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14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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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미노아는 누가 남편에게 연락을 했는지 대충 짐작했지만 전혀 모르는 척,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안 올라가고?”
히르직스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하지만 미노아는 짐짓 주변 경치를 둘러보는 척, 절벽에서 천천히 뒷걸음쳤다. 하지만 그의 손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플라칼 가 근위병들에게 ‘빨리 모이라’는 긴급호출을 몰래 보내고 있었다.
“모처럼 단둘이 있으니 소풍나온 기분인데? 당장 돌아가야 되는 거 아니면 좀 이따가 가자.”
미노아가 짐짓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폭포 위는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완전히 점거했고, 올라간다 해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플라칼 가 근위병들이 있는 이 폭포 아래가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참, 잘됐다. 기왕 근위병들 데려온 김에 일 좀 시키자. 동쪽 4부 능선쯤에 동맹군 놈들 쓰던 비트가 수십 개 있던데 그 부근에서 수색 좀 하라고 시켜 줘. 저놈들 다 보내면 충분할 거야.”
궁지에 몰린 미노아의 마지막 부탁에 히르직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임기응변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어떡해야 하지......’
히르직스는 지금까지도 갈등하고 있었다. 아내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지금 그의 손에 있었다. 뒤따라온 델루지 가 근위병들도 최소한 지금은 그의 명령에 따를 터였다. 아무리 콧대 높고 오만하다 해도, 지금껏 수십 년 살을 맞대고 살아온 ‘아내’였다.
“젠장.”
히르직스는 묵직한 등을 더듬었다. 그는 다행히 중무장한 상태였고, 손에 익은 창과 방패 또한 등에 믿음직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실력 정도면 델루지 가 근위병들을 단번에 몇 놈 정도 쓰러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아내의 뱃속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핏줄이 자라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신분 같으니.......”
히르직스의 아랫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기사단에서 쫓겨나고 ‘밀고자’라는 멍에를 쓴 채 폐인이 되어 떠돌던 히르직스에게 ‘상급귀족’이라는 지위, 그리고 플라칼 가의 사위라는 명예를 준 건 베흔, 그리고 남부 최고제후가인 델루지 가였다. 지금 처가인 플라칼 가는 어차피 델루지 가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제롬의 약속대로라면, 그는 이번엔 델루지 가의 사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저네들은 좀 다른 데로 보내 달라니까.”
미적거리는 남편의 태도를 보다못한 미노아가 버럭 화를 냈다.
“올라가시죠.”
남편에게 무어라 더 소리를 지르려는 미노아 경을 덥석 붙든 건 히르직스를 따라 온 델루지 가 근위장교, 콘라드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는 미노아가 채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그를 절벽 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 손 치우지 못해. 어딜 맘대로.......”
미노아 경이 손을 쳐내려 했지만 콘라드 제대장은 미노아의 손목을 덥석 잡아 뒤로 비틀었다.
“여길 올라가신다면서요.”
짧은 비명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는 아내의 모습을 히르직스는 비참한 기분으로 애써 외면했다. 절벽 위에 있던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아래쪽으로 로프를 던져주었다. 물론, 히르직스는 잘 알고 있었다. 저 로프 중간이 이미 반쯤 잘려있다는 것을.
“이거 놓으라니까! 여보! 이놈들 뭐야!”
불길한 조짐을 눈치 챈 미노아가 남편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묘한 긴장감을 알아챈 플라칼 가 근위병들 또한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콘라드 제대장은 미노아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를 다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때, 미노아를 따라온 플라칼 가 근위병 소대장이 콘라드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경께서 싫다 하시지 않습니까.”
“뭐냐, 소대장 따위가.”
팔을 붙드는 근위병 소대장에게 콘라드 제대장이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소대장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고작 제대장 따위가 우리 플라칼 종가 장녀이신 미노아 플라칼 경께 무례를 범하는 건 어떻고요?”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던 콘라드 제대장이 소대장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가며 협박하듯 속삭였다.
“네놈 이름이 뭐냐.”
“........플라칼 가 근위기병연대 11중대 2소대장 후스 콘스탄츠 대수입니다.”
“감히 최고제후의 명에 저항하는 거냐.”
움찔한 후스 콘스탄츠 소대장은 미노아의 남편 히르직스를 돌아보았다. 지금이야말로 남편인 그가 나서야 할 때였다. 그는 멍하니 서서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는 히르직스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지금 뭣 하시는 겁니까! 대장군님! 이분께선........”
“이 새끼!”
콘라드의 팔에 붙들려있던 미노아는 상대의 주의가 풀린 틈을 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힘껏 후려쳤다.
“읍!”
입을 가린 콘라드의 팔을 꽉 붙든 그는 몸을 낮추며 그의 거구를 힘껏 메쳤다. 얼떨결에 공중으로 붕 솟아오른 콘라드의 큰 체구는 유난히 큰 쾅 소리를 내며 흙바닥에 내리꽂혔다.
“동료들이 올 때까지 내 곁을 지켜라! 이놈들은.......”
칼을 뽑아들며 쓰러진 콘라드를 힘껏 찌르려던 미노아는 뒤에서 몸으로 덮쳐 온 델루지 가 근위병에게 허리를 받히며 돌바닥에 그대로 동댕이쳐졌다. 냇가의 큰 돌에 옆구리와 얼굴을 세게 부딪친 미노아가 짧은 비명소리를 냈다.
“이놈이!”
돌에 받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번쩍 치켜든 미노아가 자신의 몸통을 붙든 델루지 가 근위병의 머리를 향해 칼을 힘껏 휘둘렀다. 그는 칼날을 보며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어릴 때부터 모진 훈련으로 다져진 전사가문 딸의 노련한 칼끝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발사!”
휘하 병사의 머리가 순식간에 두 토막이 나는 광경에 정신이 퍼뜩 든 콘라드가 주변, 그리고 절벽 위에 대기하던 델루지 가 근위병들에게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앗!”
절벽 위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콘스탄츠 소대장이 공중을 휙 돌아보았다. 절벽 위에서 기다리던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손에손에 투창을 뽑아들고 있었다.
“투창이다! 장군님을 지켜!”
그는 등에 멨던 방패를 휙 돌려 왼팔에 들며 쓰러져 있던 미노아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델루지 가 근위병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진 투창에 미처 방패를 들지 못한 근위병 4명이 머리, 어깨를 명중당하며 비명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움츠리십시오!”
콘스탄츠 소대장이 미노아의 피가 흐르는 머리와 몸통을 방패,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가리며 악을 썼다. 갑주조차 입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임신한 몸에 투창을 맞는다면 치명적이었다. 거의 십여 발의 투창이 그의 방패, 그리고 그의 주변에 집중적으로 꽂혔다.
“악!”
몸을 움츠리려던 미노아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짧은 투창 한 발이 그의 팔을 찢고 땅바닥에 세차게 꽂혔다. 미노아의 붉은 피가 콘스탄츠 소대장의 얼굴로 확 번졌다.
“힘내십시오! 장군님! 조금만.......”
계속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콘스탄츠 소대장은 등에 방패를 진 채 미노아를 질질 끌고 히르직스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곳에만 투창이 떨어지지 않았고, 설마 친자식을 임신한 아내를 대놓고 공격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응?”
콘스탄츠 소대장이 방패 밖으로 고개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함께 온 20여명의 소대원 중 이미 절반 정도가 투창에 맞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고, 나머지 소대원들이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변을 이미 20여명의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타마르 장군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이분께선 장군님의 부인 아니십니까!”
주변을 포위한 채 접근해오는 델루지 가 근위병들의 모습에 절망한 콘스탄츠 소대장이 신음하는 미노아를 붙든 채 히르직스에게 울부짖었다. 히르직스는 마지막으로 갈등하는 듯 미노아를 다시 돌아보았다. 콘스탄츠 소대장의 품에 안긴 미노아의 숨결이 무슨 이유엔지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히르직스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씨발, 빌어먹을.”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콘라드 제대장이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며 자신의 근위병들을 돌아보았다.
“다 없애고 최대한 빨리 철수한다. 우린 4부 능선에서 수색 중이었던 거야.”
“히르직스.......”
미노아가 피 묻은 손을 뻗어 남편의 망토자락을 꽉 붙들었다.
“제발.......도와줘.......당신 아이를 봐서라도.......”
미노아는 히르직스의 등에 멘 창을 쳐다보며 이 남편에게 난생 처음으로, 비굴해 보일 정도로 간곡하게 부탁했다. 명색이 제국 제일의 용장인 히르직스가 앞장선다면, 그가 아내와 아이를 지키려고만 한다면 몇 남지 않은 플라칼 가 근위병만으로도 이들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미노아는 짧은 통증을 느낀 듯 얼굴을 찡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당신 아이라고.......”
고통에 조금씩 일그러지는 아내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히르직스의 눈가에 잠시 갈등이 맴돌았지만 길지는 않았다. 그는 아내의 손에 쥐인 망토자락을 뽑아내며 한숨과 함께 뒤로 천천히 돌아섰다.
“다른 남편놈들 중 하나의 자식인지도 모르지.”
붉은 피로 뒤덮인 미노아의 절망어린 눈가에 매정하게 멀어져가는 남편의 등, 그리고 그의 망토에 새겨진 플라칼 가의 사자문장이 흐릿하게 반사되었다.
“다 죽여!”
콘라드 제대장이 칼을 번쩍 치켜들며 히르직스의 옆을 스쳐 미노아에게 돌진했다. 그를 따라, 20여명의 델루지 가 근위병이 몇 남지 않은 플라칼 가 근위병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소대 전원! 죽을 때까지 장군님을 지켜라!”
콘스탄츠 소대장이 팔을 휘저으며 자신의 병사들에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플라칼 가 근위병들, 심지어 투창에 맞아 쓰러져있던 병사들 중 몇까지 비틀거리며 일어나 거의 2배 가까운 이 ‘동지였던 적’에게 맞섰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콘스탄츠 소대장 비틀거리는 미노아를 어깨로 받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옆에서 누군가 달려드는 기세에 급히 옆으로 돌아서야 했다.
“멍청한 새끼!”
콘스탄츠 소대장은 머리 위에서 꽂히는 콘라드의 칼을 반사적으로 방패로 쳐내며 오른손으로 칼을 휙 뽑아들었다. 자신의 팔과 배를 휙 스치는 그의 칼날에 콘라드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갑주 틈새를 베고 지나간 깊숙한 칼자국에 머리털까지 곤두섰던 그는 고작 소대장에 불과한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피를 본 그는 차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잠시 머뭇거렸다.
“말만 들으면 최고제후께서 크게 보답하실 거다!”
“닥쳐, 개새끼야!”
“저희가 맡을 테니 모시고 달아나십시오!”
콘스탄츠 소대장은 부상병 두 명이 필사적으로 콘라드의 앞을 막아선 새 재빨리 돌아섰다. 그의 앞을 막으려던 다른 델루지 가 근위병의 앞에도 병사들이 기를 쓰며 달려들어 한쪽으로 밀어내 길을 뚫었다.
“여기요! 계곡 밑으로 가십시오!”
콘스탄츠 소대장은 병사들이 너무도 고마웠지만 지금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미노아를 끌어안고 좁은 바위틈을 재빨리 빠져나가 계곡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힘내십시오! 장군님!”
그는 자꾸만 휘청거리는 미노아를 다시 추켜세웠다.
“부군의 도움을 얻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픈 척 하실 필요는......”
가뜩이나 큰 덩치의 미노아를 억지로 잡아끌려던 콘스탄츠 소대장은 움찔거리며 그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지금까지도 미노아가 남편의 도움을 얻기 위해 엄살을 부렸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거의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미노아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 자궁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 바위에 옆구리를 심하게 찍혀 내장이 파열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노아가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래.......가자.......”
미노아가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몇 발짝 내딛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미노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콘스탄츠 소대장은 급한 대로 그를 등에 업었다. 임산부를 업는 것부터가 그다지 현명치 못함을 모르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플라칼 가 근위병들을 돌파한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콘라드를 선두로 어느새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하.......아악.......”
미노아가 몸을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원군 새끼들은 지금 어딨는 거야!”
떨리는 다리에 결사적으로 힘을 가하며 콘스탄츠 소대장이 울부짖었다. 지원군이 늦을 수도 있겠지만, 델루지 가의 공작 때문에 아예 오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단 1시간, 아니 1분이라도 시간을 벌며 도망쳐야만 했다. 콘스탄츠 소대장은 할룩스를 뽑아들고 본대를 호출했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빌어먹을!!!........장군님, 물로라도 가겠습니다. 제 목을 꽉 안으십시오!”
등에 업힌 미노아는 끔찍한 복통에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을 돌린 콘스탄츠 소대장은 크고작은 돌로 뒤덮인 계곡을 따라 막 얼음이 녹은 찬 얼음물 위를 비틀거리며 기었다. 근위병들은 잠시 방향을 놓친 듯 계곡 위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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