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15화 (514/1,132)

< -- 515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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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거의 판단력을 잃은 채 필사적으로 걸음만 내딛던 후스 콘스탄츠 소대장은 등에 업힌 미노아의 숨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장군님! 괜찮으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응.......”

미노아가 힘겹게 대답했지만 제대로 된 사람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의 엉덩이를 무심코 짚으려던 후스는 기겁을 하며 손을 떼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미노아를 바닥에 급히 내려놓았다. 미노아의 찢긴 얼굴과 팔에서 피가 아무리 많이 났다고 해도 아랫도리까지 이 지경이 되었을 리는 없었다. 미노아를 숲 한쪽 고운 흙 위에 눕힌 그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미노아의 아랫도리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 안, 그리고 턱과 가슴에도 이미 붉은 피로 범벅이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입니다, 저 때문입니다.”

“아냐, 아냐.......자네 때문이 아냐.......”

바닥에 누워 떨던 미노아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후스를 도리어 달래주었다. 후스도 심한 토혈과 하혈로 죽어가는 상관을 억지로 업고 더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다.

“후스.......콘스탄츠 대수라고 했나?”

“예.”

“콘스탄츠라.......남부 귀족다운 멋진 성이군......고작 델루지 가 충견에 불과한 플라칼 가보다 말이야.......”

미노아가 짧으나마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시선을 거두며 차가워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명령이다.......본대로 귀환해라.”

미노아가 핏물로 비릿해진 침을 억지로 삼키며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스가 놀란 얼굴로 미노아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가슴과 다리 사이를 붉게 물들인 피와 정체모를 체액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 가서.......무슨 일이 있었는지.......보고드려라.......반드시.......살아서 알려드려야 한다. 명령이다........콘스탄츠 소대장.”

“근위장교는 어떤 경우에도 상관에 대한 호위를 포기하고 떠날 수 없습니다. 근위기병대 규정에 어긋납니다.”

후스는 칼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가라니까!”

“따를 수 없습니다!”

미노아가 이를 빠드득 갈았지만 후스는 못 본 척 칼을 쥐고 계곡 위를 다시 올려보기만 했다.

“아, 아악.......”

지독한 통증에 미노아가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지만 후스로서는 아무 것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외상에 대한 응급처치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고 익혔지만 이런 상황은 남자인 그로서는 당혹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미노아의 얼굴을 꽉 껴안으며 달래주는 것이 전부였다.

“델루지 가 놈들이 중계소를 매수한 것 같으니 거길 통하지 않고 직접 통신할 수 있는 거리까지 아군이 도착하면 연락이 될 겁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가라니까, 제발.......남편도 버린 년을 왜 네가 지키냐고......”

고통을 견디지 못한 미노아가 몸을 비틀며 흐느끼듯 말했지만 후스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이 강인한 상관이 흐느끼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지금 그의 이런 모습이 그저 몸에 입은 상처 때문만이 아닌, 수십 년을 함께 살아 온 남편에게 배신당한 절망감 때문이라는 것도.

그때, 지금껏 꺼진 듯 아무 반응이 없던 미노아의 할룩스가 반짝거리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후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상관을 대신해 급히 할룩스를 받아들었다.

“어디 있냐! 지금 어디 있냐고!”

인사도 없이 눈앞에 확 나타난 건 수백의 아군 기병들을 거느린 채 말에 오른 종장 카나르 경의 다급한 모습이었다. 후스 역시 그의 모습이 감격스러울 정도로 반가웠지만 지금 인사말이나 경례 따위로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통신이 연결되었다는 건 최소한 아군이 10스타디아 이내의 거리에 있다는 뜻이었다.

“폭포 북쪽 하류 계곡 10스타디아 지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종장님! 제발 빨리 와 주십시오! 미노아 경께선 아직.......”

“저기! 저기 있다!”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후스는 언덕 아래에서 들려온 콘라드의 신경질적인 고함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는 미노아의 어깨를 두 팔로 꽉 붙들었다.

“종장님께서 오십니다! 제발! 참으십시오!”

쇼크 때문인지 부들부들 떨고 있던 미노아는 이제 더 이상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후스는 꿈틀대는 그를 바닥에 질질 끌며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언덕 밑에서 달려오는 적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미노아가 쓸려간 바닥을 따라 붉은 피의 흔적이 그대로 그려졌다. 후스는 2명의 휘하 병사와 함께 달려오는 콘라드를 협박하듯 고함을 꽥 질렀다.

“지금 우리 제후님께서 기병대를 이끌고 이곳에 오고 계신다! 빨리 물러나지 않으면 모두......”

“거짓말 따위는 집어 쳐! 그런다고 살려줄 줄 알았냐!”

후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이미 피를 본 콘라드 또한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후스는 미노아를 바위 틈새에 무작정 밀어 넣고 그 앞을 급히 막아섰다.

“실수라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언덕을 달려 올라온 3명의 적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인 후스는 칼과 방패를 꽉 쥐며 두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 이년을 지키려 든 게 실수야!”

조금 전, 이미 후스의 칼에 베였던 콘라드는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함께 온 2명의 병사들에게 상대를 먼저 공격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후스는 칼과 방패로 일단 상대를 쳐냈지만 정면에서 돌격해오는 콘라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네놈도 당해 봐라!”

콘라드는 자신을 베고 도망갔던 이 상대를 놀리듯 큰 고함과 함께 그의 허벅지를 힘껏 찌르며 고함을 질렀다. 칼에 찔린 후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지만 미노아를 가려놓은 바위 앞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맛이 어때! 이번엔 제대로.......”

신나게 떠들려던 그는 계곡 남쪽에서 느껴져 오는 묘한 진동에 잠시 움찔거렸다. 그것이 기병대의 우렁찬 울림이라는 건 그는 물론이고 후스 역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겁에 질린 콘라드는 쓰러진 후스를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빨리 비켜!”

그는 다시 칼을 치켜들고 미노아를 숨겨놓은 바위틈으로 쇄도했지만 상대가 머뭇거리는 새 뒤로 물러난 후스는 바위틈에 몸을 끼고 잔뜩 움츠린 채 방패로 그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그 사이 말굽소리는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기랄!”

언덕 밑에서 기병들의 형상이 번쩍거리며 나타나자 순간 다급해진 콘라드는 후스를 놔둔 채 급히 뒤로 돌아섰다.

“내가 실수라고 그랬지!”

바위틈에서 재빨리 다시 기어 나온 후스는 언덕 위로 도망치려는 콘라드의 발목을 덥석 붙들었다.

“어딜 가!”

바닥에 뒹군 콘라드가 후스의 팔과 머리를 향해 다시 칼을 휘둘렀지만 방패에 맞아 튕기면서 그의 귀 한쪽을 잘라낸 것이 전부였다. 그 사이, 말을 타고 거세게 쇄도해 온 플라칼 가 근위기병 선봉 십여기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이 둘의 옆을 무섭게 스쳤다. 놀란 콘라드가 후스를 뿌리치고 달아나려 했지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다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저 새끼들도 잡아!”

대장 콘라드보다 앞서 달아나던 2명의 델루지 가 근위병들 역시 뒤를 바싹 쫓아온 플라칼 가 근위기병들의 창자루에 뒤통수를 찍히며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겁에 질린 콘라드는 엉금엉금 기어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수백의 플라칼 가 기병들이 계곡을 온통 은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꼼짝 마!”

콘라드는 말에서 뛰어내린 플라칼 가 근위기병들에게 어깨가 밟힌 채 바닥에 나동그라져야 했다.

“나, 난 델루지 가.......”

콘라드가 자신을 밟은 플라칼 가 근위병들에게 무어라 버럭 호통을 치려했지만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언덕 밑에서 유난히 큰 말굽소리와 함께 건장한 군마와, 그 등에 앉아있는 우람한 체구의 카나르 경 앞에서 그는 차마 입조차 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카나르 경은 당장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근위기병연대 11중대 2소대장 후스 콘스탄츠 대수입니다. 미노아 경께선.......”

관등성명을 밝히며 몸을 일으켜 경례하려던 후스는 얼굴과 다리에서 피를 쏟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미노아는 어디 있나! 내 딸이 어디 있어!”

이미 창백해진 카나르 경은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소리부터 버럭 질렀다. 후스는 카나르 경에게 미노아가 있는 바위틈을 손으로 가리켰다. 의무병들이 바위틈에 쓰러져 있던 미노아를 급히 끄집어내 바닥에 눕혔다.

“미노아!”

얼굴과 팔, 아랫도리가 피로 범벅이 된 채 의식을 잃어가는 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카나르 경이 비명처럼 이름을 부르며 그를 와락 껴안았다.

“미안하다. 얘야, 다 내 잘못이다, 제발 눈 좀 떠 봐라.......”

투구를 벗어던진 그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악을 쓰고 울부짖었다.

“일단 물러나십시오! 제후님, 지금은.......”

함께 온 의무병이 창백해진 카나르 경을 미노아에게서 떼어놓았다. 병사들이 떨고 있는 미노아를 담요를 깔은 따뜻한 들것 위에 급히 눕혔다.

“이런 제기랄.”

미노아의 옷을 벗기고 상태를 간단히 확인한 의무관이 당황한 듯 머리칼을 쥐었다. 그는 의무병들에게 장막을 치라며 급히 눈짓을 보냈다.

“어떤데! 어떠냐고!”

“아기는.......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까짓 건 상관없으니까 내 딸이 어떠냐고!”

카나르 경이 소리를 꽥 질렀지만 의무관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응급 호흡장치를 낀 채 인공혈액과 약제를 투여받으며 고통스럽게 고개를 젓던 미노아는 아버지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눈에 젖은 눈물을 본 카나르 경은 말리는 의무병을 거칠게 뿌리치며 달려들어 딸의 얼굴을 힘껏 안았다.

“아버지, 아버지.......”

남편에서서 버림받았던 그는 든든한 아버지의 품에 결국 얼굴을 묻으며 다시 몸을 떨었다. 그의 바이탈사인을 계속 살피던 군의관이 빨리 후송을 준비하라며 고함을 질렀지만 표정은 이미 어두웠다. 지혈제를 투여하고 응급수혈을 했지만 지독한 내출혈은 막을 수가 없었다.

“날 버린 놈........”

미노아가 아버지의 가슴을 짚으며 몸을 비틀었다. 미노아가 고통에 말을 잇지 못하던 숨 막히는 몇 초 동안 카나르 경 또한 멍한 얼굴로 숨을 멈추고 있었다.

“절대로 용서하지.......말아요......”

의식이 희미해지는 듯 힘없이 까딱거리던 그의 고개는 천천히 옆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그의 눈에 가득 고여있던 눈물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려 아버지의 무너지는 가슴을 적셨다.

“미노아? 미노아!”

카나르 경이 악을 쓰며 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카나르 경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딸의 굳은 얼굴을 한참이나 멍하니 쳐다보았다.

“미노아.......제발........”

카나르 경이 딸의 뺨을 흔들었지만 지독한 고통 속에 죽어간 그의 얼굴은, 전장으로 떠나던 아버지를 향해 양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이며 활짝 웃어주던 그 씩씩하던 장녀의 얼굴은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얘야.......내가, 내가 잘못했다........다 내가 잘못했어.......”

카나르 경이 얼어붙은 땅 위에서 조금씩 식어가는 딸의 얼굴을 품에 꽉 안으며 용서를 빌었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미노아의 하얗게 변한 얼굴 위로 슬픔, 고통, 지독한 후회가 뒤섞인 아버지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왜, 왜........”

그는 딸의 시체를 부서져라 안은 채 자리에서 벌벌 떨었다. 지금껏 그 많은 가문 사람들을 전장에서 잃었지만 바로 그 자신의 딸을, 그것도 손자까지 임신한 채로 자신의 품에서 보낸다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아아아아악!”

고개를 치켜든 카나르 경은 딸, 그리고 두 명의 손자까지 함께 앗아간 이 잔인한 숲을 쩌렁 울리듯 큰 고함, 아니 처절한 절규를 토해냈다. 그는 딸의 시체에 머리를 묻고 큰 소리로 계속 울었다. 그의 눈물, 슬픔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격변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은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후스, 그리고 그의 참모진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릴라크가 딸을 보낼 때처럼, 아버지의 눈물방울 같은 하얀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카나르 경은 숨이 끊어진 딸의 얼굴에 붙은 얼음처럼 찬 눈송이를 맨손바닥으로 조심스레 닦아냈다. 우는 것도 지쳐버린 그의 얼굴에는 이제 아무 표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하얀 입김이 미노아의 얼굴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문득 옆으로 움직인 건 그때였다.

카나르 경은 죽은 딸을 들것 위에 조심스레 눕혀주고는 마치 살아있는 아기를 감싸듯 담요로 꼼꼼하게 감아 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이마와 뺨,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저놈부터 네 앞에서 처리하마.”

카나르 경이 허리춤에서 메이스를 뽑아들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핏발선 시선은 플라칼 가 근위병들에게 짓밟힌 채 벌벌 떨고 있는 콘라드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표를 힐끔 쳐다보았던 카나르 경이 입가를 잠시 떨었다.

“며늘아기에게서도 들었던 그 이름이군.”

순간 파랗게 질린 콘라드가 가슴의 델루지 가 종가 근위병 문장을 가리키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전 최고제후 제롬 공의 특명 근위장교인데 이러시면 제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너희 가문에서 뭘?”

카나르 경이 묘한 비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콘라드는 그가 굵고 건장한 팔로 번쩍 치켜든 메이스를 올려보며 놀라 비명을 질렀다. 카나르 경의 손에 들린 둔중한 메이스의 흠집 가득한 헤드가 그동안 그가 델루지 가를 위해 나가야 했던 그 많은 전장을 그대로 보여주듯 유난히 번들거렸다.

“제후님! 이자는 델루.......”

“너도 박살나고 싶지 않으면 닥쳐.”

카나르 경은 말리려는 측근 참모를 발로 걷어차며 손에 든 메이스를 힘껏 내리찍었다. 겁먹은 콘라드가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카나르 경의 묵직한 메이스는 그의 팔뼈를 단번에 산산조각내며 중간을 으스러뜨렸다.

“아, 아아악!”

콘라드는 팔을 쥐며 울부짖었지만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카나르 경은 표정없는 무미건조한 눈빛 그대로 콘라드의 머리를 다시 후려쳤다. 콘라드의 머리 한쪽이 주저앉으며 덩어리피가 터져나왔지만 카나르 경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다시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제, 제후님, 이건 아니오니 제발 진정.......”

카나르 경을 둘러싼 참모들이 경악하며 고개를 저었다. 카나르 경은 숨이 끊어져가는 콘라드의 머리, 얼굴, 팔 다리를 가릴 것 없이 메이스로 계속 후려쳤다. 희생물의 뼛조각이 드러나고 잘린 살점, 체액이 얼굴까지 튀었지만 손녀에 이어 딸까지 잃으면서 이미 감정까지도 잊어버린 그의 표정은 처음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제후님, 제발.......”

완전히 짓뭉개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콘라드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는 그를 참모 중 한 명이 달려들어 가까스로 뜯어말렸다.

“씨발! 놓지 못해!”

말리는 참모를 옆에 동댕이쳐버린 카나르 경은 바닥에 흩어진 부서진 살점을 손으로 집어서는 서슴없이 입에 넣었다. 놀란 참모들, 근위병들이 기겁을 하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히르직스는 어디 있냐? 임신한 지 마누라가 남의 손에 죽었는데 그 개새끼는 어디 있고 네가 여기 있냐?”

붉어진 눈을 부릅뜬 카나르 경은 콘라드의 살점을 잘근잘근 씹으며 후스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사람고기를 씹어먹는 제후의 모습에 놀란 후스 역시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빨리!”

고함을 지르는 카나르 경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후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분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이 히르직스 경을 뜻하신 듯........”

모든 것을 알아챈 카나르 경이 침통한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피묻은 손으로 죽은 딸의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 못난 아비 잘못이니.......내 손수 원수를 갚아주마........”

그는 콘라드의 살점을 삼키며 붉게 충혈된 눈을 천천히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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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정으로 수요일 연재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대신 이번회는 조금 길게 올립니다.

다음 연재는 금요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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