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11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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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내 팔자야. 왜 하필 이런 때 임신은 해 가지고.”
힘겹게 폭포를 내려온 미노아 플라칼 경은 거친 로프를 손에서 놓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전 같았다면 익숙한 레펠 강하를 했겠지만 이번은 임신으로 불룩해진 배 때문에 하네스(harness)를 몸에 감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얼어붙은 무시무시한 폭포를 이렇게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끙끙대며 로프를 붙들고 내려와야만 했다.
아버지 카나르 경의 명을 받아 근위병들과 함께 흥안령 산자락을 뒤지던 그는 이제 거의 ‘목표’에 근접해 있었다. 그는 남동생 루시도프, 그리고 올케 릴라크가 남긴 말굽 흔적을 거의 찾아내 도주로도 모두 파악했고, 그가 죽인 델루지 가 근위병의 혈흔까지도 찾아낸 후였다. 보통의 ‘무장’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이런 꼼꼼한 추적을 성공한 것도 그 특유의 예리한 감각과 집중력, 그리고 한때 영지의 보안총책으로까지 있었던 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데려온 것도 아마 이것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퍽퍽해진 어깨를 두드렸다.
“말뼈 같습니다.”
함께 온 해부학자의 말에 미노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버지 카나르 경이 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겠지만, 미노아 경이 연합군의 가문 의무대에서 제일 먼저 불러온 건 경호원이 아닌, 해부학자와 군 수사관들이었다. 해부학자는 얼음이 반쯤 녹아있는 폭포 밑 바위틈에서 썩어가는 뼈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짐승들이 먹고 남긴 것 같습니다만 일부는 잇자국 없이 부러진 것도 있습니다. 저 위에서 떨어진 것이 확실합니다. 골격 변형이나 인대 상태를 보아서 훈련된 군마가 확실합니다. DNA를 분석해보면 누구에게 등록된 군마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떨어졌다고?”
어쩌면 친동생이 이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노아 경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까마득한 폭포 위를 올려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실족사?”
“저 위의 토양에도 혈흔이 있는 걸로 봐서 단순한 실족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미노아 경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는 자신이 진실의 중심에 거의 다가왔음을 조금씩 깨달았다.
“장군님!”
미노아는 뒤에서 들려온 수사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여기 사람의 혈흔이 있습니다!”
수사관을 향해 달려가던 미노아는 자신을 따라온 20여명의 가문 근위병 중 한 명이 한참 전부터 유난히 안절부절 못하며 모습을 감추었다 나타냈다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챘지만 일단 모른 척했다. 그 근위병은 미노아 경의 주의가 다른 데로 쏠린 틈을 타 다시 나무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누구 것인지 알 수 있나?”
미노아의 물음에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땅바닥은 언뜻 다른 곳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는 힘듭니다. 일단 실험실로 가져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노아는 나무 뒤에서 어딘가로 급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근위병의 존재를 느끼며 이를 빠득 갈았다.
“토양 시료를 가져가면 누군지 알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주변에 이상한 거 또 없나 자세히 둘러봐.”
수사관이 시료를 채취하는 사이, 미노아 경은 묵직한 허리를 두드리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깊은 숲, 긴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깊은 숲은 위험천만한 범죄를 감추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거 빨리 돌아가야 하겠군.’
어딘가로 연락을 계속하고 있는 그 근위병에게서 묘한 불안감을 느낀 미노아는 함께 온 근위병 소대장을 손짓해 불렀다. 그가 수사를 위해 데려온 근위병들은 100명 정도였지만 경계와 수색을 위해 분대별로 산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지금 이곳에 있는 건 고작 20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들은 가문 종가를 직접 지키는 근위병들 중 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소대였고, 소대장인 ‘후스 콘스탄츠’ 대수 역시 그가 종가에서부터 유심히 지켜보아 온 강인하고 충성스런 남자였다.
“돌아갈 준비를 하도록 해.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저기 저 새끼 다음에는 너희 소대에서 전출시켜라. 알겠나?”
미노아의 귀엣말에 콘스탄츠 소대장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응?”
철수 준비를 서두르던 미노아는 폭포 위쪽에서 들려오는 말굽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잠시 후, 절벽 위쪽에서 고개를 불쑥 내민 건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웬일이야.”
미노아는 어색하게나마 일단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의 남편, 2군 부사령관 히르직스는 중무장을 한 채 로프를 타고 이 절벽을 잽싸게 내려왔다.
“이암성 옆에 주둔하고 있었다더니, 언제 여기로 왔어?”
미노아는 이 달갑지 않은 남편에게 다가서며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이 콧대높은 마누라의 얼굴이 그다지 반갑지 않기는 히르직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2세가 있을 아내의 불룩한 배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공성전 시작한다더군. 2군 모두 데리고 예르마크 경하고 내려왔어. 2군이랍시고 그동안 밥만 내내 축냈는데 이젠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냐.”
히르직스는 폭포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가 이곳에 온 건 제롬의 다급한 연락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내 미노아가 사고를 치고 있는 것 같으니 아무 짓도 못 하게 무슨 핑계든 대서 데려와라.’는 것이 그가 받은 지시였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을 따라 절벽에서 막 내려서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델루지 가 근위장교이었다. 자신을 ‘제대장 콘라드’라고 소개한 저자는 히르직스가 이번 ‘특명’을 받은 이후로 그의 뒤를 100여명의 델루지 가 휘하 근위병들과 함께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물론, ‘콘라드 제대장’의 어깨에 붙어 있는 제대장 계급이 며칠 전, 바로 이곳에서 동서 릴라크를 쳐서 절벽으로 떨어뜨리고 얻은 것이라는, 그리고 함께 온 부대가 릴라크를 공격했던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까지 알지는 못했다.
‘기분 나쁜 새끼로군.’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계속해 절벽을 내려오자 감시당하는 기분이 퍼뜩 든 히르직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불안감을 느낀 미노아 역시 남편의 눈빛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는 제롬이 남편과 저들을 보낸 속내를 바로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가문 근위병들이 함께 있었지만 숫자에서 턱없이 딸렸다.
제롬이 고작해야 자신의 조사를 방해하거나 남편을 보내 다시 시간을 끌려는 정도의 상황을 상정했던 그는 이 많은 무장병력의 등장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미노아는 할룩스를 집어들고 아버지 카나르 경을 불러냈다.
“접니다.......으음? 아버지?”
미노아는 중갑주 차림으로 발리스타 옆에 선 아버지 모습에 잠시 움찔했다. 카나르 경은 조금은 뚱한 표정으로 딸에게 되물었다.
“뭐 찾았냐?”
“그것보다........아버지께서 왜 갑옷을 입고 계십니까?”
“공성전 명령이 내려졌다. 바로 시작하라는 명령이구나.”
카나르 경은 그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미노아는 이 용감무쌍했던 아버지가 ‘최고제후’ 앞에서 얼마나 비참해졌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굳이 자초지종을 묻지는 않았다.
‘그 자식 제 발 저렸군.’
미노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롬이 이렇게까지 서둘러서 공성전을 개시하는 것이 ‘진실이 밝혀져서 플라칼 가가 반발하기 전에 다 결판지어 버리려는’ 속셈이라는 것도 알아챘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최소한 지금, 그것도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바로 옆에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카나르 경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 넌 지금 어딨냐? 무슨 군인들하고.......사위도 함께 있는 모양이구나.”
히르직스는 이 부담스런 장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형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지금 막 왔습니다. 장인어른. 염려 마십시오. 사령부에서 보내 준 제 근위병들입니다. 강 건너거든 찾아뵙고 바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미노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 같이 왔던 곳 서북쪽의 작은 폭포 밑입니다. 여기서.......”
“뭐 수확이라도 있냐?”
카나르 경이 눈을 가늘게 뜨며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주 큰 수확입니다. 공성전 끝내고.......개선하시면 그때 알려드리죠.”
미노아는 ‘동생 내외가 이미 죽은 것 같다’는 말로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있는 아버지의 심기를 굳이 긁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네가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카나르 경은 굳은 표정의 딸에게 일단 미소를 지어보였다.
“잘 정리해서 저녁에 알려다오.”
아버지와의 연락을 끊은 미노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편이 델루지 가 근위병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린 이상, 그들 돌발행동을 막을 첫 번째 ‘보험’은 든 셈이었지만 완전치는 않았다.
‘천상 내가 해결해야 하나.’
아버지가 이곳에 신경을 써 줄 여유가 없다면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일단 혼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미노아는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편 히르직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 남부, 아니 제국 제일의 용장(勇將)인 남편이 자신의 든든한 보호막일지, 아니면 자신의 목을 찌를 비수일지 알 수가 없었다. 미노아에겐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오랜만에 봤더니 좀 말랐네. 이암성 쪽은 보급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봐?”
히르직스의 뺨을 짚었던 그는 평소 잘 짓지 않던 다정한 미소까지 지으며 남편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이제 슬슬 볼일이 끝났으니 가야겠어. 잘됐네. 안 그래도 몸이 무거워서 이 절벽을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캄캄했는데. 당신이 좀 도와줄 수 있지?”
느닷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아내를 얼떨결에 안으며 히르직스가 잠시 당황했다. 그는 내심 ‘이 여자가 오늘 밤에 제대로 하고 싶은가보군.’하며 넘겨짚었지만 남자, 아니 남편으로서 최소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길 어떻게 내려왔어? 하네스도 없이?”
“응. 그러니까 올라갈 때는 도와달라는 거지.”
“미쳤나봐. 이 몸으로 뭣 하러 그런 짓을 했어?”
히르직스는 짐짓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입고 있던 케이프를 벗어 임신한 아내의 어깨에 덮어주고 있었다.
“음? 잠깐만.”
히르직스는 ‘긴급 보안’ 메시지와 함께 갑자기 울리는 할룩스를 급히 집어들었다. 영상기능을 끈 그는 안에서 들려온 제롬의 조금 격앙된 목소리에 잠시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미노아에게서 몇 발짝 떨어지며 할룩스에 조심스레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이미 와 있습니다.”
“네 마누라는 지금 뭐 하는데?”
아무리 아랫사람이라지만 제롬의 조금은 무례한 언사에 히르직스가 대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영상기능이 꺼져있으니 상대는 알지 못할 터였다.
“지금 다 끝내고 돌아가려 합니다. 제가 왔을 때는 이미 끝나있었습니다.”
“다 끝났다고?”
제롬이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히르직스는 아내의 이곳에서의 ‘작업’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최고제후를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만들 정도면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퍼뜩 불안감이 스쳤다. 그는 흥분한 듯 씩씩대는 제롬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잠시 긴장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길지 않은, 아니 히르직스에게는 몇 시간으로 느껴졌던 순간이 지난 후, 제롬의 낮고 차분해진 목소리가 할룩스 너머에서 들려왔다.
“내가 자네의 충성심을 굳게 믿는다는 건 알고 있지?”
“예?”
히르직스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아내와 회포를 푸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 전장에서 자네의 힘이 더 필요해.”
“무슨 말씀을.......저희 부대는 이번 공성전에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네가 상급귀족 신분이 된 이유를 생각해 봐.”
‘상급귀족 신분’라는 말에 히르직스의 마른 턱에 핏줄이 곤두섰다. 기사단장 토로 경, 그리고 부대를 배신하고 밀고자로 낙인찍혀 폐인으로 떠돌던 그에게 상급귀족 신분을 주고 남부로 영입해 준 건 바로 최고제후가인 델루지 가였다. 그리고 세습받지 않은 수여직 신분이다 보니 언제든 빼앗을 수 있는 것 역시 델루지 가였다.
그는 로프 옆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임신한 아내 미노아를 떨리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콘라드 제대장’과 그의 근위병들이 아내에게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제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누라는 거기 두고 지금 당장 여기로 오게. 명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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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네스(harness)는 사전적으로는 '고삐'라는 뜻이지만, 또한 낙하산, 혹은 레펠 등의 강하를 할 때, 혹은 암벽 등반을 할 때 몸통에 감아 로프와 연결하는 벨트를 뜻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