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8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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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황궁 대전을 지키는 동맹군 가디언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다히르 경, 그리고 네자드 경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야 어쨌든, 지금 그는 적인 연합군의 사자 자격으로 이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감시하기 위해 함께 보낸 샤자한 공의 측근들과 근위병들이 그의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더 두려운 건 요동에는 그의 다른 자녀들, 그리고 손자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상께서 드십니다.”
우베의 외침과 함께 대전에 있던 내관들과 신료들이 일제히 자리에 꿇어앉았다. 다히르와 네자드 역시 두 팔을 모으며 동부식으로 허리를 굽히려 했지만 뒤에 선 수행원들이 그를 확 붙들었다.
“이 무슨 무례인가.”
다히르 경이 수행원을 돌아보며 이를 갈았지만 그 수행원의 표정은 태연했다.
“우린 정당한 황제 폐하를 대신해 와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가짜 황제에게 왜 고개를 숙이십니까.”
이들의 이 말도 안 되는 신경전을 눈치채지 못한 카렐이 아니었지만 그는 짐짓 모른 척 태연한 표정으로 근위가디언들의 부축을 받으며 느릿느릿 옥좌에 올랐다. 선황의 것을 내버리고 이번에 들여놓은 새 옥좌는 웬만한 사람 두세 명은 족히 앉고도 남을 큰 것이었지만 워낙 큰 체구의 황제다보니 그다지 티가 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유평대제를 은근히 닮아간다’는 아랫사람들의 수군거림처럼, 검고 고급스런 칠기로 만들어진 그 화려함 또한 전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옥좌에 비스듬히 앉은 황제는 차 한 잔을 입에 가져가며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다히르 경.”
카렐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 아들 네자드 경도 와 있군.”
다히르 경은 카렐에게 인사도 올리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할룩스로 막 연결된 제네르의 형상이 옆에 나타났다.
“흐읍.......”
네자드의 모습에 당혹해하는 제네르의 표정을 못 본 척, 카렐은 꿀 바른 사과조각을 맛있게 씹으며 여전히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저녁식사는 했는가?”
“도착하자마자 급히 오느라 미처.......”
“허허, 정사(正使)로 올 사자를 밥도 안 먹이고 그리 급히 보내다니, 샤자한 그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나보군.”
카렐이 코웃음을 지으며 다히르 경 뒤에 있는 수행원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의 언뜻 호의적인 태도, 그리고 환한 미소와, 입에서 나온 말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저놈은 지금 당장 끌고나가서 혀를 잘라 버려라.”
“예?”
“짐을 가짜황제라고 칭하는 저따위 무엄한 혓바닥을 어찌 그대로 놔둘 수 있는가.”
창백해진 수행원이 무어라 대꾸하려 했지만 동맹군 가디언들은 그런 그가 입을 열도록 놔두지조차 않았다. 루토의 눈짓을 받은 2명의 가디언들은 버둥거리는 그 수행원의 입을 막고 목을 비틀어 그대로 끌고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울부짖음은 쿵 하며 닫힌 문 너머로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맙소사......”
얼떨결에 혼자 남은 나머지 수행원은 고개를 숙인 채 손끝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에 올 때까지만 해도 ‘황성이 이제 완전히 포위당했으니 궁지에 몰린 가짜황제가 결국은 저자세로 나올 것’이라는 샤자한 공의 언질을 받고 떠나온 참이었다.
“자아, 그럼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들어볼까.”
카렐이 반대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오만하게 물었다. 하지만 다히르 경은 한 손에 아버지의 친서를 든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 내용을 눈치 챈 카렐이 우베에게 친서를 받아오라며 눈짓을 보냈다. 카렐의 지시를 받은 우베는 떨고 있는 다히르 경의 손에서 그 두루마리 친서를 거의 빼앗듯이 받아 황제에게 돌아섰다.
“아참.”
그때, 카렐이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명색이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인데, 내 앞에서 낭독을 해 주어야 제격이지. 훗, 아직 황제에 오른지 얼마 안 되었다보니 군데군데 예법에서 서투르군 그래.”
카렐은 문서를 다히르에게 돌려주려는 우베를 다시 가로막았다.
“다히르 경 얼굴 보니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는군. 저 꼴로 뭘 읽을 수나 있겠나. 수행원보고 읽으라고 해라.”
“예?”
얼떨결에 친서를 떠안은 두 번째 수행원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옥좌를 조심스레 올려보았다. 카렐은 여전히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을 띤 채 그 수행원에게 빨리 하라 손짓을 보냈다.
“난 바쁜 사람이야. 빨리 읽어라.”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그 수행원은 친서를 묶은 비단끈을 조심스레 풀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을 다히르와 함께 이곳에 보낸 최고제후의 결정이 무엇을 뜻했는지를 바로 깨달아야 했다. 그는 친서를 췬 채 한참을 읽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빨리.”
카렐이 눈을 크게 부릅뜨며 목소리를 한 톤은 높였다. 벌벌 떨던 수행원은 위압적인 그의 거친 목소리에 더듬더듬 글을 읽기 시작했다.
“요, 요동의 지배자이며.......슈트란 가의 수장인 나 샤자한이 스스로 동맹군이라 칭하는 역도의 수괴이며 천한 가디언 카렐에게 알리노니........지금 당장이라도 스스로의 천한 본분을 되새겨.......발악을 중단하고 이 의로운 원정군에 투항한다면........”
두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고 있던 다히르 경은 순간 귀 옆을 무언가가 쌕 하고 스치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다행히 손 감각은 여전하군.”
카렐은 손에 두 번째 도끼를 집어들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무심결에 침을 꿀꺽 삼킨 다히르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친서를 읽고 있던 수행원은 정수리에 도끼가 박힌 채 뒤로 한참을 날아가 바닥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타격이 어찌나 강했던지 두 조각난, 아니 부서져버린 그의 머리에서 터져나온 붉은 피와 누런 골이 자줏빛 카펫은 물론이고 가까이 있던 아메샤 스펜타 근위병의 얼굴에까지 튀어 있었다.
카렐은 옆에서 파랗게 질려 서 있는 제네르의 형상에 갑자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다히르와 네자드 부자를 돌아보았다.
“저 두 놈은 이제 어찌해야 하나.”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황제의 돌발행동,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대전의 신료들까지 당혹해하고 있었다. 대전에서 사람을 죽인 건, 그것도 황제가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이렇게 끔찍하게 죽인 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카렐이 도끼 날 끝을 다히르에게 가리켰다.
“저따위 무엄한 것을 문서라고 가져왔으니 네놈도 그 죄를 알겠구나.”
다히르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카렐은 매몰차게 보일 정도로 그를 계속 몰아붙였다.
“내 네놈이 슈트란 가에서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몇 안 되는 놈인 줄로 생각했건만, 그것도 아니었더냐?”
“소, 소인이 부족한 탓이옵니다.”
다히르가 결국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소인을 죽여 주시옵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제 아들은.......”
“닥쳐라!”
카렐의 쩌렁 하는 고함소리가 대전을 다시금 울렸다.
“수행원이 죽었는데 정사와 부사로 온 놈들이 감히 살아 돌아갈 줄로 생각했더냐?”
카렐의 차가운 태도에 가장 당황한 건 제네르였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계속 입을 열려 했지만 카렐은 그에게 끼어들지 말라며 단호한 손짓을 보냈다. 평소 같았다면 카렐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속으로 분석하고 있을 그였지만 최소한 지금만은 그의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경은 가만히 있어.”
카렐은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다히르 부자를 노려보았다. 다히르와 네자드 부자는 죽음을 예감한 듯 바닥에 꿇어앉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렐의 입에서 나온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히 황제인 나를 모욕했으니 당장 저 두 놈을 끌어내서 광장에서 사지를 토막 내 죽여라. 그 시체는 내장을 모두 발겨서 성벽 위에 널어 까마귀밥으로나 줘 버려.”
충격을 받은 제네르가 휘청거리는 광경을 짐짓 무시하며 카렐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지만 그때, 우베가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앞에 납죽 엎드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은 집행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전을 거두고 그 아비와 일가를 모두 잡아들이거든 그때 대대적인 처형으로 폐하의 단호함과 위엄을 보이심이 더 좋지 않을까 하옵니다.”
“감히 내 귀를 더럽힌 놈들을 왜 귀한 밥 먹여가며 살려 둬?”
우베의 간언에 카렐이 버럭 역정을 냈다. 하지만 우베는 평소 황제의 말이라면 무조건 예예하던 평소답지 않게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하오나 비무장의 사자를 죽여 버리는 건 어쨌든 좋은 선례가 아니옵니다. 일단 저 둘에게 폐하의 단호함을 보이실 수 있는 처벌을 하시옵고, 이후에 반역도들을 다 잡아들이거든 그때 한 번에 몰아 처형하심이 나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카렐이 다시 입가를 씰룩거렸다. 못마땅한 듯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 그에게 계속된 유혈극으로 진절머리가 난 신료들까지 일제히 엎드리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베가 총대를 메고 앞장섰으니 그들로서도 입을 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폐하, 이젠 적들에게도 정의로움이 무언지를 보이셔야 할 때이오니 저 둘에 대한 처형은 일단 보류하심이 좋지 않을까 하옵니다.”
신료들의 계속된 애원에 카렐이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후볐다.
“빌어먹을, 광장에 끌고나가서 구경꾼들 다 보는 앞에서 태형 50대를 쳐. 못 견디고 뒈지면 다행이지만 살아도 지하 감방에 쳐넣어버려. 저 아비가 잡히거든 저 일족과 함께 함께 찢어 죽여 버릴 테니.”
카렐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다히르는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아들 네자드를 힐끔 돌아보았다.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처형은 그저 ‘연기’된 것뿐이었고 ‘자비로운’ 처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바닥에 엎드린 다히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 가디언 황제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사하옵니다.......폐하.”
“역시 네놈한테 ‘간언’하는 역은 별로 안 어울려. 황제 의견에 거스르려고 하는 놈 말투가 그렇게 또박또박한 게 말이 되냐? 그것도 맨날 개미목소리만 내는 너 같은 놈이?”
처소로 돌아가던 카렐이 비서관 우베를 힐끔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뒤따르던 우베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제가 뭐 폐하처럼 연기를 공부한 것도 아니고.......뭐, 그래도 가끔은 제게 이렇게 신하다운 역할도 좀 주셔야죠. 매일같이 꽁무니 쫓아다니는 역할만 하는 것도.......”
“황제 뜻에 덤비는 게 신하다운 역할이냐.”
“서류꾸러미 들고 뒤만 쫓아다니는 것보다야 폼 나잖아요.”
“내가 너 폼 내라고 시킨 줄 알아? 며느리감인 제네르 경한테 시키면 나중에 뒤탈이 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네놈한테 맡긴 거지.”
카렐은 여느 때처럼 과할 정도로 가벼운 이 비서관을 살짝 흘겨보았다. 우베가 카렐에게 조금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이 정도면 다히르 경 식솔들까지 살릴 수 있을까요? 그 능구렁이같은 샤자한 공이 이 빤한 연극을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지는 않은데.”
“눈치야 당연히 채겠지.”
카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딴에는 자기 대신해서 다히르를 죽여 달라고 갖은 욕지거리로 칠해놓은 문서를 친서랍시고 보냈겠지만.......원하는 대로 해 줄 수야 없지. 그렇다고 대놓고 다히르를 환영해 주었다면 그 빌미로 요동에 있는 다히르 계보 식솔들을 다 죽였을 테고. 다히르 경도 중요하지만 그놈들도 나중에 동부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놈들이야.”
카렐은 복도의 큰 창 너머로 보이는 황궁 광장을 잠시 응시했다.
“어쩌면 그 이상의 속셈이 있을 수도 있고.......”
카렐이 말꼬리를 흐렸다. 광장 제일 안쪽 제단에는 혀가 잘린 수행원이 양 팔이 묶인 채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고, 다히르와 네자드에게 태형을 가하기 위한 요란스런 형틀도 한창 세워지고 있는 참이었다. 군데군데 모여들고 있는 구경꾼들을 쳐다보며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공개석상에서 매를 맞아야 하는 건 좀 안됐지만 별 수 있나. 어쨌든 샤자한 놈도 눈치야 채겠지만 태형까지 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니 그 식솔들을 대놓고 죽일 명분까지는 얻지 못하겠지. 넌 나가서 형리한테 적당히 약한 채찍 쓰라고 귀띔이나 좀 해 주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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