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20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
.
.
동북문 안쪽 ‘광장’에 이미 집결한 동맹군 북부보병은 고작해야 100명 남짓, 그리고 사관급인 몇 명의 가디언들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성벽을 제어하는 사역병, 그리고 노예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후방에서 나타난 베흔과 근위대에 당황하며 급히 대오를 만들었지만 상대는 무려 50여 가디언들이었다.
“모두 돌격해서 저 보병 놈들은 싹 쓸어버리고 성문을......”
자신만만하게 명령을 내리려던 베흔이 순간 멈칫했다. 그를 놀라게 한 건, 성벽 위에서 로프를 타고 화급히 내려오는 20여명의 페로 가디언들이었다. 그들 중간에는 특등급 가디언 판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젠장!”
보병들에게 돌격하려던 베흔은 판의 존재에 크게 당황하며 급히 방향을 돌렸다.
“너희! 3개 분대는 보병 놈들을 잡고 성문을 열어! 난 나머지 놈들하고 저 가디언들을 맡을 테니!”
명령을 내린 베흔은 붕 소리가 나도록 양손검을 양쪽으로 휘두르며 바로 판에게 돌진했다. 판은 페로 밑에서도 ‘단순무식’한 다룬이나, ‘항상 머리부터 쓰려 하는’ 킵과는 달리 양쪽을 골고루 갖추었다고 평가되는 훌륭한 가디언이었고, 먼 옛날, 아버지에게서 쫓겨난 19살의 어린 페로를 따라 동부에 망명하는 어려운 길을 따라나섰던 21명의 ‘원 멤버’ 중의 하나였다. 베흔이 이 먹잇감을 똑바로 노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평소 같았으면 네놈이 걸린 게 무척이나 행복했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하군.”
베흔의 무시무시한 돌격에 당황했기는 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베흔이 내리찍는 양손검을 악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비껴냈다.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서도 20여명의 페로 가디언, 그리고 비슷한 숫자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충돌하며 1대 1의 난장판이 연출되었다. 동북문이 열리느냐 마느냐, 아니, 황성이 이번 공성전에서 버티느냐 마느냐가 걸린 필사의 대결이었다.
카렐이 지키고 있는 동북벽에 충돌한 근위대의 공성탑은 5번 말고도 15개 정도가 더 있었지만 카렐의 재빠른 배치이동 명령 덕택에 일단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진 성벽에 기댄 5번 공성탑, 그리고 이미 들어간 15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다른 곳의 선전 역시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꼴이 딱 찌그러든 깡통이군.”
잠시 2선으로 돌아온 베레트라가 급히 물을 마시며 타슈카에게 문제의 5번 공성탑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근위대의 5번 공성탑은 이미 수십 발의 동맹군 발리스타에 집중 사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어 약간 기울어 있었지만 무너진 성벽에 반쯤 걸쳐진 덕에 쓰러지지도 않은 채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타슈카는 여전히 낙천적인 이 친구를 돌아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뭐 해. 성벽에 걸려있어서 넘어지지도 않아. 빌어먹을. 지금까지 들어간 적 가디언이 모두 몇이지?”
타슈카가 불안한 듯 성 안쪽을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성 안쪽에 근위대 가디언들이 출몰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는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150놈 정도. 총리 소유 가디언들이 싸우고 있을 테니 우리가 염려할 건 없지.”
베레트라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시작일 뿐이야. 발판만 복구되면 곧 정규군들이 몰려나올 테니.......”
언제나처럼 가장 비관적인 경우만 떠올리며, 타슈카는 이번엔 황제의 모습을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황제는 한 손에 칼을 쥔 채 성벽 바깥쪽이 아닌, 안쪽을 향해 무언가를 기다리듯 묵묵히 서 있었다. 계급의 차이가 워낙 커서인지, 아니면 아직 낯설어서인지, 황제에게는 무어라 묻기도, 직접 보고를 올리기도 어딘지 껄끄러웠다. 실제로 황제 역시, 세세한 지시 따위는 그들에게 모두 맡겨둔 채 참견하지 않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하고는 달라. ‘등급 없는 가디언’ 이라길래 난 또.......”
생각없이 떠들다가 타슈카에게 옆구리를 쿡 찔린 베레트라는 혹시 누가 듣지 않았나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가디언 출신 황제가 사사건건 작은 일까지 끼어들거나 병사들을 잔혹하게 부리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타슈카와 베레트라로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적 공성탑 측면이 노출되었다!”
“응?”
베레트라는 물병을 내던지고 성벽 모서리로 재빨리 달려나갔다. 병사들의 외침대로, 성벽의 무너진 곳에 기대고 있던 문제의 5번 공성탑의 측면이 안쪽에서부터 부서지고 있었다. 단단한 장갑으로 보호된 그 벽은 발리스타, 그리고 이쪽의 사격에서 안에 있는 병사들을 보호하는, 적들에게 가장 중요한 방어수단이었다.
타슈카 역시 고함소리에 급히 달려와 성벽 밖으로 급히 머리를 내밀었다. 안쪽에서 잘라낸 벽을 들여가는 것을 보아 일부러 떼어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떼어내서 발판으로 쓰려는 수작이군. 급하긴 어지간히 급했나. 투창병단! 발리스타!”
타슈카의 손짓에 1백여명의 투창병들이 달려와 부서지는 공성탑 벽 쪽을 향해 일제히 투창을 치켜들었다.
“발리스타 발사!”
벽이 떨어져 안쪽이 노출되는 순간, 발리스타 반장의 손이 확 내려갔다. 그리고 보호벽이 떨어져 나간 그 좁은 공간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발리스타가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근위대 병사들이 재빨리 방패를 들어 그곳을 막았지만 거대한 발리스타 앞에서는 그다지 소용이 없는 물건이었다. 넓적한 날을 단 발리스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5번 공성탑의 떨어져나간 벽 사이를 관통해 들어가 안에 있던 근위대 병사들 여럿을 순식간에 파편으로 만들었다. 좁은 공성탑 안은 터져나온 피와 잘려나간 사지, 아직 목숨이 붙은 병사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가! 나가!”
과정이야 어쨌든, 성벽의 구멍으로 진입로를 얻은 근위대 병사들이 머리 위를 방패로 가린 채 우루루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위에는 이미 투창병들, 소형 발리스타가 대기 중에 있었다. 뛰어든 병사들 중 안까지 무사히 도착한 건 채 절반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벽이 없어지면서 공성탑으로 올라오는 병사들 역시 동맹군의 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반만 들어가도 저놈들 입장에서는 성공이지. 쳇.”
한참 투덜거리던 베레트라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황제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 어딘가에서 연락은 받은 황제의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페로 가디언들이 뚫렸다고?”
카렐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판이 가디언들의 대부분을 데리고 나가면서, 지금 이곳에서 황제의 곁을 지킬 가디언은 다 털어야 100명이 조금 넘을 정도였다. 카렐은 다시 안쪽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진입한 근위대 가디언들의 소행인지, 동북문 안쪽, 보급품 적치장이 있는 곳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적치장의 물품들이야 다시 들여오면 되겠지만 저 연기는 성내에 적군이 들어왔다는, 동맹군 전체의 사기를 완전히 뒤흔들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신호탄이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기울어진 적의 공성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려오는 성 안쪽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베레트라에게 갑자기 손짓을 보냈다.
“에키트 족 정예 전사 100명만 뽑아서 내 옆을 지켜라.”
카렐이 등에 지고 있던 베흔의 검, 아니 이젠 그의 것이 된 플람베르주를 더듬으며 억양이 전혀 없는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역병들은 저곳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려라. 이곳에서 뛰어내려 적들을 바로 막겠다.”
카렐은 반쯤 기울어가는 근위대 공성탑이 기대고 있는 성벽 양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에?”
카렐의 상식에 벗어나는 지시에 타슈카와 베레트라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카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빨리 진행시키라 재촉했다.
“빨리! 적 보병이 더 들어오기 전에 저 공성탑을 쓰러뜨려야 한단 말이다! 내 직접 내려가 무너진 곳을 막겠다. 성벽 바닥과 안쪽 벽은 외벽에 비해 강도가 약하니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타슈카는 일단 사역병단에 명령은 내렸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공성탑이 걸린 성벽 중간을 아예 무너뜨려 버린다면 문제의 적 ‘5번 공성탑’은 쓰러질 테고, 지금 코앞에 닥친 근위대 보병들의 집단 난입만은 일단 막을 수 있겠지만 대신 5층 높이의 성한 성벽을 양쪽에 낀 3층 높이의 좁고 작은 ‘골짜기’가 생길 터였다. 그 구멍만 누군가 목숨을 걸고 지킨다면 적들이 더 이상 들어오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테니 카렐의 명령이 아주 황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이미 적들이 성 안에까지 진입한 상황에서 자칫 잘못되면 앞뒤로 적에게 가로막혀 몰살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선택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조금 낮은 성벽이 될 뿐이다.”
카렐이 태연하게 대답하며 몸에 손수 로프를 걸었다. 대담한 베레트라였지만 그런 황제의 지시에 순간 온몸의 소름이 쫙 돋는 것만 같았다. 무어라 걱정어린 대답을 덧붙이려던 그는 결국 생각을 접고는 평소 그 누구 앞에서도 쓰지 않았던 말을 더듬거리며 내놓았다.
“존명하겠습니다.”
베레트라는 뒤로 휙 돌아서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던 에키트 야만족 보병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에키트 보병대! 목숨을 걸고 황상을 지킬 최고의 용사 100명만 받는다! 알았나! 최고가 아니면 나오지도 말아라!”
호전적인 에키트 족들이 서로 나가겠다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카렐이 이번엔 카토를 돌아보았다.
“카토, 북쪽은 판이 맡고 있으니 넌 가디언 100명을 데리고 내려가서 남쪽에서 적을 차단하고 안에 이미 들어온 적병들을 소탕하도록 해라. 타르서스 직할군들을 동원해서 저 불을 끄도록 하고. 베아트릭스 황빈이 이끄는 궁기병들은 재정비가 끝나는 대로 여기로 올 거다. 나는 적들이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공성탑 무너진 자리를 막겠다.”
황제의 명령에 카토가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판이 북쪽에서, 자신이 남쪽에서 ‘썩은 부분’이 번지는 것을 막는 동안, 황제는 이곳에서 가장 큰 위험에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직 병에서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황제를 위험에 내던지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면.......폐하의 곁에는 고작 30명 정도밖에 남지 않습니다.”
“내가 있지 않나.”
카렐이 귀찮다는 듯 카토에게 빨리 가라며 손짓을 보냈다. 걱정어린 표정의 카토는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보고는 이곳의 가디언들 대부분을 이끌고 성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바로 그때, 서부 사역병단의 큰 크레인과 파쇄기에 직격당한 성벽 바닥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까지도 성벽 안으로 뛰어들고 있던 근위대 정규군 병사들의 머리 위에 끊어진 철근과 인조석 덩어리들이 우루루 쏟아져 내리면서 비명과 신음소리, 희뿌연 먼지가 온통 주변을 뒤덮었다. 큰 구멍이 뚫려 있던 성벽, 그리고 그 양쪽으로 적어도 50척(15m)은 될 부분의 구조체 파편이 위에서 쏟아지면서 차례로 붕괴되어 순식간에 거대한 돌더미로 변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안으로 뛰어들던 근위대 병사들도 무너지는 육중한 구조체에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너진다! 모두 나가! 빨리 나가!”
카렐의 예상대로,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곳에 기대 위태롭게 세워져 있던 5번 공성탑이 결국 끼익 소리를 내며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뒤에서 대기중이던 근위대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안에 있던 근위대 병사들은 겁에 질려 밖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을 안에 품은 채, 그 거대한 괴물은 바닥에 쓰러져 산산조각나며 그대로 거대한 무덤이 되고 말았다.
“성벽이 무너졌다!”
아직 공성탑에 들어서지 않았던 운 좋은 근위대 병사들은 무너져 내린 성벽을 쳐다보며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장교들, 그리고 사관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남은 거대한 돌무더기 폐허를 가리키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돌격! 저 무더기만 넘으면 성 안쪽이다! 우리 부대가 선봉이다! 적을 무너뜨린다!”
명령을 받은 근위대 병사들이 가디언들을 선두로 악 소리를 지르며 그 돌무더기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흙먼지가 걷히며 그들의 머리 위, 돌무더기 꼭대기에서 드러나는 그곳의 상황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선두에서 기어오르던 가디언들은 머리 위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잠시 움찔해야 했다.
“너희들도 오랜만이구나.”
돌더미 꼭대기에 서 있던 검은 튜닉 차림의 전사가 운 좋게 목숨을 건져 신음하던 근위대 병사의 머리를 서슴없이 손도끼로 잘라 내던지며 돌더미를 기어 올라오는 근위대에게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30여명의 가디언들, 그리고 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을 한 야만족 전사들이 까맣게 구멍을 막고 서 있었다. 등에 지고 있던 플람베르주를 천천히 뽑아 오른손에 든 카렐은 왼손의 도끼에 범벅이 된 피를 한 번 죽 핥았다. 피맛을 음미한 그는 마치 오르가즘이라도 느끼는 듯, 적병들을 향해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놈이 다음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