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4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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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시간이었지만 습한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의 강변은 유난히 쌀쌀했다. 강변의 작은 소나무 숲에 선 밀리타는 입가를 가린 두툼한 머플러를 단단히 조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전 같았으면 많은 상선과 어선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을 아케메니아의 포구는 수성전을 앞둔 동맹군의 보급선박들 외에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다보니 멀리서 보기에는 썰렁하기까지 했다.
황성이 일반인에게 폐쇄된 상태에서 밖으로 나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4품 차관급인 병부 군수부장이라는 고위 직책의 그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일의 특성상 하루에도 몇 번씩은 이렇게 황성 밖을 들락거려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추위와 싸워야 하는 제법 긴 시간이 지난 후, 웬 차 한 대가 강변 비포장길을 따라 모습을 나타냈다.
“빌어먹을, 몇 분이나 기다렸는지 아나? 니딘투벨.”
밀리타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나타내며 코맹맹이소리로 버럭 화를 냈다. 그런 그에게 넉살좋은 웃음을 보이며 차에서 내려선 건 바로 지난달까지 수우의 주치의로 있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5척 9촌(177cm) 정도의, 제국민 기준에서는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 키였지만 과하게 두툼한 뱃살과 불룩한 볼살 때문인지 밀리타보다 거의 두 배는 커 보였다.
“에이, 죄송하다니까요. 가진 거 다 들고 나오라면서요. 그거 챙기는 데만 30분은 걸렸다고요.”
니딘투벨이 턱으로 차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지?”
밀리타가 유난히 목소리에 힘을 주며 물었다. 하지만 그 끝에 가벼운 기침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이죠. 그분께서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면서요. 상부에도 안 알리고 조용히 나왔죠. 그건 그렇고, 정말 오랜만이네요. 스메르디스 님.”
니딘투벨이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밀리타에게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하지만 밀리타는 대번 눈가를 찡그리며 그의 이런 속 보이는 접근을 거칠게 밀어냈다.
“지금 내 꼴 안 보여? 제기랄, 도대체 몇 번째 독감에 걸린 건지, 네 전임자 놈한테만 3번이나 주사를 맞았어.”
“그거야 스메르디스 님 같은 R이나 S에게나 치명적인 거지 저 같은 보통 사람한테야 별 상관없죠.”
“알면서 날 이런데다가 밀어넣다니, 나 같은 건 뒈져도 된다는 거야?”
밀리타가 코웃음을 쳤다. 니딘투벨이 손사래를 치며 키득거렸다.
“하하, 그건 그분께나 불평하시라고요. 제가 결정한 건 아니니까.”
니딘투벨이 밀리타에게 바싹 다가서며 다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전 스메르디스 님 여기에 보내는 데 처음부터 반대했었다고요. 왜 그런지는 잘......”
“닥쳐.”
밀리타가 쌀쌀맞게 대꾸하며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더듬고 있는 니딘투벨을 다시 힘껏 밀어냈다. 그는 니딘투벨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쌀쌀맞게 물었다.
“사오시안트에서는 일 잘 처리했다지?”
“뭐 그럭저럭이요.”
“수우인가 그 새끼는?”
“사실상 감금상태죠. 외부와도 일체 접촉을 못 한다니까. 뭐, 조만간 죽여 없앨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참견할 일은 아니죠.”
니딘투벨이 어깨를 으쓱 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몇 장의 서류를 밀리타에게 내밀었다.
“구르베스 년 도망치기 전에 유전자검사 했던 자료입니다. 수우 그놈의 아들이 뱃속에 얌전하게 들어서 있다죠.”
“이년은 수나 마구스가 직접 지키고 있겠지?”
밀리타가 서류를 가방 속에 쑤셔넣으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모르고 덤볐다가 괜한 우리 암살조만 몰살당했죠. 빌어먹을. 정말 아라무트에서 피다이들이라도 다시 고용해야 하나, 요즘 암살조 놈들 질이 형편없어서.......”
“마구스를 제압하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밀리타가 살짝 눈을 흘겼다. 니딘투벨이 질세라 씨익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하긴, 스메르디스 님이 더 잘 아시겠군요. 이미 몸으로 체험하셨으니.......”
“네놈은 주둥이를 멋대로 놀리는 게 탈이야. 우읍.”
밀리타는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몇 번 찢어질 듯 기침을 했다. 그제야 심각한 표정이 된 니딘투벨은 주머니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백신을 계속 접종하시는데도 또 이런 겁니까.”
“빌어먹을 역가가 너무 빨리 떨어지니 그렇지. 제기랄, 지난번에 코리온 그 새끼한테 옮기려고 일부러 감염되었던 게 도무지 낫지를 않잖아.”
밀리타가 이를 드러내며 씩씩거렸다. 그는 이마를 짚으려는 니딘투벨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레 말했다.
“빨리 치료약이나 내놔. 바이러스가 우글거리는 저 사지에 사람을 몰아넣고 고작 백신만 몇 병 주는 게 어딨냐? 치료약도 아니고.”
“그분께서 스메르디스 님께 치료약은 절대 직접 넘겨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 대세요.”
니딘투벨이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그는 들고 온 작은 손가방에서 붉은빛 주사기 한 개를 뽑아들며 밀리타의 팔을 붙들었다.
“뭐야? 네놈도 날 못 믿는 거냐?”
다시 몇 번 기침을 한 밀리타가 대번 사나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전 명령대로 할 뿐입니다.”
“제기랄, 곧 공성전이 시작되면 난 더 이상 밖에 나올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더 재발할지 모르는데 날보고 죽으라는 거냐?”
“절 황성 안에 들여보내 주시면 되죠.”
밀리타는 자신의 팔을 붙들려는 니딘투벨의 손을 쳐내며 다시 신경질을 부렸다.
“됐어, 모험 같은 거 하기 싫어. 그냥 약만 줘. 내가 직접 주사하면 돼.”
“안된다고 틀림없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가진 것 다 갖고 나오라 말씀하신 겁니까?”
밀리타의 고집에 니딘투벨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주사기를 아예 거두어들였다.
“그러시면 저도 약을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
“네놈은 내가 죽어도 좋다는 거냐?”
밀리타가 눈을 부릅뜨자 니딘투벨이 잠시 자리에서 망설였다.
차갑게 몰아치는 찬바람 속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을 아무 말도 없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니딘투벨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밀리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런데, 왜 지금은 기침을 안 하시죠?”
순간 멈칫한 밀리타의 얼굴이 잠시 붉게 달아올랐다.
“음성도 제가 듣기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듯 하군요. 스메르디스님 같은 R이 독감에 걸렸다면 지금쯤 발음을 하기도 힘들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독감에 걸리신 것이 맞습니까? 혹시.......”
“뭐가 어쩌고 어째?”
의심을 받은 밀리타가 도리어 언성을 높였다. 흥분한 나머지 환자 행세를 하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 화근이었다.
“아무래도 몇 가지 검사를 해 봐야겠군요.”
니딘투벨이 주사기를 품속에 깊숙이 감추며 뒤로 돌아서서 차로 향했다.
“이런, 씨발........”
니딘투벨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밀리타의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차의 짐칸을 연 니딘투벨은 간단한 진찰도구를 찾는 듯 안쪽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밀리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런 ‘딴생각’이 어쩌면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짐칸에 정신이 팔린 니딘투벨은 밀리타의 오른쪽 소매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진단기를 집어들고 획 돌아선 그는 어느새 가슴이 닿을 듯 다가와 있는 밀리타의 모습에 지레 화들짝 놀랐다.
“으, 읍.......”
코끝으로 느껴지는 밀리타의 진한 숨결에 순간 당황한 니딘투벨이 자리에서 움찔거렸다.
“뭐, 뭡니까? 스메르디스 니.........”
“미안하다.”
밀리타가 싸늘하게 말을 건넸지만 니딘투벨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옆구리에 꽂힌 작고 예리한 단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던 그는 밀리타의 핏기어린 시선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늘게 저었다.
“설마.......”
밀리타는 죽어가는 니딘투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옆구리에 꽂은 단검을 힘껏 뽑아내서는 이 남자의 살집이 두둑한 목을 다시 한 번 서슴없이 찔렀다. 니딘투벨은 거친 비명 대신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옛날 같은 바보짓은 하고 싶지 않아.”
얼굴 절반에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밀리타는 이 거구의 사내, 한때 자신과 함께 오르마즈의 주치의였고, 누구보다 충실한 수하였던 이 남자가 천천히 무너지는 광경을 매정하리만큼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내 운명보다 소중한 게 또 있던가.”
완전히 힘을 잃은 니딘투벨의 큰 몸뚱이는 결국 둔탁한 소리를 울리며 얼어붙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밀리타는 니딘투벨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강바람이 몰아치는 이 소나무 숲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빨리, 빨리.”
안정을 되찾은 밀리타는 죽은 니딘투벨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주사기, 그리고 차에 실려 있던 많은 약병과 기자재들을 급히 확인했다.
“그래, 니사 패거리들의 짓이야.”
밀리타는 피 묻은 옷을 벗어 차 안에 던지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래, 그놈 패거리들이 한 짓이야.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지.”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구한 밀리타는 쓰러진 니딘투벨의 시체를 가까운 덤불로 질질 끌고 갔다. 워낙에 무거운 거구인지라 웬만해서는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았지만 절박한 심정의 밀리타에게는 그 어마어마한 무게 따위도 중요치 않았다.
“그래, 좀 있으면 연합군이 도하해 올 테고.......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발견 못 할 거야. 아무도.......”
밀리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니딘투벨의 그 큰 시체를 가지만 남은 덤불, 반쯤 썩어가는 잎사귀들로 허둥지둥 덮었다. 그다지 완벽한 위장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눈에 확 띌 정도는 아니었다.
밀리타는 시체를 끌고 온 자국, 그리고 자신의 발자국을 급히 문질러 지워버리고는 니딘투벨의 차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공포감을 동시에 느끼며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제기랄, 될 대로 되라지.”
밀리타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일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젠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꽉 찬 주사기를 흡족하게 만지작거리며 가속기를 더더욱 세게 밀어 최대한 빨리 황도로 향했다.
자신의 이번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수많은 결과들을 애써 머릿속에서 무시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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