌어먹을.”

샤미르는 자신의 뺨을 타고 무언가 축축한 것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먹으로 바닥을 쾅 내려치며 다시금 이를 갈았다.

“전하? 괜찮으세요?”

소리에 놀라 안쪽 방에서 뛰어나온 건 유레트였다.

“뭐냐!”

샤미르는 이젤을 보자기로 허겁지겁 가리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순간 손끝에서 따끔함을 느꼈지만 당장은 중요치 않았다.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눈물을 들킨 샤미르가 대뜸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유레트는 처음 보는 그의 이런 눈물에 순간 당황한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샤미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서 있던 유레트는 샤미르의 왼쪽 중지 끝에 맺힌 핏방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둥지둥 구급함을 집어들었다.

“맙소사! 손 좀 보세요!”

“다가오지 말라니까!”

샤미르가 다시 이를 드러냈지만 유레트도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는 샤미르에게 다짜고짜 다가와서는 그의 왼손을 덥석 붙들었다.

“송곳에 긁히셨나 봐요.”

유레트가 이젤 옆 화구통에 꽂혀 있는 작은 송곳을 돌아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붉은 피를 확인한 샤미르도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는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유레트는 소독약으로 재빨리 상처를 소독하고 가아제로 상처를 감쌌다.

“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

“괜찮아.......이 정도는.......”

샤미르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반쯤 드러나 있는 이젤을 문득 올려보았다. 보자기 안의 오르마즈는 여전히 웃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꼭 쥐어주고 있는 유레트의 작고 따뜻한 손을 돌아보며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네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예?”

갑자기 맥이 풀린 샤미르는 유레트의 좁은 어깨에 힘없이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유레트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기대 온 이 지도자의 모습에 놀란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10년이 넘도록 샤미르를 모셨지만 지금껏 그의 손 한 번 잡아 주는 건 고사하고 다정한 말 한 마디 건네 준 일도 없었다.

“저.......전.......”

“왜 하필 너냐고.......”

샤미르가 이를 악물며 다시 중얼거렸지만 유레트는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네게서도 여자의 체취가 날까?”

“예?”

깜짝 놀란 유레트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샤미르의 손을 떨쳐내며 급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샤미르는 자신에게서 떨어지려는 그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이 위생복 좀 벗어 봐.”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도자 전하께선.......”

“옷 벗으라고!”

샤미르가 악을 쓰며 유레트의 위생복을 거칠게 끌러내렸다. 순간 당황한 유레트는 찢긴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을 급히 가리며 뒤로 엉금엉금 물러났다. 샤미르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가 남긴 옅은 살내음을 콧속 깊숙이 들이켰다.

“그래.......네 냄새도 좋군........왜 지금까지 몰랐을까.......여자는 벗겨놓으면 다 마찬가지였나?”

그는 방 밖으로 급히 달아나려는 유레트의 뒤에 대고 말했다.

“빨리 내 앞으로 돌아와라.”

“소독해야 됩니다.”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갔다가는........”

“전하, 이건 아니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내게 거역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선 샤미르는 출구 앞에서 덜덜 떨고 있던 유레트를 대번 끌어안았다.

“전하.......이건 너무 위험.......”

유레트는 자신을 안은 이 무서운 지도자를 잠시 올려보았다. 그도 이 청년이 싫지는 않았지만 지금껏 그저 ‘몹쓸 병에 걸린 불쌍한 남동생 같은’ 느낌 이상은 아니었다. 유레트는 자신의 여자로서의 욕구, 그리고 두려움, 이 사람을 위해서라도 거부해야 한다는 갈등 속에서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나와 이러려고 온 것 아니었나.”

샤미르의 속삭임에 유레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샤미르의 말대로, 유레트가 샤미르를 모시는 길을 택했을 때, 그가 상상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든 그와 관계, 아니 정확히는 그의 아이를 낳아줄 준비를 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면역력도 없는 이 청년에게 이런 행동이 얼마나 바보같고 치명적인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전하, 이건 안 됩니다. 더러워진 몸을 빨리 씻으시고.......”

유레트가 턱을 따닥거리며 샤미르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공포에 질린 이 자그만 여인의 몸 곳곳에서 체취를 느낀 샤미르가 갑자기 입가 가득 미소를 품었다.

“그래.......나도 남자였지. 가끔은 그걸 잊곤 해.......”

“전하, 몸을 생각하셔서........”

마지막 애원을 하던 유레트의 몸이 순간 중심을 잃으며 침대 위에 맥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유레트는 항상 소년 같기만 하던 이 ‘지도자’의 광기어린 눈동자, 처음으로 터져 나온 짐승 같은 본능을 난생 처음 두 눈으로, 그리고 몸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밤 늦게, 두 번째로 펜트하우스를 찾아온 오르마즈는 그 앞에 펼쳐져 있는 옥상의 수선화 꽃밭을 잠시 돌아보았다. 한때 사교의 가장 큰 제단이었던 이곳은 이제 노랗고 하얀 꽃잎으로 온통 뒤덮여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지하 감옥의 수비 상황, 그리고 결함까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나 마구스와 니사를 구해내는 건 베테랑 암살수인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죄 없는 전사들 몇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가 이 한밤중에 샤미르를 찾아온 것도 뒷일을 걱정하고 있을 그에게 결과도 알려줄 겸, 남극으로 돌아기 전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볼 겸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이었다.

“누구냐?”

샤미르의 숙소에 막 들어서려던 오르마즈는 창백해진 얼굴로 펜트하우스에서 나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오, 오르마즈 님?”

잔뜩 흐트러진 옷자락을 거의 걸치다시피 한 몰골의 유레트는 한쪽에 서 있던 오르마즈를 발견하고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는 오르마즈의 허리를 안으며 다짜고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무.......무슨.......”

오르마즈에게 유레트의 설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떨고 있는 그의 어깨, 거칠어진 숨결과 차림새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

“죄, 죄송해요, 오르마즈 님.......이제 어떡하죠? 어떡해야 하죠?”

유레트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오르마즈의 그 강인한 턱에 순간 힘줄이 온통 곤두섰지만 지금의 유레트에게 그런 것까지 눈치 챌 여유는 없었다.

“강간.......이었나?”

오르마즈의 차가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유레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제가 멍청했어요. 저 때문이에요. 제가 바보같이 거부하지 못했어요.......어떡해요........”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관계를 가졌던 유레트는 뒤늦은 후회와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는 오르마즈의 허리를 안은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오르마즈는 유리로 뒤덮인 펜트하우스를 돌아보았다. 샤미르가 저 안에 있다면, 아마도 자신을 보고 있을 터였다. 아니, 그가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을 보고 얼마나 당혹해하고 있을지 본능으로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

“내 의무실에 내려갔다 올 테니 잠깐 기다려.”

오르마즈는 울먹이고 있는 유레트를 구석진 의자에 앉혀주고 뒤로 돌아섰다. 조금씩 휘청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며,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그래.......그분 뜻대로 된 거야.......”

오르마즈는 굳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차피 네가 낳을 것도 아니었잖아.......”

엘리베이터에 오른 오르마즈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감싸 쥐었다. 무언가 축축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 난 약속을 지켰어.......약속을 지켰다고.......”

의사가 펜트하우스에 허겁지겁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오르마즈는 유레트의 옆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괜찮으실까요?”

“모르지.”

오르마즈는 아직 떨고 있는 그에게 시원한 넥타 한 잔을 내밀었다. 유레트는 여전히 겁에 질린 듯 넥타잔을 쥔 채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는 오르마즈가 한쪽 손에 무언가를 쥔 채 계속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의아해하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오르마즈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이거 먹어라.”

오르마즈가 내민 건 작은 알약이었다.

“뭔.......데요?”

오르마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레트도 알약에 쓰여 있는 경고문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그것이 무언지 바로 눈치 챌 만큼은 똑똑한 여자였다.

"설마........"

“이곳에 온 역할을 할 때가 아닌가. 관계 후에는 수정 확률이 조금 떨어진다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조금은 목이 멘 듯 오르마즈의 한 마디에 유레트도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전하의 목숨은 이제 손을 떠났으니 넌 네 할 일만 해.”

오르마즈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보며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시선을 애써 감추었지만 그의 한 손은 떨고 있는 유레트의 좁은 어깨를 꼭 안아주고 있었다.

“다 잘 될 거다. 다 잘 될 거야........”

“알았어요.......”

유레트는 손에 쥔 그 붉은빛 알약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하지만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게 될 새 생명, 지도자의 피를 물려받은 이 핏줄이 밟게 될 미래가 그다지 밝고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그의 머릿속을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유레트는 자신의 어깨를 안은 오르마즈를 다시 올려보았다.

“절.......지켜주실 거죠?”

오르마즈는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레트는 그의 단단한 손에서 묘한 신뢰감, 그리고 믿음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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