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4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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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언제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까?”
“훗.”
셔틀 화물칸 구석에서 ‘8그룹’ 동기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베흔은 누군가의 물음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명색이 ‘민병대 특무대장’이 타기에는 어딘지 안 어울려 보이는 이 허름한 화물셔틀은 베흔과 그의 동기 X들을 실은 채 심야의 짙은 어둠을 뚫고 남쪽으로 바삐 향하고 있던 차였다.
“5일을 못 넘긴다는 데 내 50골드를 걸지.”
X 두 명이 카드 한 장을 판에 내놓으며 키득거렸다.
“너무 길어. 3일에 100골드.”
함께 있던 즈바크와 서너 명이 마른 고기를 씹으며 냉큼 다른 카드를 내놓았다. 한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베흔이 낄낄거리며 덧붙였다.
“5일만 넘기면 다 내 껀가? 그럼 기왕이면 큰 배당에 걸지.”
민병대 특무대의 최정예요원인 이 ‘8그룹’들은 그 숫자에서는 다른 X 동기무리와 비교가 될 정도로 적은, 고작 2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X의 최고레벨 개량형이었고, 그간 교단과의 싸움에서 가장 어려운 임무들을 두루 수행하면서 지금은 특무대의 요직들을 두루 차지하고 핵심 파벌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리더인 베흔을 필두로 다른 X동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단합력을 과시하면서 조직 전체를 사실상 쥐락놔락하고 있었다.
이런 ‘8그룹’들이 이 한밤중에 위장된 셔틀을 타고 비밀리에 어딘가로 움직이는 것도 이들이 농담처럼 씹어대고 있는 바로 그 지도자 샤미르의 각별한 ‘특명’에 따른 것이었다.
“베흔 너 돈에 깔려 죽을 지경인가 보다?”
동기 한 명이 손에 들린 10장이 넘는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며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손에 5, 6장 집을 카드가 이들의 손에는 그렇게 많이 들려 있었지만 워낙 큰 손 덕분인지 별로 어색해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이번 셔틀에 앉아있는 7명의 8그룹 X들의 손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물론, 자로 잰 듯 똑같은 6척 7촌(201cm) 정도의 건장한 키는 앉아있거나, 서 있거나, 심지어 누워 코를 골고 있는 제각각의 자세 때문에 그다지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글쎄, 사람 죽는 거야 팔자소관이니.......그걸 누가 알겠어.”
베흔이 카드 패를 내던지며 판에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동기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그는 품에 품고 있던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 다시금 읽어보았다 지난밤, 샤미르가 그를 불러들여 특별히 건네준 이 ‘친서’에는 콜로니 전체를 뒤흔들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딸에게 줄 최후의 선물인가.”
베흔이 코웃음을 치며 친서를 다시 품에 감추었다. 샤미르의 이번 ‘결단’은 사실 그간 베흔이 구상해 왔던 것과도 어느 정도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가 동기들을 데리고 이 위험한 길을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 왔어.”
조종을 맡은 동기의 고함소리와 함께 덜컹 하는 요란스런 진동이 셔틀을 뒤흔들었다.
“씨발, 저 새끼, 일부러 그런 거지? 판이 엉망이 됐잖아, 한참 잘 풀리고 있었는데.”
즈바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거친 X들의 고함소리와 짜증이 화물칸을 뒤흔드는 와중에 베흔은 그곳을 혼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이 비밀스런 셔틀이 선 곳은 대사막 한중간, 작은 오아시스변이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마찬가지로 허름한 화물셔틀 한 대가 먼저 와서 이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겐 자네가 초면이지만 자네에겐 내가 초면이 아닐 수도 있겠군.”
상대편 셔틀 앞에는 주름이 그득한 길쭉하고 표독스런 얼굴을 한 한 남자가 사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는 셔틀에서 내려선 베흔을 바로 알아본 듯, 묘하게 기분 나쁜 웃음을 입가에 품었다. 남자의 이마 중간에 박힌 초록빛 에메랄드와 뿔 달린 말의 형상을 보아 그가 죽음을 관장하는 교단의 제4신 ‘스루바라’의 간택자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글쎄요, 전 목표물 외에는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만.”
자신의 ‘암살수’ 전적을 바로 집어내 비꼬는 이 오만한 상대에게 베흔 역시 져 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대꾸에 마주서 있던 남자, 코메트 부대 사령관인 테번 델루지가 입가를 잠시 씰룩거렸다. 그는 상대의 기세를 죽이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은?”
베흔은 비무장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듯 두 팔을 벌려보였지만 테번은 그다지 감흥도 없는 듯 콧방귀만 끼었다. X들이라면 굳이 ‘무기 따위’가 없이도 웬만한 사람들은 주먹 한 방, 손놀림 한 번만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구차한 인사말이나 안부 같은 건 필요 없는 상황이라 생각되니 본론부터 꺼내겠습니다.”
베흔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시작을 끊었다.
“반토막난 교단에 계속 충성을 바치시는 것도 지금쯤 염증이 나시겠죠?”
베흔의 선제공격에 테번이 살짝 눈을 치켜떴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접어들면서 곤혹스러워진 민병대와 마찬가지로, 테번에게도 역시 상황이 골치아프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가 5명의 마구스들을 버려둔 채 수도 아케메니아 시를 떠날 때만 해도 민병대가 곧 내분을 일으켜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민병대는 비록 내분으로 썩어 문드러져가기는 했지만 몇 년째 수도를 차지한 채 이젠 ‘기득권 세력’으로서의 자리를 조금씩 굳혀가고 있었다.
물론 교단의 영향력은 서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강력했지만 사실 그들은 머릿수를 빼면 그다지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게다가 테번에게는 오르마즈나 베흔같이 언제든 전세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맹장 또한 없었다. 게다가 지금껏 강자이며 기득권자로서의 위치에만 익숙해있던 그와 수하들도 1년, 2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지치고 분열되고 있었다.
테번이 베흔과 여전히 거리를 유지한 채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 살인마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것도 진절머리날 텐데?”
“그보다는 저 덜떨어진 강경파 놈들이 더 짜증나지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그놈들이니.”
베흔이 슬쩍 웃으며 샤미르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옆으로 흘려냈다.
“까놓고 말해, 그쪽이나 우리나 그다지 달갑지 않은 동지 하나씩을 어떨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베흔의 이 은밀한 제안에 테번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 지도자가 동의한 것인가? 내 알기로 그자도 강경파를 그다지 반기지는 않는 것 같던데.”
“물론.”
베흔은 품 속에서 샤미르의 친서를 꺼내 보이며 냉큼 대답했다.
“그분 처소에 드나들며 명령을 수납할 수 있는 두 명 중 하나가 바로 저라는 것은 아실 텐데요. 헤크마 녀석이야 오르마즈가 밀려나면서 운 좋게 들어간 것뿐이고 그분이 원래부터 믿었던 건 저와 오르마즈 두 사람 뿐입니다.”
베흔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테번의 옆에 있던 부장에게 다가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바싹 긴장한 그의 손에 샤미르의 친서를 건네주었다.
“이걸 보면 아실 겁니다.”
베흔이 건네준 친서를 몇 번이나 거듭 읽어본 테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몇 분 후, 다시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뭐, 너희가 지금은 기득권 세력이니 먼저 조건을 제시하시지. 여긴 구체적인 조건은 안 나와 있는데?”
“지금 데리고 계신 마구스 5명을 처치해주시죠. 대신 델루지 가에 비엔과 칼릴, 이베르 지역의 세습 행정권을 드리죠.”
‘비엔 지역’이라는 말에 테번이 눈을 부릅떴다. 비엔은 테번의 고향이기도 했고, 다하카르에게 봉헌된 이곳 아케메니아에 이어 제2신 트라카에게 봉헌될 만큼 제국에서 가장 비옥한 농업지역이었다.
“세습 행정권?”
테번이 꺼칠한 턱을 어루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행정권’이라는 애매한 표현 밑에는 모양새야 어쨌든 중앙정부의 통제를 어느 정도 받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의 말에서 테번은 샤미르가 기존의 중앙집권제 주장에서 한 발 물러서서 ‘연방 군주제’로 선회했다는 짐작을 바로 얻을 수 있었다.
“너희 강경파들이 원하는 봉건제를 받아들이느니 중앙집권제에 약간의 타협을 본 것인가?”
테번의 물음에 베흔은 별 대답도 없이 키득거리기만 했다. 물론 테번 역시 자신이 ‘세습 행정관’ 따위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을 것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봉건제가 싫어 자신과 타협하겠다고 나선 저 ‘무식한 암살수 출신’ X에게 벌써부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다시 ‘독립세력’을 선언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자신만의 공인된 지역을 갖는 것이 더 중요했다.
어쨌든, 예전의 권위를 잃어가는 교단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느니 기득권자가 된 TSG와 결탁해 ‘확실한 자신만의 세력권’을 받는 것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마구스 5명을 죽이라는 건 사실상 그들의 식솔들, 그리고 그가 지키고 있는 교단 잔여세력 전체를 처단해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베흔이 말을 이었다.
“약속을 이행해 주시는 대로, 아케메니아에 남은 코메트 병력을 모두 데리고 그곳으로 가십시오. 떠날 때, 일체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죠.”
“비엔 지역은 기존 토호들이 많아. 그네들 대부분이 이미 너희 강경파와 손잡았는데 그곳에서 강경파 민병대와 또 싸우라고?”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때쯤엔 제가 거사를 일으킬 것이니 강경파는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겁니다. 비엔 지역의 토호 세력은 장군께서 지지든 볶든 다 잡아 족치시든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곳에 주둔한 우리 민병대 온건파 요원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부대 배치든, 요인 정보든,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테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베흔의 온건파 민병대가 그곳에서 자신을 돕는다는 건 어찌보면 양날의 칼이었다. 그들이 당장 그곳의 토호 세력을 제압하는 데야 쓸모가 많겠지만 그 이후, 테번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장기적으로는 ‘독립국가’를 시도할 때, ‘중앙정부의 하수인’인 그들은 자칫 눈엣가시가 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 사이에 넌 이곳 아케메니아에서 ‘일’을 벌이고?”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베흔이 냉큼 대답했다.
“한쪽이라도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모두 엉망이 되어 버린다는 건 잘 알겠지?”
테번이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베흔 역시 이번만은 진지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베흔이 등 뒤에 손짓을 보냈다. 그의 손짓에 즈바크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 온 샤미르의 이복동생 2명을 앞세우고 불쑥 나섰다.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그들의 손목에는 이미 밧줄까지 꽁꽁 묶여 있었다. 베흔이 그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들 모두의 목숨을 걸고.”
낮은 한숨을 내쉰 테번 역시 뒤에 손짓을 보냈다. 이번에 나선 건 그의 친동생이며 코메트 부대의 군단장인 마누엘 델루지 중장이었다. 이번 은밀한 약속의 담보물이 된 그들은 조금은 머뭇거리며 무거운 걸음으로 적진을 향했다.
인질을 확보한 그들은 별다른 대화를 더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질을 데리고 말없이 자신의 셔틀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양쪽으로 갈라지며 사라져갔다. 누군가 본다면 상당히 어색하다고 할 이 ‘담합’이 미래에 탄생할 ‘강력한 통일제국’을 틀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희미하나마 인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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