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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90화 (489/1,132)

< -- 490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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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와 함께 제파에게 항복 협상을 제안해 봐라’는 카렐의 지시를 받은 제네르는 무슨 이유엔지 잔뜩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는 황도에서 막 도착한 시로에게 무표정하게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 주신 특명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

시로의 대답에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던 제네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솔직히, 밖에 미끼로 걸려든 놈들 절반 이상 죽이기 전까지는 협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제네르가 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평원에 고립된 토벌군 출신 1만의 근위대는 5천의 기병대와 아메샤 스펜타에 포위당한 채 무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폐하께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황에서 협상을 하라고 하신 건지.......내가 제파래도 저 1만을 다 죽였으면 죽였지 협상 같은 건 안 할 거야. 까놓고 말해서 저 분지에 밀고 들어갔다가는 우리도 최소한 3,4만은 죽어나갈걸. 그놈 입장에서야 연합군이 와 줄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되지만.”

“이런 이야기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폐하께서는 상장군님보다 근위대를 잘 아시니까요.”

시로의 조심스런 핀잔에 제네르가 눈을 살짝 흘겼다. 시로의 말대로, 제네르는 병법학에 정통하고 분석에만 탁월한 ‘학자’였지 근위대의 속사정과 무장들의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이번에 무언가 수확이 있을 거라는 뜻이야?”

“제파 그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죠.”

제네르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매번 직관에 의지하는 시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네르의 스타일을 잘 아는 시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 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가긴 나가야지.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니.”

제네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사실 다른 사람의 제안이었다면 ‘집어 쳐’ 하고 접었겠지만 시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계속 짜증을 내자니 어딘지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요.”

시로는 막사를 나서려는 제네르를 뒤에서 조심스레 붙들었다.

“응?”

잠시 머뭇거리던 시로는 막 뒤돌아서려는 제네르의 갑옷 입은 어깨를 덥석 안았다. 시로의 굵고 강건한 팔에 얼떨결에 안긴 제네르는 순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투중이라지만 나한테라도 웃는 모습 좀 보여 봐요.”

시로의 부끄럼어린 부탁에 제네르가 결국 ‘그의 소원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웬일이야. 먼저 요구를 다 하고?”

제네르가 상기되었던 얼굴을 애써 가다듬으며 시로의 단단한 팔뚝을 살며시 짚었다. 시로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내내 굳은 표정 아니면 짜증내는 얼굴밖에 못 봤어요.”

“미안해. 하지만 지금 분위기가 그렇잖아.”

제네르가 가슴을 안은 시로의 팔을 토닥여주며 쓴웃음을 지었다.

시로가 그의 어깨에 살며시 턱을 걸며 속삭였다.

“황궁에 돌아가면요.......큰 전투 벌어지기 전에.......”

제네르는 시로의 얼굴을 슬쩍 돌아보았다. 검고 번들거리는 피부색 때문에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얼굴이 얼마나 화끈거리고 있을지는 말하나마나였다.

“벌어지기 전에?”

제네르가 짐짓 모르겠다는 척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딱 하룻밤만.......같이 있어주면........안돼요?”

“지금까지 한두 번 밤을 같이 있었나? 야근할 때 맨날 같이 있었잖아?”

제네르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키득거렸다.

“그러니까아.......요는 한 침대에서 하룻밤 같이 보내자는 거 아냐?”

제네르가 대놓고 묻자 시로 역시 큭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하고 두 뼘 간격만 유지해준다고 약속하면 까짓거 그러지 뭐.”

“예?”

제네르의 짓궂은 요구에 시로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황한 시로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빤히 쳐다보던 제네르가 그의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속삭였다.

“이럴 땐 그냥 그래준다고 하는 거야.”

제네르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의 시로를 밀어내며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는 여유만만한 걸음으로 막사 밖으로 나섰다.

산마루에 만들어진 임시 회담장에 나온 제파는 거의 1년만에 다시 만난 시로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 오랜 동기 친구와 마주한 제파는 근위대에 사로잡힌 제네르를 찾으며 흐느끼던 이전의 시로 모습을 떠올리려 했지만 이제 그에게서는 동맹군 가디언부대장이며 대장군으로서의 무서운 위압감만이 보일 뿐이었다.

“신수가 훤해졌군.”

제파가 동기를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난 운이 좋았어. 자네보다 먼저 카렐 폐하의 밑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야.”

“먼저?”

시로의 말에 제파가 입을 씰룩거렸다.

“항복을 권유하러 온 거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돌아가.”

“황상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자네가 더 잘 알잖나.”

시로가 쥬스 한 모금을 삼키며 여유롭게 말했다. 협상 당사자였지만 어딘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제파와, 여유가 넘치는 시로의 모습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제파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로를 협박하듯 말했다.

“그래, 잘 알지. 사람고기까지 먹던 파충류 잡종인간 아닌가.”

“괜히 그렇게 비비 꼴 것까지는 없어.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시로가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파는 자신이 이 회담장에 나온 것이 정말 잘 한 짓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소한 적들은 시로를 동원해 자신의 기를 처음부터 죽이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상장군께서 드십니다.”

철크덕거리는 중장기병 갑주의 마찰음이 유난히 묵직하게 들렸다. 문득 고개를 든 제파는 진흙에 더러워진 금발머리를 대강 털어내며 다가오는 장신의 여자 장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왼쪽 눈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큰 흉터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는 파란빛 건조한 눈빛 때문인지, 제네르의 얼굴에는 오늘따라 묘한 냉기가 흘렀다.

제파는 ‘연인’의 얼굴을 보며 어느새 표정이 환해진 시로와, 이 차가운 ‘얼음 여우’ 제네르의 대조적인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군.’

제파는 다른 생각으로라도 자신의 처지를 잠시나마 잊으려 애썼다.

두 사람이 마주하기가 무섭게, 이 둘을 따라온 수행원들은 양측 각각 2명씩만 제외하고 멀찍이 물러났다. 시로 역시 제네르의 수행원이 되어 행여 모를 돌발상황을 대비해 서 있었다. 그에게도 물러나달라고 요구할까 했던 제파는 결국 생각을 접었다.

“2품 병부대신이며 황도의 방어책임을 맡고 있는 상장군 제네르 하크로딘이다. 황상으로부터 이곳의 협상을 위임받았다.”

제네르가 더러워진 투구를 옆에 내려놓으며 제파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실 이 둘 사이에는 악연이 많았다. 전사단 시절, 카인과 함께 본부를 기습해 제네르의 가슴을 베고 중상을 입혔던 것도 제파였고, 얼마 후 셔틀에서 떨어진 그를 사로잡아 베흔에게 고문하라며 넘겼던 것도 그였다. 하지만 지금 둘 사이에는 그런 오랜 원한 따위는 잊혀진 듯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런 것 따위에 연연할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 다시 보니 인상이 꽤 좋군.”

상대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조금 긴장한 제네르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속내를 감추었다. 실제로 그가 마주하고 있는 특등급가디언 제파는 보통의 무장이 아니었다.

291년, 하임달의 결전에서도 오르마즈를 따르던 북부기병대의 필사의 돌격을 결국 저지해 내고 자칫 패전의 위기에 몰렸던 근위대를 지켜낸 것이 바로 제파였다.

지겨웠던 5차 혼란기에도 ㅤㅋㅞㄹ크 정글에서 페로의 가디언부대를 제치고 가장 많은 반군들을 사살한 것이 그의 부대였다. 베흔이 그를 ㅤㅋㅞㄹ크 토벌군 사령관으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이번 전쟁에서 카렐을 상대로 한 토벌전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큰 패전을 기록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만 보면 그는 시로보다도 나은 지휘력을 지닌 무장이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베흔에게 큰 신임을 얻지 못한 채 아직까지 ‘수비형 지휘관’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네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근위대 원정군이 우리 동맹군에 대한 부당한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면, 이번 항명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황실 근위대에서 지금의 지위를 모두 보장하겠다고 황상께서 말씀하셨다. 이 조건은 부대원 전원에게 해당된다.”

제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제네르가 당연히 ‘항복’을 요구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적대행위 중단’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항복을 뜻하는 건가. 항명은 또 무슨 소리냐?”

제파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근위대에는 ‘항복’이라는 표현이 적당치 않다는 것이 황상의 뜻이시다.”

제파의 머릿속은 더더욱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제네르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상께선 현 근위대장의 전횡과 명령체계상 약간의 허점 때문에 부대 전체가 잘못 지휘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또한 상황을 이렇게 만든 근위대장에게 그 책임을 물어 교체를 원하실 뿐이다. 포고령에 따라 근위대는 어차피 황제의 직속부대인데, 부대가 적도 아닌 그 명령권자에게 ‘항복’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도대체 그 새끼는 뭘 생각하는 뭐야.......’

제파는 카렐의 어마어마한 착각, 혹은 과할 정도의 오만함에 순간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제네르의 말에 따르자면, 카렐은 이번의 제위경쟁을 단순히 ‘항명’으로 처리할 뿐, 근위대를 여전히 자신 휘하의 부대로 여기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현 근위대 전체, 아니 제파에 대한 회유의 뜻 또한 함께 담겨있음을 놓칠 제파가 아니었다.

“그런 쓸데없는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우리는 사오시안트에 계신 수우 황제께 충성을 맹세했으니.”

제파가 험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제네르의 제안을 일축했다. 제네르는 그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입가에 조롱어린 미소를 지었다.

“오오, 그 코딱지만한 사오시안트에도 황제가 다 있었던가.”

부아가 오른 제파가 대번 언성을 높였다.

“내 제안을 밝히겠다. 지금 분지 외부에서 교전중인 우리 병력에 대한 공격을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다면, 우리 역시 더 이상의 적대행위 없이 탄현성으로 물러나도록 하겠다.”

제네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자신의 요구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제파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이제 탄현성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적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 공격을 다만 1시간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이곳에서 버티어야 할 최소 8일에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할 말이라고는 이런 궁색한 요구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제네르가 조롱하듯 대답했다.

“탄현성 주둔군까지 3만이 모두 자진해 무장해제를 한다면 고려해보지.”

제네르의 대꾸에 제파가 이를 빠드득 갈았지만 제네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정말 애처로울 지경이군.”

제네르가 투구를 다시 집어들며 제파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욱리하의 얼음도 풀렸고, 그쪽의 연합군은 적어도 7, 8일 동안은 상륙을 하지 못할 거다. 여기서 그동안 살아 버티어주기를 바라겠지만 꿈 깨라. 우리라고 여기 있는 1만 5천으로 너희를 끝낼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

순간 제파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욱리하에서, 황도에서, 아니면 남쪽 관산수변의 신성에 주둔중인 조페의 예비대까지, 이곳의 근위대를 끝장내기 위해 올 수 있는 부대는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리고 8일 후, 연합군이 도하에 성공한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대장, 사오시안트에서 연락입니다.”

하필 그때, 함께 있던 참모가 제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불안감에 떨고 있던 제파는 내심 다행이라 여기며 제네르에게 일단 양해를 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룩스는?”

회담장에서 물러나온 제파는 방금 자신을 불러낸 참모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하지만 그 참모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시 생각하실 여유를 가지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순간 제파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참모는 나쁘게 말해 지휘관인 자신을 믿지 않고 멋대로 농락한 것이었다.

‘이 새끼들이 감히.......’

제파는 자신을 둘러싼 20여명의 참모진들을 빙 둘러보았다. 그들 중 적어도 절반이 ‘제파를 감시하기 위해’ 보내어진 베흔의 심복들이었다.

조금 전의 그 참모가 씽긋 웃음까지 지으며 덧붙였다.

“베흔 대장께선 바깥의 1만군이 전멸당하는 것 정도는 크게 신경쓰지 않으실 것이니 심려를 놓고 당당하게 회담에 임하십시오.”

언뜻 제파를 염려해주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 뜻은 ‘바깥의 1만군을 모두 잃더라도 행여 적과 타협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실제로, 제파가 설사 동맹군과 타협을 결심한다고 해도 이곳 분지 안쪽에 있는 1만 5천의 병력은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들은 한때 황도를 지키던 근위대의 엘리트 부대 1군단이었고, 베흔에게 가장 충성스런 군단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바깥에서 죽어가고 있는 ㅤㅋㅞㄹ크 토벌군 출신의 1만군은 큰 의미가 없는 부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토벌군들은 원래 제후지역 파견군이었다가 이번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급히 불러들인 병력들이었고, 근위대 내에서도 ‘촌놈들’이라며 놀림받던 부대였다.

제파는 무력감을 느끼며 1만군이 죽어가고 있는 평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 같았다면 이 정도에 흔들릴 제파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베테랑 무장이라면 고립된 1만군 정도는 미련없이 버리고 이곳에서 최대한 적의 발목을 잡을 궁리를 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무슨 이유엔지 이번만은 바깥의 1만군이 계속 마음을 괴롭혔다. 그것이 동맹군에서 너무도 당당해진 그의 동기 시로 때문이든, 아니면 ‘황실 근위대’로서 황실 혈통의 황제 대신 남부 출신의 별 관계없는 청년을 황제로 모셔야 하는 그의 심적 갈등 때문이든.

“또다시 회담에 멋대로 참견했다가는 네놈의 모가지를 베어 버리겠다.”

제파가 이를 드러내며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제네르와 시로가 기다리고 있는 천막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딘지 무거운 발을 끌며, 제파는 이제 무언가 결단을 해야 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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