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6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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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것도 아닌 놈들이 쓸데없이 콧대만 높아가지고.......”
헤크마가 입을 씰룩거렸다. 바니샤드가 자리를 비우면서 유학자들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지만 콜로니 곳곳에서 모여든 지역 유지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다지 자리가 휑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유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동맹세력인데.......”
의장석으로 걷던 헤크마는 측근의 물음에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다 끝나고 나서 그 잘난 ‘지도자’님한테 가서 서명만 받으면 되지.”
“순순히 해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바깥출입도 못 하는 병신새끼 협박하는 게 어렵나?”
헤크마가 킬킬대며 의장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저놈들은 누가 들여보냈어?”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회의실 곳곳에 서 있는 특무대 소속 X들 40여명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전사들은 어디 있고 다 X들 뿐이야? 저 겁나는 놈들이 사방에 서 있으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기분 좋아할 것 같아?”
그는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베흔에게 X들을 이끌고 아케메니안 궁 서쪽 욱리하변---부근에서 가장 호젓한---을 지키라며 멀찍이 보내놓은 후였다. 헤크마는 강경파와도, 온건파와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 회색분자, 그리고 민병대 특무대가 자칫 회의장의 분위기를 흐려놓지 않을까 잔뜩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였다.
“욱리하변에서 민간인들의 소요사태가 벌어져서 베흔 소장이 정규군 전사 200명을 빌려갔다고 합니다. X들을 대민 활동에 투입하는 건 금지되어 있어서 병력을 교체해야 했습니다.”
“빌어먹을, 저 새끼들 다 쫓아내고 베흔 그 새끼 좀 연결시켜 봐.”
부름을 받은 베흔이 십여명의 ‘8그룹’ 동기들과 함께 회의실에 나타난 건 헤크마가 ‘연결시켜라’며 명령을 내리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심 깜짝 놀란 헤크마는 ‘저놈이 날아서라도 왔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안 그래도 헤크마의 지시를 받은 특무대 X전사들이 막 회의실을 비우려던 중이었다.
회의장에 든 베흔은 회의실을 나서려던 X들에게 계속 자리를 지키라며 다시금 손짓을 보내고는 의장석에 선 헤크마에게 별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헤크마는 그를 보자마자 대뜸 역정부터 냈다.
“내가 연결만 시켜 달랬지 언제 직접 오라고 했냐? 그리고, 내 네 부대원에게 궁 서쪽 강변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던가? 왜 멋대로 위치를 이탈해서 여기로 오는 거냐? 거기로 불순분자들이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헤크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베흔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능청스레 되물었다.
“절 언제 부르셨습니까? 그런 연락은 못 받았는데요?”
“뭐야, 내가 조금 전에.......잠깐, 그럼 네놈은 왜 온 건데?”
헤크마는 그다지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무기에 손을 가져가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빨리 네 위치로 돌아.......”
막 호통을 치려던 헤크마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의장석 옆에 선 베흔은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이 오만한 상관의 목을 그 어마어마하게 큰 왼손으로 덥석 움켜쥐었다. 그의 공격을 예상했던 헤크마였지만 X의 빠른 움직임을 감히 막을 수는 없었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자리에 별 생각 없이 앉아있던 각 지역 대표들이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개중에는 무기를 뽑아들며 뛰어나오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베흔은 회의장이 혼란에 빠져들 만큼의 시간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
베흔이 피식 웃으며 오른손에 쥔 피범벅의 단검을 혀로 한 번 죽 핥았다. 단칼에 배부터 가슴까지 깊숙이 두 조각이 나버린 헤크마는 갈린 배에서 붉은 내장과 피를 쏟아내며 의장석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맙소사, 맙소사.......”
죽인 베흔에게서도, 죽은 헤크마에게서도 아무런 설명, 말싸움도 없었다. 회의실의 사람들은 순간 모든 판단력을 잃은 채 멍해져 있었다. 아니 지금 벌어진 사건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판단할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무기를 뽑아들었던 사람들, 심지어 헤크마의 경호원들조차 차마 뛰어나갈 생각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물론, 베흔의 곁은 이미 그의 동기 X들이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지만.
“지도자의 결정이시다.”
베흔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어 회의실을 빙 둘러보았다. 콜로니 각지, 그간 민병대에 복속된 지역들의 150여 유력인사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사실상 강경파에 가장 협조적인 수도 아케메니아, 그리고 비엔과 그 일대---이후 ‘남부’라고 불리게 될---의 대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거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콜로니의 두 번째 중심지인 코윈의 상공업자들은 ‘돈’을 위해 정치 문제와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관례였고, 요동을 비롯한 ‘유목민 지역’ 사람들은 콜로니 중앙정부의 헤게모니 따위에는 애당초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아켐을 위시한 테나토, 아라무트, 푸스타트를 대표해 참석했던 유학자들은 조금 전 바니샤드를 따라 모두 나가버린 후였다.
베흔은 조금 전까지도 이곳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특무대 X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짧지만 간단명료한 명령을 내렸다.
“지도자의 뜻이시다. 이곳에 있는 반역도를 모두 없애라.”
‘명령대로’ 따르도록 훈련된 이들 40여명의 X들에게 자질구레한 설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들은 명령을 받은 즉시 기계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회의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경호원과 수행원들에게 악 소리를 내며 돌진했다.
“죽여!”
베흔과 함께 들어선 8그룹 동기들 역시 각자의 무기, 그리고 석궁을 일제히 뽑아들고 헤크마의 경호원들을 겨누었다.
“반란이다! 반란이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지만, 도대체 ‘누구’의 반란이라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원래 있던 40여명, 그리고 베흔과 함께 들어온 십여명의 8그룹 X들에게 이 밀폐된 회의실 안은 말 그대로 살육의 잔치였다. 강경파 소속 전사 100여명이 저항하려 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출입문이라는 출입문은 이미 8그룹 X들이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다.
“이거 근사한데.”
헤크마의 보좌관을 한 주먹으로 으깨어버린 베흔은 그의 가슴에 안겨 있던 큰 양손검을 집어들었다. 사실 헤크마가 야전형 장교가 아니다보니 타르서스 산 이 명검도 지금껏 그저 주인의 위엄을 위한 장식품일 뿐, 단 한 번도 누군가의 피맛을 본 일이 없었다.
“호오.......”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유난히 두툼한 칼집 안에는 마치 불꽃 무늬처럼 우둘두둘하게 만들어진 소름끼치는 붉은 날이 품어져 있었다. 그 광택과 날렵한 곡선, 그리고 표면에 새겨진 미려한 바람 문자에 도취된 듯 잠시 칼날을 더듬던 베흔은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날에는 ‘피의 권위로써 세상을 지배한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X들의 공격에 놀라 도망치는 수많은 유력가들과 겁먹은 강경파 민병대원들까지, 이 아름다운 칼의 첫 희생물이 될 대상들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이.......이.......”
아직까지 그 질긴 숨이 가늘게 붙어있던 헤크마가 몸을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순간 입가 가득 미소를 품은 베흔은 그의 멱살을 붙들고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래, 너 정도는 돼야지.”
꿈틀대는 헤크마를 공중에 힘껏 내던진 베흔은 자신의 새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산 짐승을 도살하듯 희생물의 어깨부터 허리까지를 대각선으로 단칼에 갈라냈다. 흩어지는 살점 조각과 피보라를 온몸에 온통 뒤집어쓴 베흔은 이제 더 이상 목표를 가리지 않았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구나!”
베흔은 출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비엔 주지사와 그 경호원의 허리를 단칼에 동강내며 기쁨어린 함성을 내질렀다. 그는 수십의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도망치려 애쓰던 철문 앞으로 달려가 그 무자비한 칼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쓸데없는 짓이다!”
로브 차림의 의원 한 명의 허리를 한쪽 발로 으드득 짓밟아버린 베흔은 상관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그 보좌관의 머리를 단칼에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마치 사람이 아닌 벌레라도 때려잡듯, 그는 몰려있던 그 많은 사람들을 칼로 쳐 토막을 내며 사방으로 내던졌다. 그와, 그를 따라온 8그룹 멤버들은 온몸에 피, 그리고 내장을 온통 뒤집어쓴 채 유지들과 강경파 인물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말 그대로 때려잡았다.
“ㅤㅌㅞㅅ.”
마지막 남은 의원의 잘린 머리를 의장석 쪽으로 집어던진 베흔은 어느새 시체, 아니 조각난 살덩어리와 피로 뒤범벅이 된 회의실의 황금빛 벽과 어질러진 회의실을 빙 둘러보았다. 그는 손의 피를 툭툭 털어내고는 주머니에서 할룩스를 꺼내들었다.
“그쪽은?”
모든 것이 생략된 물음이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충분했다. 할룩스 안에서 나타난 건 2명의 인질들과 함께 적진, 아니 코메트 부대 쪽에 간 그의 동기 즈바크였다. 그는 이미 몸에서 떨어진 채 장대 끝에 꽂혀 있는 5명의 마구스들, 그리고 거의 100여명에 달하는 성직자들의 머리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테번 이 새끼 정말 인정사정없대? 오늘 아침까지 낄낄대고 밥까지 같이 먹어놓고서는 목을 그냥 짤라 버리던데?”
베흔이 입가의 피를 손으로 훔쳐내며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곳에서 강경파들이 도살당하는 동안, 적 진영 역시 정변으로 완전히 뒤집어진 상황이었다. 동료 마구스들을 이곳 아케메니아에 버려둔 채 떠났던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그토록 믿었던 코메트 사령관 테번의 손에 생각지도 못했던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즈바크가 손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놈들 비엔으로 간다고 한참 짐 꾸리는 중이야. 약속대로 잘 되어가는 것 같아. 그건 그렇고, 교단은 이제 끝인가?”
“아마도. 강경파도 함께.”
즈바크의 물음에 베흔이 성의없이 대답했다.
“강경파 쫄따구들 남아있겠지만.......대가리가 없어졌으니 새끼들 정신 차리기 전에 싹 쓸어버려야지. 그러니 테번 그놈도 한 시간이라도 빨리 비엔을 장악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베흔은 십여명의 ‘8그룹’ 동기들과 함께 잠겨있던 회의실 철문을 활짝 열었다. 회의실 밖에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해아는 민병대 전사들과 X들, 그리고 구경꾼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구경꾼들은 마치 저승에서 온 괴물같이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이 거구의 전사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따를 게 아니라면 당장 꺼져.”
베흔은 한 손에 피묻은 검을 든 채 테라스로 성큼성큼 걸었다. 거대한 창문 밖으로는 아케메니안 궁의 큰 광장, 그리고 그곳을 향해 진군중인 그의 직속 특무대 전사들과 X들의 당당한 모습이 길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이젠 새 세상이다!”
베흔이 헤크마의 검, 아니 이젠 그의 것이 된 플람베르주를 번쩍 치켜들며 광장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큰 소리로 함성을 올렸다.
최소한 이번만큼은, 베흔과 테번은 모두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새로운 ‘제국’은 누군가의 말처럼, 떳떳하지 않은 야합과 피, 배신을 통해 태어났지만 이 둘 모두 그것을 개의치는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대다수의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합리화되고, 잊혀져갈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물론, 최소한 그 ‘제국’이 앞으로도 제대로만 흘러간다면.
잠시 후, 8그룹 동기 한 명이 한참 승리감을 만끽하던 베흔의 어깨를 툭 쳤다.
“위병소에서 연락인데? 오르마즈 카파키 장군이 남극에서 왔다는데 네가 불렀다면서?”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베흔이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 큰 칼을 허리에 차며 천천히 돌아섰다.
“새 손님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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