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16화 (515/1,132)

< -- 516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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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닫아! 성문 닫아!”

황성 동문을 맡은 아메샤 스펜타 크샤트라 연대장의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연합군 발리스타가 날린 불덩이의 폭음 속에서 힘겹게 공기를 울렸다. 델루지 가 중장보병대의 전진을 최대한 저지한 베아트릭스의 궁기병부대가 전장에서 썰물처럼 빠져 황성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그리고 부상병, 낙오병들을 추스른 마지막 기병 50여 기가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제 성벽 밖에서 모든 동맹군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발사!”

성문이 닫히는 굉음과 동시에 성벽 위의 서부 사역병단 발리스타 200여대가 동시에 불꽃을 공중으로 날렸다. 양쪽에서 쉴 새 없이 날리는 발리스타의 꼬리가 그리는 시커먼 연기가 한겨울, 늦은 오후의 침침한 하늘을 이미 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전진! 전진! 우리 숫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모르나!”

델루지 가 사관과 장교들이 사방에서 악을 썼지만 전진은 더디기만 했다. 워낙 급하게 시작한 공성전인데다가 선두에서 부비트랩, 함정 같은 치명적인 시설물들을 해체해 주었어야 할 플라칼 가 야전 사역병들이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한 채 움직이지 않는 통에 사정은 더 심각했다. 델루지 가 사역병들이 급하게 투입되었지만 그들 역시 준비가 부족했던 터라 고작 공성탑의 진로를 확보하는 것이 전부였고, ‘몸으로 밀어붙여야 할’ 보병들까지 지켜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사관 한 명이 무너진 함정 위에 망토를 벗어 가리며 고함을 꽥 질렀다. 하지만 도대체 몇 개나 되는지도 모를 이런 함정에 빠져 갈가리 찢겨나간 시체는 이미 사방에 널려서 찾아보기에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발리스타에 맞아 산산조각나거나 불에 타 버린 시체는 가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성벽까지 전방 8스타디아(1.2km)!”

선봉대 기수가 깃발로 앞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여전히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플라칼 가 보병대와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델루지 가 보병대 후미 사이에는 거의 1천 구가 훨씬 넘을 델루지 가와 세닉 가 보병들의 시체가 얼어붙은 땅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쓰러져 있었다.

“성벽까지 전방.......”

다시 깃발을 치켜들려던 기수는 바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엄청난 불덩이에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사방으로 깨져 흩어지는 파편과 흙무더기, 돌덩이 사이로 죽은 병사들의 살점과 찢긴 깃발이 함께 날아올랐다. 놀란 병사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이 발리스타를 날렸을 서부 사역병들의 환호성 소리가 묘한 불협화음을 내며 공기를 울렸다.

“맙소사, 저런 걸 어떻게 공격하라고.......”

지금껏 이런 어마어마한 성을 단 한 번도 마주해보지 못한 델루지 가 중장보병들의 표정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후방 예비대일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가 얼떨결에 선봉이 되어버린 터라 미처 마음의 준비도 채 되어있지 않았다. 멀리서는 언뜻 그 규모를 짐작할 수도 없었던 황도의 성벽은 다가갈수록 무거운 위용으로 이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처음이라 그래.”

후방의 탑에서 전선을 지켜보던 마누엘 경이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조카이며 총사령관인 제롬에게 말을 건넸다.

“이번 전쟁 들어서 우리 가문에서 공성전 투입되었던 건 이암성 공격에 투입되었던 부대뿐인데 2군하고 함께 오느라 아직 도착을 안 했거든. 그네들이 앞장섰으면 좀 나았겠지만 꼭 지금 해야 된다니 별 수 없지.”

숙부 마누엘의 핀잔 섞인 한 마디에 제롬이 대번 눈을 흘겼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공성전에 불만이 많기는 마누엘 역시도 병사들과 마찬가지인지, 그는 짜증섞인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공성전은 어차피 소모전이야. 결국은 누가 먼저 지쳐 떨어지느냐지 드라마틱하게 확 끝나버리는 건 어마어마한 전력 차가 있던지, 성 내부에서 배신자라도 나오지 않는 한 힘들거든. 눈앞에서 좀 끔찍하다고 괜히 조급해질 거 없어.”

“그 전자에 해당하니 곧 끝나겠군요.”

제롬의 대꾸에 이번엔 마누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하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듯 안절부절못하던 제롬은 느긋해 보이는 숙부에게 대번 짜증을 부렸다.

“오늘 결판을 지어야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말입니다.”

제롬은 여전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플라칼 가 보병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전쟁만 끝나면 저놈들을 작살내 버릴 겁니다. 아버지 때는 찍소리도 못하던 것들이 이젠.......”

마누엘은 조카 제롬이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제롬의 눈길이 줄곧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곳에는 조금 전 막 합류한 베흔의 근위대 1군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펑 소리와 함께 연합군 사령부 바로 앞에 있던 거대한 발리스타가 첫 번째 불을 뿜었다. 연합군이 보유한 것 중 가장 거대한 그 발리스타가 날린 어마어마한 불꽃은 귀를 찢는 진동음을 내며 공중을 날아 진군하는 연합군 보병대의 머리 위를 넘었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는 황성의 동쪽 성문 위, 동맹군 수비병의 지휘부를 향해 공중에서 내리꽂혔다.

“온다!”

관측병의 고함소리와 함께 놀란 동맹군 장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곳에는 이미 지붕과 장막이 쳐져 있었지만 발리스타를 막을만한 시설은 결코 아니었다. 위장막과 지붕을 뚫고 들어온 발리스타 불꽃은 황실과 아메샤 스펜타의 지휘부가 모여 있던 누각을 순식간에 시뻘건 불덩이로 낼름거리며 집어삼켰다.

“에익! 썅! 빌어먹을!”

누각을 빠져나온 페로가 불타고 있는 건물에 돌을 집어던지며 마구 욕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황궁에 좀 조용히 처박혀 있으랬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페로는 옆에 선 누군가---그가 아니라면 감히 이런 소리는 입에 담을 엄두도 내지 못할---에게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전장에 나갈 때 매번 따라 나와서 귀찮게 한 게 누구였더라?”

어깨에 앉은 먼지와 검댕이를 털어낸 카렐은 허리에 찬 칼을 만지작거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눈에 확 띄는 금속 장식품들을 모두 벗고는 있었지만 유난히 큰 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비병들 사이에서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건.......제기랄!”

페로가 입을 다물며 다시 신경질적으로 돌을 집어던졌다. 그때, 또 한 발의 발리스타가 날아와 지휘부 옆, 발리스타 발사대 옆을 때렸다. 바닥에 부딪히며 깨져 날아간 불덩이가 인화물질 통을 덮치면서 성벽 위에서 큰 불길이 확 일었다. 몸에 불이 옮겨 붙은 서부 사역병 몇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었다.

“불 꺼! 씨발! 위생병 놈들은 왜 다 저기에만 가 있어! 노예 20명만 불러올리고! 37, 42번 발리스타! 사각을 담당해!”

발리스타를 맡은 엔지니어 사관들이 불붙은 채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 위를 급히 뛰어다니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연합군의 발리스타가 계속해 쏟아지면서 성벽 위에도 참혹한 시체와 부상자들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썅, 귀찮게 이 따위 거나 쏴대지 말고 빨리 올라오기나 하란 말이다.......”

손에손에 큰 양손무기를 든 아메샤 스펜타의 가디언들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거나 괜스레 이를 딱딱 부딪치며 땅을 까맣게 덮고 몰려오는 연합군 보병, 그리고 공성탑을 노려보았다. 적들이 선봉에 제일의 용사를 세우는 것처럼, 이쪽 역시 수성의 선봉에는 분대장에 해당하는 하급 사관을 맡은 중급 가디언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옵니다!”

그때, 또다시 날아든 발리스타에 놀란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 궤도를 본능적으로 확인한 그들은 파편이 튀는 순간 몸만 조금 낮추었을 뿐이었다.

“씨발! 빨리 오란 말이다!”

가디언 한 명이 소리를 지르자 나머지 가디언들까지 가슴을 드러내며 성벽이 쩌렁 울려라 고함을 질렀다. 지금쯤 테스토스테론, 엔돌핀이 최상으로 솟구쳐 있을 이 살아있는 병기들은 전투를 코앞에 둔 이 순간만은 거의 통제불능의 격한 흥분상태였다. 그때, 또다시 덮친 발리스타에 성벽 한구석, 그리고 미처 궤도를 예상치 못했던 노예 두 명의 하반신이 조각나며 피보라와 함께 공중에 솟구쳤다.

“폐하! 성벽 위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황성 안으로 피해 계십시오! 자칫.......”

황제 주변에 계속해 쏟아지는 발리스타에 당황한 크샤트라 연대장이 성벽 위에 우뚝 서 있는 카렐에게 달려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글쎄,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카렐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무수한 금빛 깃발이 일렁이며 델루지 가 보병대의 우익, 성벽 북동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큰 양손검이 그려진 자줏빛 깃발이 위에 작은 삼각기가 붙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근위대 최정예 1군단기(旗)였고, 황실 근위대장 베흔이 그곳에 함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근위대가.......공성에 참가할까?”

그제야 심각성을 절감한 페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글쎄, 평소 같으면 남부놈들 죽어가는 거 구경만 하다가 나중에 끼어들어 생색만 내겠지. 그런데 이번에도 그래 줄지는.......”

근위대의 스타일을 잘 아는 카렐이 양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델루지 가가 덤벼오는 기세도 이번 한 번에 거의 사생결단을 하겠다는 모양이고.......플라칼 가 때문인가.......그렇다면 근위대가 생각 외로 적극적으로 나올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동북쪽 성벽이야? 제기랄.”

카렐이 불안한 표정으로 페로를 돌아보았다. 페로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동북벽은 우리가 성을 빼앗을 때 제일 많이 파손된 곳이야. 지금도 사실 복구가 제일 덜 됐고. 베흔 그 새끼가 그걸 알고 저기만 노리는 거겠지.”

잠시 얼굴을 찡그렸던 카렐이 손을 치켜들어 서부 사역병단을 손짓했다.

“포대의 3분의1을 동원해 근위대를 집중 포격하도록 해라. 어쩌면 델루지 가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으니.”

카렐은 거추장스러운 케이프와 망토를 벗어 내던지고는 카토가 들고 있던 베흔의 양손검을 덥석 집었다. 하필이면 베흔의 칼을 가져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페로가 바로 눈가를 씰룩거렸다. 카렐이 이전 가디언 시절에 입던 검은 튜닉과 무장을 챙기며 페로에게 물었다.

“북동쪽 성벽은 누가 맡고 있지?”

“이암성에서 막 도착한 보병 2군단 차출병력. 타슈카 머시기 교위라나.”

“예비대로 있는 에키트 보병대 1대대를 투입해. 지난번에 그 둘이 이암성에서 한 건 올렸으니 이번에도 그 두 놈들 궁합이 잘 맞나 한 번 보자. 여기 있는 네 가디언부대 2천 중에 1천도 저쪽으로 보내는 게 낫겠어.”

카렐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타슈카 라코타 교위, 에키트 보병 1대대장을 맡고 있는 베레트라 알부르즈 교위 모두 지난 이암성의 전투에서 델루지 가 보병대를 막아낸 평민 출신, 그것도 하임달의 결전에서 살아남았던 북부 무장들이었다.

무장을 다 갖춘 카렐이 페로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근위대가 올 북동쪽은 내가 직접 갈 테니 넌 여기서 남부 놈들을 막고 있어.”

“미쳤냐?”

자칫 목소리가 높아질 뻔했던 페로가 허겁지겁 입을 가렸다.

“넌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럼 누가 베흔을 막아?”

어안이 벙벙해진 페로를 뒤로하고 카렐이 씽긋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황제에서 한 명의 가디언으로 돌아간 카렐이 호위대장 카토, 그리고 고작 십여 명의 경호 가디언들과 함께 멀어져가는 모습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킬 카토가 대단한 실력자이고, 또한 충성심으로는 죽은 토로 경에도 못지않음을 페로도 알고 있었지만, 아직 경험이 짧았고, 베흔을 직접 상대할만한 실력까지 갖춘 건 아니었다.

“젠장할, 판!”

입을 삐죽거리며 무언가 혼자 계속 중얼거리던 페로는 자신의 뒤를 지키고 있던 특등급 가디언 판을 큰 소리로 불러냈다.

“폐하의 곁에 특등급이 하나도 없으니 네가 가서 책임지고 폐하의 곁을 지켜라. 근위대가 오니 저쪽은 가디언들이 주력이 되어서 떼거지로 몰려들어올 거다.”

“알겠습니다!”

주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판이 휙 돌아서며 카렐을 뒤따라 달려갔다. 그리고 동벽을 지키던 1천여명의 페로 가디언들 역시 황제를 따라 동북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판, 그리고 데리고 있던 가디언들의 절반을 보내놓고서도 페로는 어딘지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카렐 말대로, 이번 수성전의 성패가 걸려있을지도 모르는 북동쪽 성벽에서 베흔에 맞서 싸울만한 사람은 황제 스스로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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