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92화 (491/1,132)

< -- 492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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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트와의 불미스런 사건이 있고 며칠 후, 샤미르는 지독한 고열과 함께 돌연 쓰러져 아케메니안 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그 일이 있던 날, 창 너머로 오르마즈를 보았던 샤미르가 충격에 주저앉았던 것도, 그날 이후 이미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 손가락은 재생할 수 없는 것이겠지.........”

병상에 누워있던 샤미르는 새끼손가락과 약지에 이어 또다시 잘려나간 왼손의 중지를 쳐다보며 눈물을 삼켰다. 지난번 송곳에 깊게 베어나간 그 상처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급격히 악화되었고, 어느새 검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한 상황에서 의사에게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별다른 방어수단도 없이 성관계를 가지셔서 빈약하게나마 작동하던 면역체계가 모두.......”

“아니까 더 떠들 것 없어.”

샤미르가 이를 빠드득 갈며 의사에게 쏘아붙였다. 그의 몸 곳곳에는 붉은 발적과 부기가 있었고, 이유없는 내출혈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 날 그에게로 옮겨진 세균과 바이러스들이 몸 곳곳에서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내가.......얼마나 더 살 수 있겠나.”

샤미르의 물음에 의사가 움찔 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십니다. 이 정도 위험은 이미 몇 번 넘기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보다 안 좋은 건 내가 더 잘 알아.”

갑작스런 오한을 느낀 샤미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펜트하우스 밖, 수선화 꽃밭을 손보고 있는 유레트를 돌아보았다. 오르마즈가 전해준 편지대로라면, 저 여자의 뱃속에는 지금 자신의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인 자신과 달리 세상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고 살 수 있을 건강한 아기가.

샤미르는 이마를 감싸며 다시 눈물을 삼켰다.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이 이토록 한스러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탄식은 그 일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오르마즈는 그 날, 샤미르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당신의 아이이고 후계자입니다. 이제 아버지로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라는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남극으로 돌아가 버렸다.

혈관으로 스며드는 독한 항생제를 느끼며, 샤미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파랗게 질린 의사의 표정만 보아도, 그는 자신의 증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이제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이러셨겠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샤미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역시 생전에 샤미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놈이 다 클 때까지는 내가 꼭 살아있어야 되는데.’라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아왔었다.

“내가.......20년이나 살 수는 없겠지?”

샤미르는 다시 유레트를 돌아보았다. 아기가 커서 자신의 뒤를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앞에 남아있어야 할 최소 20여년의 시간은 그에게 너무도 길고 무거웠다.

“솔직히 얘기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샤미르가 의사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의사는 이전처럼 어색한 표정 위에 애써 웃음을 덧씌웠다.

“항생제를 투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 마시고 며칠만 더 예후를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6달? 1년?”

샤미르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어렸을 때, 실제로 1년 가까이 항생제를 달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 물론, 그 이후 부작용으로 더 오래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때가 샤미르의 일생에서 저승에 가장 가까이 발을 들어놓았던 시기였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샤미르는 막 화단 정리를 마치고 돌아오던 유레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뜬금없이 한 마디를 꺼냈다.

“마시야스를 데려와.”

이복형 샤미르의 느닷없는 부름을 받은 건 이제 겨우 17세의 소년 마시야스 사예브 리쿠였다. 하지만 나이만 ‘소년’이었지, 그는 아직 독신인 형과는 달리 이미 어엿한 한 명의 가장이었다. 그에게는 일리안의 대부호인 이그나토 가 출신의 부인 테나스와 그 사이에 얻은 갓난 아들, 그리고 아직은 태중에 있는 쌍둥이 형제까지 슬하에 두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이른 결혼을 한 것도 사실은 민병대의 권력다툼 때문이었다. 한때 그는 민병대 강경파가 지원하던 ‘지도자 후계자’였다.

사실 에르네스토의 슬하에는 훌륭한 지도자감으로 충분한 자질을 지닌 여러 자식들이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는 어린 나이에 교단 손에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의 각별한 보호 속에 큰 장남 샤미르만이 어렵게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남매들은 하나같이 지도자라기보다는 소시민으로나 어울릴 그저 그런 인물들뿐이었다. 그리고 마시야스 역시도 개중에 조금 낫기는 했지만 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베다이티 사예브와 결탁한 강경파들은 에르네스토의 죽음 직후, 당시 14세였던 그를 이그나토 가 출신의 야심만만한 테나스와 결혼시켜 미혼에, 변변한 후계자조차 두지 못한 샤미르의 세력을 압도하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오르마즈, 베흔을 밑에 둔 샤미르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고, 그들의 과욕은 별다른 이득조차 얻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샤미르가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완전히 굳힌 이후, 강경파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그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이제 그에게는 별다른 지지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형님께서 갑자기 날 왜 부르시지?”

마시야스는 엘리베이터 옆에 함께 선 베흔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조금은 걱정스레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베흔이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겁에 질린 마시야스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아케메니안 시의 민원부서에서 공무원으로 있는 그는 어쩌다 강경파들의 꼭두각시가 되기도 했지만 특별히 못나거나 못된 구석은 없는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에게 쏟아진 과한 기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조혼 때문인지, 그는 17세의 나이에 비하면 제법 생각도 깊고 조숙한 편이었다. 그리고 형이 앉아있는 ‘지도자’라는 자리가 그다지 탐낼 가치가 없는 ‘독배’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미 깨달았을 정도로, 나름대로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그는 강경파들이 자신을 ‘버린’ 것을 내심 다행스럽게까지 여기고 있었다.

“저깁니다.”

베흔의 인도로 샤미르의 펜트하우스 앞에 도착한 마시야스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가 알기로도 저 안에 들어갈 권리를 가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잘 가꾸어진 수선화 꽃밭을 신기한 듯 둘러보던 그는 베흔을 따라 집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응?”

마시야스는 옆에 서 있는 자그만 체구의 한 여자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여자는 무슨 이유엔지 많이 당황한 듯, 제자리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마시야스.”

마시야스는 몇 년만에 들어보는 형의 목소리에 잠시 움찔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거울이 모든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훨씬 힘이 없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형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벽 너머의 형은 그의 핏줄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이젠 잔혹함으로 더 유명해진 ‘핏빛 비수’였다.

“못 보는 동안 정말 많이 컸구나. 네 손으로 자식을 키워서 그러냐.”

형의 의도를 모르는 마시야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형처럼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경솔하거나 멍청하지는 않았다.

“조카 오렌은 잘 자라고 있냐?”

형의 물음에 마시야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직은 갓난아기라 종일 먹고 자는 것이 일과지요.”

“그래, 어쨌든 자식이라는 존재가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모양이지.”

마시야스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거울을 힐끔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억지로나마 힘을 주었던 샤미르의 목소리가 갈수록 더 풀리고 힘이 없어지고 있음을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형이 자신을 부른 것이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 때문일지 모른다는 직감을 얻었다.

“내 용건부터 밝히마.”

샤미르가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주지 마시야스 역시 덩달아 어깨에 힘을 주었다.

“지도자로서, 내 만일을 대비해 후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순간, 마시야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중대한 이야기가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혹시나’하는 기대에 들뜬 마시야스는 숨까지 죽인 채 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형에게서 지위를 ‘물려받는’ 건 강경파들에게 등떠밀려 꼭두각시 지도자가 되는 것과는 차원부터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샤미르는 이런 그의 욕심을 눈치 챈 듯 바로 쐐기를 박았다.

“네겐 애석하겠지만, 내게도 이미 2세가 있다. 그 아이가 내 후계자가 될 것이야.”

마시야스는 힘겹게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반쯤 일그러진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추, 축하드립니다, 형님. 미리 발표하셨으면 콜로니의 큰 경사가 되었을 텐데.......”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직접 아이를 기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널 부른 것이야.”

마시야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샤미르가 짧게 덧붙였다.

“지금 네 옆에 있는 여인의 뱃속에서 내 후계자가 자라고 있다. 딸이고, 내년 가을에 태어날 거다.”

마시야스는 옆에 선 유레트를 다시 힐끔 돌아보았다. 한쪽 구석에 선 베흔 역시도 놀란 표정으로 거울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면역결핍인 샤미르가 저 여인에게 도대체 어떻게 2세를 잉태시켰다는 것인지, 그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샤미르가 인공수정을 시도했다는 말도 들은 일이 없었다.

샤미르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이곳에서는 아버지로서 제 역할을 할 수도,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으니 저 여인을 네게 잠시 맡기겠다. 그래, 표면적으로는 네 첩으로 해 두지. 물론, 내가 친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버리겠다는 건 아니다. 유레트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아이를 내게 데려와 보여줄 것이니 숙부인 넌 수양아버지가 되어 내가 해 줄 수 없는 몫을 해 다오.”

마시야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샤미르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만.......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네가 친아버지 노릇을 하도록 해라.”

형의 조금은 이상한 제안에 마시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샤미르는 그가 채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 몰아붙였다.

“아기의 이름은 ‘유평’으로 정했다. ‘유평 나이킨 리쿠’가 아이의 이름이다. 알겠느냐?”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조금 전보다는 훨씬 신중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여.......내게 불상사가 생긴다면........저 아이가 나이에 상관없이 내 후계자가 될 거다. 내 유서에도 그리 남겨놓을 것이니, 행여 딴생각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다만.......성인이 될 때까지.......‘아버지’인 네가 섭정을 맡는 것까지는 허락하마.”

‘섭정’이라는 말에 마시야스가 움찔했다. 형의 본심이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형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바로 얻을 수 있었다. 형은 어쩌면 유복자가 될 지도 모르는 딸을 위해 미리 안전장치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너 역시도 ‘수양딸’이 콜로니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니,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을 거다.”

샤미르는 마시야스에게 그나마 위로가 될 말을 처음으로 해 주었다. 사실 마시야스에게 ‘친아버지 노릇’을 하라는 것도, 사실은 마시야스에게 책임을 지우기 위한 치밀한 계산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샤미르가 생존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이 아닐 경우를 대비하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아이가 ‘샤미르의 딸’로서 공개되고 자란다면, 샤미르의 사후 야심만만한 숙부와 고모들이 그를 살려둘 리가 없었다.

그럴 바에는 동생들 중 그나마 가장 나은 놈에게 ‘네 자식으로 키워라’며 던져주어 책임과 포상을 동시에 지우는 ‘타협’을 택한 것이었다. 게다가 샤미르가 있는 이 ‘무균실’과 출입할 때마다 온몸에 뿌려야 하는 소독약은 임산부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샤미르는 자신의 아이가 뱃속에서 커가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물론 샤미르의 이런 미끼에도 불구하고, 마시야스의 가슴 속에서는 평생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묘한 야심이 스멀거리며 솟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의 이런 야심을 예상 못했을 샤미르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어본 중 가장 소름끼치는 낮고 음험한 목소리가 뒤이어졌다.

“네가 혹여 주어진 역할을 망각하고 과욕을 부린다면.......오르마즈와 네 옆에 선 베흔이 나를 대신해 너, 아니 네 식솔 모두를 피로 응징할 것임을 잊지 마라.”

“흐음........”

순간 마시야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샤미르의 공식적인 유언이 있고, 덧붙여 다른 사람도 아닌 오르마즈와 베흔 두 사람이 함께 손잡고 샤미르의 딸을 지킨다면 마시야스에게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되는 셈이었다. 베흔은 민병대의 특무대를 장악하고 있고, 오르마즈는 비록 남극에 처박혀 있지만 언제든 그 이름만으로 민병대와 콜로니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자였다. 마시야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야심을 일단 접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형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마시야스는 옆에 선 베흔의 무서운 얼굴을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베흔 역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놀란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샤미르가 이번엔 베흔에게 말했다.

“비밀은 네 무덤까지 가져가도록 해라. 허나, 옆의 내 동생이 지금 나의 뜻을 어긴다면, 그 일가 모두에게 네 칼을 쓰는 것을 허락하겠다.”

“알겠습니다.”

베흔이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는 샤미르의 이 위험천만한 ‘도박’이 성공할 수 있을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그에게 다른 선택이 없었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책임, 그리고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느끼며 입가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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