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10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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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의 북쪽과 동쪽이 연합군 병력에 완전히 둘러싸인 시간, 작은 배 한 척이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욱리하 남쪽 수로를 따라 황도에 천천히 접어들었다. 황궁 지하의 비밀스런 선착장에 멈춰 선 그 배에서 내린 건 두 발로 제대로 걷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내려진 병상에는 창백하고 여윈 얼굴의 키 큰 여자가 주변을 힘없이 두리번거리며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운 병상은 황실 시종의 인도를 받으며 보안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133층으로 옮겨졌다.
“이런 안 좋은 곳에 자진해 와주는 손님이 있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있나.”
릴라크는 귀에 익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힘겹게 돌아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한쪽 벽만 200척(60m)에 가까운 웅장한 홀이었다. 10척(3m) 정도 간격의 열주(列柱)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거대한 방은 그에게는 꽤나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 이곳에 서 있던 신료들, 심지어 가디언들조차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 말고 병상이 대전에 든 것도 퍽이나 드문 일인데.”
릴라크는 고통으로 물든 얼굴에 비로소 엷은 미소를 지었다. 황궁 대전의 제일 안쪽, 높은 단 위의 옥좌에 앉아있던 카렐이 느릿한 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전쟁터에 돌아와 준 걸 환영하네. 릴라크 예리노프 경.”
카렐은 릴라크의 차가워진 이마에 살며시 뺨을 댔다. 릴라크는 부러진 왼팔을 천천히 들어 카렐의 목을 스스럼없이 안았다.
“전쟁터의 피냄새가 이젠 고향 같습니다.”
릴라크의 얼굴 위로 카렐의 서클렛에 꽂은 긴 깃털이 스쳤다. ‘황제’가 된 카렐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릴라크는 조금은 신기한 듯 말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사실 황제의 얼굴을 이렇게 구석구석 훑어보는 것도 꽤나 무례한 일이었지만 카렐은 그런 그를 이번만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페로 관에 남은 자네 남편이 아내를 보내달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는 모양이던데. 새벽에 갑자기 아내가 없어져서 기겁을 한 모양이야.”
“그이는 그곳에 그대로 놔둬 주십시오. 그이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명분이야 어쨌든.......가문을 배신하는 거니까요.”
“뭐 부탁하니 들어주겠지만 말이야.”
카렐이 어깨를 으쓱 하며 옥좌로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옆에 제네르의 형상이 지직거리며 나타난 건 그때였다. 그는 황궁을 찾아온 릴라크에게 짧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에게 나름대로 전장에서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이 뒤엉켜있던 릴라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가벼운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릴라크 자네가 남극성당 선배지?”
카렐이 두 사람을 함께 가리키며 물었다. ‘선배’라는 말에 불만이 많은지, 제네르가 입을 씰룩거리며 얼른 대답했다.
“저야 군대에 있다가 진학했고, 파예드에서 퇴학당하고 수용소에서 10년이나 썩느라 그런 거죠.......나이는 제가 9살이나 더 많습니다.”
“뭐, 어쨌든.”
카렐이 키득거리며 이번엔 릴라크를 돌아보았다.
“후훗, 그래도 릴라크 자네를 가장 열심히 천거한 게 바로 이 사람일세. 파예드만 치면 어쨌든 생도로서 산 건 하크로딘 상장군이 위고 물론 계급도 위니까 당연히 상전 대우를 해야 돼.”
“천거요?”
릴라크는 긴장한 표정으로 황성 밖을 내다보았다. ‘천거’라는 건 카렐이 그를 위한 자리를 이미 준비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20만이 넘는 연합군 대군이 이미 황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공성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황도 아케메니아 시는 건립 이래 단 한 번도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파괴되어 본 일은 없었다. 성전의 해에 이곳이 불바다가 되었던 것도 자진 퇴각하던 테번이 저지른 대대적인 방화 때문이었지 민병대의 공격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코리온의 처형이 있던 날, 페로가 이끄는 동맹군이 짧게 공성전을 펼치기는 했지만 황궁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소요사태에서 주의를 돌리기 위한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이번 공성전은 양쪽 모두가 사생결단을 하고 나올 대대적인 것이 될 터였다. 승전의 영광이 어느 쪽으로 돌아가건, 어쨌든 황도의 많은 건물들이 파괴될 테고, 민간인들 역시 수없이 죽어나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황제 카렐은 그런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야 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위험분자들도 모두 처단했고, 우리 준비는 완벽하네.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연합군 놈들은 결국 성벽을 넘어오지 못할 거야.”
카렐이 꿀에 절인 사과를 씹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자네가 도움이 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도움’이라는 말에 순간 긴장한 릴라크 역시 침을 꿀꺽 삼켰다.
“알다시피, 자네 앞에 있는 하크로딘 상장군은 새 내각에서 2품 병부대신이네. 전쟁이 끝나면 정규군 보병대,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까지 모두 통합한 20만의 ‘중앙군’을 이끌게 될 걸세. 현 근위대와 가디언 부대로 편성될 내 ‘친위군’ 10만이 따로 있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중앙군이 황실의 실질적인 주력군이 될 거야.”
카렐이 굳이 말을 해 주지 않아도, 릴라크는 어느 자리가 자신을 위해 비게 될 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제국의 기병장교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런 지위라는 것도. 릴라크는 자신을 천거했다는 제네르를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카렐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별다른 적임자가 없다보니 제네르 경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3품의 슈로 기사단장까지 겸하고 있네. 부단장 라손이 있긴 하지만 전사단 오기 전까지 고작 중대장에 불과했거든.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부단장 역할도 바로 맡길 수 있었지만 1만, 아니 나중에는 3만으로 확대될 기병대까지 혼자 통솔하기는 경력이 너무 짧아.”
카렐이 그 큰 옥좌에 몸을 쭉 펴고 앉으며 말했다.
“제네르 경이 기사단장 후임자로 자네를 지목하더군. 내가 보기에도 자네 둘은 통솔 방법이나 성격에서 비슷한 면이 많거든. 가끔 발끈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뭐, 그것도 군인에겐 나름대로 매력이지.”
카렐이 릴라크에게 다시 한 번 씨익 웃음을 지었다. 탈라스에서 이 황제에게 무모하게 돌진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릴라크가 얼굴을 붉힌 채 더듬거렸다.
“그때는 저 나름대로 이유가.......”
“아, 물론 알아. 부하들이 따라주기를 바랬겠지만 도망가 버렸지. 한심한 남부기병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하지만 내 기사단은 그렇지 않네. 제네르 경이 만들어놓은 기사단 고유의 분위기를 이어가기에 자네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아.”
이번엔 제네르가 릴라크를 향해 씽긋 미소를 지었다. 마랄루의 1차 전투에서 도망치는 적장을 놔둔 채 미련없이 물러났을 때도, 2차 전투에서 몇 시간이나 서로 노려보기만 했던 날카로운 인내심 대결에서도, 3차 전투에서 제네르를 사지로 몰아붙이던 그 모습에서도, 릴라크는 매번 숙적인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곤 했었다.
릴라크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카렐이 제시한 어마어마한 조건만큼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아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너무도 크고 중대했다. 그는 승낙의 의사표시를 짧은 한 마디로 대신했다.
“플라칼 가 종장님께 연결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그분을.......설득해 보겠습니다.”
릴라크는 유난히 요란스러워진 성벽 밖을 휙 내다보았다. 카렐은 옥좌 옆에 세워두었던 칼을 오랜만에 허리에 차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타이밍이 좀 묘하군. 지금 연락이 가능할지 모르겠는걸.”
카렐이 가리킨 동쪽 성벽 너머에는 플라칼 가를 상징하는 무수한 깃발, 그리고 이미 조립이 끝난 백여대의 발리스타가 천천히 이쪽으로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플라칼 가가 선봉이 되어 황성을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바로 지금.
“성질들도 정말 급하군. 짐 풀자마자 공성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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