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7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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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부근, 새 숙영지 자리에 거의 도착한 연합군 본대를 제일 먼저 맞아준 건 대로를 따라 장대에 죽 꽂혀있는 1천여 개의 사람 머리들이었다. 동맹군들이 이미 겁에 질려있을 것으로 믿고 의기양양해 있던 연합군 장병들은 검붉은 피얼룩, 그리고 도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무수한 머리들에 순간 바싹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제롬이 무심결에 이마를 짚었다. 시체들 중 절반은 언뜻 동부기병들로 보였지만 나머지 절반 정도는 남부 출신 포로들로 보였다. ‘등급 없는 가디언’ 카렐다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전시물이었고, 도하를 막 끝내고 한참 기세가 올라 행군하던 연합군 장병들에게는 그 사기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모두 철거해. 후발대가 보기 전에.”
제롬이 눈가를 잔뜩 찡그리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지평선까지 훤한 이 넓은 평원에서 유달리 높은 구릉에 세워진 장대는 이미 볼 만한 사람은 다 보고 난 후였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동맹군들은 연합군의 새 숙영지 후보지에 보란 듯 머리를 꽂아놓은 것이었다.
“저어, 여기.......”
제일 앞에 세워져 있던 장대를 뽑아낸 동부기병 한 명이 당황한 듯 샤자한 공에게 급히 달려왔다. 가뜩이나 기분이 상해있던 샤자한 공은 그 기병의 손에 들린 머리에 순간 움찔했다. 중화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이제야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보벤을 막 확인하고 돌아온 그였다.
“이바카 경이십니다.”
샤자한 공은 자꾸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감추고는 죽은 손녀의 머리에서 힘겹게 시선을 끊었다.
“........머리 뿐인가.”
“예.”
샤자한 공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대놓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보벤이 죽은 줄로 알고 그랬군......”
그는 나름대로, 아니 꽤 정확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카렐 그 우라질 년이 내 후사를 끊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며 멀리 보이는 황상을 응시했다. 이바카가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그였기에, 손녀의 죽음이 견디지 못할 큰 충격은 아니었다. 어쨌든, 2순위 후계자인 이바카마저 죽었으니 만약 보벤에게까지 불상사가 생긴다면 그의 후계자, 곧 가문 2인자는 얼마 전 '거사'를 망쳐놓고 결국은 카렐이 재기할 발판을 만들어 주었던 꼴 보기 싫은 차남 다히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벤이 살았으니 쓸데없는 짓이군.”
샤자한 공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손녀의 흉한 머리에서 여전히 시선을 외면한 채 치우라 손짓을 보냈다.
“요동으로 돌려보내라. 카렐 그년을 잡아 죽이거든 그 모가지 앞에서 장례를 치러 줄 것이니.”
병사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장대에 꽂힌 천여개의 머리를 치우느라 숙영지 조성작업이 계속 지체되고 있었다. 그 사이 후미의 병사들이 계속 몰려들면서, 이 끔찍한 광경은 굳이 숨길 수도 없이 사실상 전군의 눈에 그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재수 없어.”
말에서 뛰어내린 남부 보병사령관 마누엘 경이 바닥에 흥건히 고인 검붉은 피얼룩을 발로 급히 지워버리며 짜증을 냈다. 그의 막사를 세울 곳도 다른 곳과 다름없이 피얼룩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그때, 화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수가 없다고?”
“아.......거기 계셨습니까?”
샤자한 공의 곱지 않은 물음에 마누엘 경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똘똘하거나 판단력이 빠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생각 없이 행동하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사과를 하고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손녀 이바카의 죽음에 가뜩이나 침울해 있던 샤자한 공은 굳은 표정을 애써 감추며 근위병들이 막 세운 사령관 막사에 성큼 들어섰다. 막 짐을 풀어놓던 그는 막사에 뛰쳐들어온 부장을 곱지 않은 눈으로 째려보았다.
“뭐야?”
“요동에서 다히르 경과 네자드 경이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다히르’라는 말에 샤자한 공의 표정이 대번 일그러졌다. 그는 짐 치우던 것들을 한쪽에 걷어차 놓고는 손짓을 보냈다.
“당장 데려와.”
요동의 유배지에서 이곳까지 끌려온 다히르 경은 아버지의 이번 부름이 결코 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카 이바카가 죽었다는 소식까지 전해들은 그에게는 모든 것이 캄캄했다. 그는 어쩌면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르는 아들 네자드를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한참 격앙되어 있을 아버지 샤자한 공이 내릴 처분에 이제 자신과 아들의 목숨이 걸려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는 세째아들 네자드만 함께 와 있었지만 요동에는 그의 나머지 자녀들과 손자들이 여전히 잡혀있었다.
“아버지께서 무어라 하시건.......”
근위병을 따라 걷던 다히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두 이 아비의 책임이라 하고 넌 무조건 용서를 빌도록 해. 지금 자존심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니. 나는 어차피.......”
“하지만 아버지, 그럴 수는.......”
해쓱해진 네자드 경이 아버지를 말리려 했지만 다히르는 아들을 가로막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넌 지난번 일로 괘씸죄에 걸린 것뿐이니 무조건 용서를 빌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경우가 다르구나. 이번에 나를 부르신 건 내가 후계권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일 것이니 어차피.......살아 나가기 어려울 것이야. 그러니 이 아비 걱정은 말고 너만이라도 살아야 된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네자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문득 걸음을 멈춘 다히르 경이 아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제네르가 널 죽이고도 편히 살 것이라 생각하느냐.”
순간 움찔한 네자드는 아버지의 허탈한 표정을 올려보았다.
“연합군이 이길까요.......”
“너와 내가 이 전쟁의 끝을 살아서 지켜볼 수 있을지나 모르겠구나.”
다히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죽음마저도 각오한 듯, 도리어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 두 부자는 근위병의 감시를 받으며 샤자한 공의 막사에 들었다.
“오랜만이구나.”
형식적인 인사말을 던지는 샤자한 공의 표정은 예상대로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아버님께서는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다히르가 샤자한 공에게 머리를 깊이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너는 그렇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애석하게도 난 안녕하구나.”
아버지의 독기어린 대꾸에 다히르가 움찔했다.
“농담이 과하시옵니다. 소자 항상.......”
“보벤이 중상을 입었다는 말은 들었겠구나.”
“.......예.”
다히르 경이 턱에 힘을 꽉 주며 일단 입을 다물었다.
“중책을 맡고 있던 보벤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네가 몇 가지 일들을 대신 처리해 주어야 하겠구나.”
순간 긴장한 다히르가 아버지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도 샤자한 공이 정말로 자신에게 무슨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 한다고 곧이곧대로 믿을 바보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소자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너와 네 아들이 지난번 가문의 중대사를 망쳐놓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알겠지?”
다히르는 손자인 네자드를 고작 ‘네 아들’ 정도로 표현하는 아버지가 내심 야속했지만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네 부자에게 지난번 저지른 불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한다.”
아버지의 말투에서 다히르는 자신들에게 주어질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샤자한 공은 그가 찬찬히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도록 해라. 너희 둘 다.”
“화, 황궁이요?”
다히르의 표정에서 순간 핏기가 사라졌다. 바로 어제, 대대적인 처형식을 벌인 황궁의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할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샤자한 공이 자신을 뜬금없이 카렐에게 보내려는 의도 또한 어딘지 미심쩍었다.
“이걸 가져가라. 가서 저 가짜황제 카렐에게 직접 전해주도록 해라.”
샤자한 공은 한쪽에 놓아두었던 친서를 다히르에게 불쑥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친서를 받아들어 읽는 아들 다히르의 표정이 조금씩 창백해지는 광경을 샤자한 공은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내 측근 2명이 수행원이 되어 함께 따라갈 것이니, 너와 네자드 둘이서 다녀오도록 해.”
다히르가 아버지 샤자한 공의 앞에 엎드리며 간곡하게 말했다.
“제발, 부탁드리옵니다. 이번엔 소자 혼자 다녀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네자드는 지난번 그저 젊은 혈기에 그러한 것뿐이오니.......”
“내 둘이 함께 다녀오라고 틀림없이 말했다.”
아들 다히르의 애원에도 샤자한 공의 대답은 단호했다. 친서의 내용이 무언지도 모르는 네자드는 어리둥절한 듯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엎드린 채 눈가에 눈물까지 방울방울 맺힌 아버지 다히르의 모습에서 그는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샤자한 공은 눈을 매섭게 부릅뜨며 벌벌 떨고 있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네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니, 이번 임무에 성공치 못하면 네 두 부자의 목을 모두 베어버릴 것이다. 내 결코 실언이 아니니 명심해 두어라.”
샤자한 공은 옆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검을 뒤에 있던 근위장교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 둘이 혹 임무에 실패하고 돌아오거든, 그 구차한 걸음을 숙영지에 감히 들이지 못하도록 네가 밖에서 바로 목을 베어버려라. 알겠나.”
“예!”
“저래 봤자 북쪽하고 동쪽뿐이요.”
처소에서 비빈들과 원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던 카렐은 어느새 황도 북쪽과 동쪽을 새카맣게 에워싼 어마어마한 연합군 병력을 보며 별것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황제의 이런 여유만만함에도 비빈들, 정확히는 아메스와 네페티, 솔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어두운 그늘들이 드리워 있었다.
“황성 규모에 맞는 적정 수비 병력을 확보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욱리하와 관산수 수로를 통한 보급도 원활하니 별 문제 없을 겁니다.”
황제만큼의 듣기 싫은 쇳소리는 아니어도 유난히 탁한 그 목소리는 황빈 베아트릭스의 것이었다. 비빈들 중 유일하게 적들과 맞서 일선에서 싸워야 할 그였지만 황제와 마음이라도 통했는지, 아니면 막연한 공포가 의미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베테랑 무장이기 때문인지 도리어 환해진 얼굴이었다.
급히 설치했던 유리벽과 큐비클을 치워낸 황제 처소는 이전처럼 넓고 환해진 모습이었다. 물론 카렐은 아직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피해야 했지만 전처럼 격리까지는 필요 없다는 니사의 진단 덕분에 오랜만에 이런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수비병들이 잔뜩 군기가 들었더군요. 적들이 무서운 건지.”
거의 보름만에 황제와 마주앉은 황후 아메스가 멀리 보이는 황성의 외성벽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적군 때문이 아니고 폐하의 단호함에 고무되어서인 것으로 압니다.”
이번에도 ‘베테랑 무장’ 베아트릭스가 아메스의 성급함을 바로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지난번의 대대적인 처형 이후, 황성 주둔 동맹군들이 황실을 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황후께서 가끔 하셨던 말대로, 병사는 자고로 적군보다 지휘관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법이지요. 이곳 황성에서는 황제인 짐이 그 누구보다 두려운 존재여야만 하고.”
카렐이 부드러운 민물고기 회 한 점을 삼키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페티가 기름기 많은 양고기 조각을 황제의 접시에 놓아주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아마 적군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옵니다.”
카렐이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리며 양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레곤 대공주께서 계속 폐하께 알현을 청하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솔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렐의 대답은 냉랭했다.
“아들 에우테르 그놈을 살려달라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병도 나아가시니 이젠 폐하께서 자비를.......”
“자비도 베풀 때가 따로 있는 겁니다, 황빈.”
무어라 더 말하려던 솔은 황제의 눈꼬리가 사나워진 것을 알아채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살려둘 놈이 따로 있지.”
베아트릭스가 퉁명스런 말과 함께 대번 성깔을 드러냈다. 네페티가 겁먹은 솔을 달래주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솔 황빈이 심성이 온유하여 이번 일에 가슴아파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상께서 이번 처형에서 에우테르만 남겨두신 깊은 속뜻이 있으실 것이니 너무 큰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것이네.”
카렐이 눈을 살짝 치켜뜨며 눈치빠른 네페티를 쳐다보았다. 실제로 카렐은 황궁을 한 번 찾아오겠다는 레곤에게 ‘곧 전투가 있을 것이니 안전을 생각해 오지 않는 것이 좋다.’며 계속 알현을 거부하고 있었다.
“인질로 나름대로 가치가 꽤 있겠죠. 우리가 잡고 있는 유일한 황족 인질이니. 어쨌든 우리에게도 대공주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생긴 것 아니겠습니다.”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아메스가 이번에도 대놓고 나섰지만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실례하겠사옵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우베가 잠깐 양해를 구하고는 카렐에게 다가왔다. 그는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샤자한 공 쪽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항복을 권유하려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오호, 이제 때가 됐나? 잡아 죽일 놈이 하나 더 생겼군.”
카렐은 내용은 듣지도 않은 채 고기조각을 씹으며 키득거렸다.
“그깟 놈들 상종하기는 내 시간이 아까우니 너희가 알아서 성벽에 모가지나 내다걸어. 명색이 황제가 일관성이 있어야지.”
‘일관성’이라는 표현에 황후 아메스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황제의 지시에 우베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다히르 경과 네자드 경 부자입니다. 그리고 수행원 2명과 근위병 5명이 함께 왔습니다.”
음식을 씹던 카렐의 턱이 순간 딱 멈추었다.
“미친 새끼. 내 손을 빌려 지 아들을 죽이려는 건가.”
잠시 움직이지 않던 카렐은 다시 고기조각을 입에 넣으며 우베에게 손짓을 보냈다.
“30분만 기다리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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