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9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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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앞장서는 페로의 손짓에 1만여의 슈로 기사단이 그를 따라서, 그리고 역시 비슷한 숫자의 슬레이프니르가 베아트릭스의 지휘를 받으며 5천에 불과한 동부기병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도 정신없이 달아나던 경창기병대는 미리 기다리던 새 말로 재빨리 바꿔 타고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동부기병대의 측면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적이 측면을 차단하려 합니다! 이대로는 포위당합니다!”
참모 중 한 명이 넋이 나간 보벤의 팔을 흔들며 악을 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보벤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보벤은 자신의 덜덜 떨리는 시야가 떨리는 가슴 때문인지, 아니면 2만이나 되는 동맹군 기병대의 돌진에 지축이 흔들려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퇴각! 퇴각!”
기세등등하게 돌격하던 5천의 동부기병들은 혼비백산하며 방향을 돌려 다시 강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갈대밭은 불 때문에 어렵습니다! 옆으로 돌아서 가야 합니다!”
보벤과 함께 달아나던 근위장교가 악을 썼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슬레이프니르의 발빠른 경창기병들이 이미 도주로의 측면을 차단하며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정면에는 불타고 있는 갈대밭이, 측면에는 동맹군 창기병대가 버티고 있었다.
“끝장이다......”
자신이 완전히 궁지에 몰렸음을 깨달은 보벤의 눈가에 평생 처음 느껴보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흘렀다.
“이런 우라질!”
강 건너 후방에서 뒤늦게 상황을 보고받은 샤자한 공은 함께 있던 제롬을 그대로 놔둔 채 허둥지둥 탑에서 뛰어내려왔다. 지금 동부기병대 3진 2천이 막 배에 올라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내 말! 말 끌고 와!”
그는 종자의 손에서 투구를 빼앗듯 집어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측근들이 그의 팔을 붙들며 애원했다.
“각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지금 각하께서 나가실 상황이 아닙니다!”
“씨발! 저놈은 내 유일한 후계자라고! 이제 저놈 하나 남았는데 그냥 놔두라는 말이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샤자한 공이 측근들의 팔을 뿌리치며 화급히 말에 올랐다. 당황한 그의 측근들 역시 허둥지둥 말에 뛰어올라 배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멋대로 돌격하다가 남부 보병대와 떨어져버린 보벤은 무려 4배에 가까운 동맹군 기병들에게 놀라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빨리! 빨리 출발해!”
샤자한 공이 강 건너편 상황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둘렀다.
그의 말대로, 장남 아르군이 이미 죽었고, 그 슬하의 남매 중 여동생 이바카는 동맹군에 포로로 잡혀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르군 계보에 한을 품고 있는 카렐이 그를 오래 살려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샤자한 공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행여 보벤마저도 죽는다면 아르군의 계보 자체가 몰락하는 셈이었다.
“빨리! 빨리 가란 말이야!”
샤자한 공이 브릿지에 대고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흔들리는 배 위에 선 그는 검은 연기 너머,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남부보병들! 남부보병들은 뭐 하는 거야!”
도망치던 보벤이 악을 썼지만 남부보병대 선발대는 갈대밭의 불과 사투를 벌이는 것만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5만에 달하는 플라칼 가 보병대 본대는 이제야 막 얼음 위에 발을 디디던 참이었다.
물론, 동맹군 기병대는 보벤이 채 그들을 기다릴 시간 여유를 주지 않았다. 2만의 기병에 쫓겨 다시 강둑 아래까지 내려온 보벤과 그의 기병대는 2만의 기병대, 그리고 불붙은 갈대밭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중장기병대! 전방에서 돌격을 차단하고 경기병대는 2선에서 엄호 사격해!”
보벤이 팔을 내저으며 ‘교과서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동부기병들은 다급한 퇴각명령에 이미 사방팔방 뒤엉켜 있는 상태였다.
“장군님! 그렇게 교과서적인 대응으로는 막아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측면으로 돌격해서 살릴 수 있는 만큼만 살리고.......”
참모의 조언에 보벤은 주변만 두리번거릴 뿐 잠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이, 그들은 대오를 정비하느라 또다시 천금같은 시간을 까먹어야 했다.
“발사!”
다급해진 경기병대 지휘관들이 채 대오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명령부터 내렸다. 하지만 그 사이, 당장이라도 짓밟아버릴 듯 바싹 뒤쫓아온 슈로 기사단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저 배신자 새끼들을 모조리 으깨버려라!”
손수 동맹군 깃발을 쥔 페로의 우렁찬 고함소리도 2만 마리의 말들이 울리는 굉음 속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비탈진 강둑을 온통 은회색 물결로 뒤덮으며 페로를 선두로 쏟아져 내려온 슈로 기사단들은 궁지에 몰린 동부기병대의 불완전한 대오를 마치 둑을 무너뜨리듯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내며 휩쓸었다.
“다 죽여!”
말과 사람의 비명소리, 창과 창이 부딪히며 내는 귀를 찢는 마찰음, 격앙된 욕지거리와 저주의 울부짖음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이 습지를 뒤흔들었다.
“오호! 잘 걸렸다!”
절망감에 멍해져 있던 보벤의 눈에 막 들어온 건 기사단 선봉에서 직접 달려온 거구의 무장이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동맹군의 거대한 깃발을 옆에 있던 기수에게 넘기고는 안장 옆에 있던 소름끼치는 극(戟)을 번쩍 뽑아들었다.
“네놈 낯짝 껍데기를 확 벗겨줄 테니 이리 와 봐라!”
“빌어먹을!”
페로의 굵은 목소리, 그리고 위협적인 돌격에 파랗게 질려버린 보벤은 불타고 있는 갈대숲을 향해서라도 무작정 말고삐를 돌렸다. 보벤의 근위병들이 페로를 막으려 했지만 그의 곁에는 기사단 부단장 라손이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난히 자그만 몸 덕분에 빠른 라손은 페로보다 몇 발짝 앞서 돌진하며 앞을 가로막는 동부 근위병 두 명을 순식간에 말에서 떨어뜨렸다.
“어딜 도망가냐! 황상 처소에 감히 불을 질렀으니 네놈도 불맛 한번 봐야 할 것 아니냐! 이 십새끼야!”
페로는 이번에도 쉴 새 없이 욕을 퍼부으며 라손이 뚫어놓은 길을 지나 보벤의 뒤를 쫓았다. 겁먹은 보벤이 뒤를 휙 돌아본 순간, 무언가 번쩍 하는 것이 그의 눈앞을 스쳤다.
“으악!”
보벤이 몸을 잔뜩 움츠리며 머리를 싸쥐었다. 페로의 극 날이 스쳐간 투구의 한쪽이 산산조각 부서져 너덜거렸지만 다행히 머리만은 제자리에 그대로 붙어있었다. 잠시 아찔했던 보벤은 몇 명의 근위병들이 뒤를 막아주는 새 방향을 돌려 갈대밭 측면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미 적들의 토끼몰이에 표적으로 잡혀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것들!”
그는 장군을 상징하는 케이프와 계급장까지 떼어 내던지고 필사적으로 말을 몰았다. 그때, 측면에서 동부기병들을 차단하고 있던 슬레이프니르 소부대가 눈에 들어왔다.
“전방에 적 경기병들입니다! 방향을......”
함께 달리던 근위기병대 장교가 보벤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당황한 보벤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계속 말을 재촉했다.
“경기병들 따위는 일단 돌파하란 말이야!”
보벤은 전방의 그 ‘소부대’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따위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검은 갑주, 그리고 황룡과 백마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여자 무장이 히죽거리고 있었다는 것도.
“저기 귀한 손님께서 오신다.”
슬레이프니르 단장이며 대장군 베아트릭스는 한 팔에 자리드를 뽑아들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보벤은 중장기병들의 돌격에 경기병들이 당연히 도망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말에 더 속력을 가하며 전방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말의 속도를 늦추지도 않은 채 안장에 몸을 바싹 붙인 그대로 어깨를 뒤로 꺾어 발사 자세를 잡았다.
“조심하십시오!”
보벤의 근위병들이 상대의 망토에 새겨진 백마 문장, 그리고 황실 사람임을 상징하는 금빛 용 문장을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그의 손에 들린 묵직한 자리드가 보벤을 향해 직사로 바람을 갈랐다.
“악!”
판단력을 잃은 채 도망치고 있는 보벤을 대신해 그의 근위병들이 재빨리 방패를 치켜들어 막으려 했다. 하지만 사람이 던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강력한 위력의 자리드는 근위병의 방패 하나를 산산조각내고 비껴나가 이번엔 보벤의 말을 덮쳤다.
“장군님! 장군님!”
어깨에 자리드가 박힌 보벤의 말이 순간 깜짝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보벤이 고삐를 바싹 쥐며 말 위에서 버티려 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말은 결국 버티지 못한 채 한쪽 다리가 꺾이며 쓰러지고 말았다.
“에익! 썅!”
흙바닥에 얼굴부터 내팽개쳐진 보벤이 투구를 벗어 집어던지며 욕을 내질렀다. 페로의 공격으로 이미 산산조각이 난데다가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보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보벤이 다시 탈 말을 찾았지만 이미 죽어 쓰러진 말들을 빼면 빈 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강력한 ‘동부기병’답게, 그의 근위기병들은 전방에서 동맹군 기병들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며 그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장군님! 갈대밭으로라도 도망치십시오! 최대한 속도를 붙여 돌파하시면.......”
뒤로 물러난 근위장교 한 명이 그에게 자신의 말을 내주며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자리드에 뒤통수를 명중당한 그 장교는 입에서 분수처럼 피를 뿌리며 보벤의 가슴에 천천히 쓰러졌다.
“으.......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잠시 노랗게 질려있던 보벤은 조금 전 집어던진 자신의 투구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저기다! 저기 보벤 놈이 있다!”
북부 사투리가 섞인 거친 고함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린 보벤은 팔에 안긴 장교를 바닥에 동댕이치며 허둥지둥 말에 뛰어올랐다. 잠시나마 버티어주었던 그의 근위기병들 역시 거의 제압되어가고 있었다.
“저기! 저기!”
보벤은 죽은 장교의 말대로, 불타고 있는 갈대밭을 향해 말에 무조건 박차를 가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설사 투항한다고 해도 동부에 잔뜩 독기가 오른 카렐이 그를 살려줄 리가 없었다. 아니, 편하게 죽여주기나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도망가다가 죽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이런, 씨발!”
눈앞에 보이는 뜨거운 불길에 보벤이 벌벌 떨며 몸을 움츠렸다. 그는 펄럭거리는 망토를 풀어 급히 얼굴을 가렸다. 홧김에 투구를 내버린 것이, 아니 페로 때문에 투구가 부서진 것이 화근이었다.
“이놈!”
유난히 빠른 템포의 말굽 소리와 탁한 여자 목소리에 보벤이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았다. 백마가 새겨진 검은 갑주, 그리고 ‘대장군’임을 나타내는 견장과 황실을 상징하는 금빛 용 장식의 망토를 동시에 하고 있을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보벤은 지금 자신의 뒤를 쫓는 무장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 아르군을 죽였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원수를 갚을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몇 명 되지 않는 살아남은 기병들이 지금껏 저항하고 있었지만 동부기병대의 전멸은 이미 불을 보듯 뻔했다.
“서지 못해!”
베아트릭스의 날카로운 외침에 보벤이 몸을 바싹 움츠렸다. 자신도 아버지처럼 투창에 맞아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에 온몸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 3명 정도의 동부 근위기병들이 반대편에서 달려오며 베아트릭스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이런, 제기랄!”
기회를 얻은 보벤이 방향을 조금 돌리며 악을 쓰고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동부 근위병들에게 잠시 가로막혔던 베아트릭스가 자신의 근위병들에게 적들을 떠넘기고는 도망치는 보벤을 향해 다시 투창을 겨누었다. 하지만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도망치는데다가 앞을 방해하는 동부 근위병, 그리고 짙은 연기 때문에 제대로 겨냥을 할 수가 없었다.
“갈대숲 안으로 도망칩니다!”
누군가 연기 속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다급해진 보벤이 말을 바삐 몰아 불타고 있는 갈대숲 안에 무작정 뛰어들고 있었다. 저대로 놔둔다면 시커먼 연기 속의 그를 쏘는 것은 더 어려워질 터였다.
“비켜!”
베아트릭스는 앞을 가로막는 적 근위기병을 어렵게 떨쳐내고는 짙은 연기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형상을 향해 거의 직감적으로 자리드를 힘껏 날렸다.
보벤은 말의 눈, 그리고 자신의 입과 얼굴을 가린 채 불구덩이 속에 확 뛰어들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군마라서 그런지, 바로 불에 놀라 날뛰지는 않았지만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불꽃의 지독한 열기는 갑옷이 일단 막아주고 있었지만 말, 그리고 얼굴이 문제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숨통을 막을 듯 죄어오는 공기를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이 말이 불꽃 너머 남부보병들을 향해 다만 몇 발짝이라도 더 나아간 후 쓰러져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불꽃 속을 잠시 가로질러 달려가던 그는 불안한 느낌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으악!”
연기 속에서 나타난 검은 형상에 놀란 보벤이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공중에서 날카롭게 내리꽂힌 자리드는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찢어내고 뒤이어 말의 뒷덜미를 덮쳤다. 불 속을 가로질러 맹렬하게 달리던 말은 순간 중심을 잃으며 한쪽으로 휙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말 위에 있던 보벤 역시 중심을 잃으며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으, 으아아아아!!!!”
공중을 붕 날아간 보벤은 불꽃이 훨훨 타오르고 있는 갈대더미 위에 그대로 동댕이쳐졌다. 그리고 무서운 열기와 불꽃은 자신의 위에 던져진 이 불쌍한 희생물의 얼굴, 그리고 갑옷이 부서져나간 한쪽 가슴과 어깨를 사정없이 태워가기 시작했다. 몸부림치며 불꽃 속을 빠져나온 보벤은 타들어간 얼굴을 움켜쥔 채 마구 비명을 지르며 남부 보병들이 있을 강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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