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21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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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카렐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공포에 휩싸인 가디언과 병사들은 잠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것이 누구든, 카렐의 앞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자명했다. 그때, 머리를 굴린 장교 한 명이 급히 할룩스를 작동시켰다.
“셈 대장님! 성벽 무너진 곳에 적 수괴 카렐입니다! 저희가 정면에서 칠 동안 뒤에서 협공하시면.......”
격앙된 목소리로 보고를 올리던 장교는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카렐이 왼손으로 던진 도끼에 얼굴, 그리고 손이 두 토막이 난 장교는 그대로 숨이 끊어진 채 돌더미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뇌수와 피를 쏟으며 떨어지는 동료의 끔찍한 시체를 본 순간, 다른 장교가 병사들에게 크게 손짓을 하며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질렀다.
“돌격! 여기만 뚫으면 끝이다!”
악이 받힌 근위대 병사들, 그리고 가디언들이 거의 동시에 큰 함성을 지르며 돌더미 위로 우루루 돌진했다. 카렐은 빈 왼손에 다시 두 번째 도끼를 뽑아들고는 그 거친 목소리로 쩌렁쩌렁한 함성을 울리며 공격해오는 병사들의 공포감을 뼛속까지 뒤흔들었다.
“꺼져!”
카렐의 앞에 제일 먼저 달려든, 아니, 가디언에게 밀려 카렐의 앞에 동댕이쳐진 건 정규군 보병이었다. 그는 미처 상대를 올려볼 새도 없이, 한때 상관의 손에 있던 그 잔혹한 칼에 허리부터 두 동강나 찢기며 바위 밑으로 따로따로 굴러 떨어졌다. 그 사이, 카렐을 옆에서 공격하려던 가디언 사관 역시 그가 왼손으로 휘두른 도끼에 손목이 동강나 떨어지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빌어먹을!”
넘어졌던 그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쇠 징이 박힌 카렐의 신발 뒷굽에 그대로 목을 찍히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사관급 가디언의 목이 뒤로 꺾이는 광경에 겁을 집어먹은 근위대 병사들이 치를 떨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뚫리면 죽는다! 정규군 놈들이 폐하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지켜라!”
한 손에 전투망치를 쥔 베레트라 역시 원형방패를 앞세우고 선두에 있는 카렐의 옆을 지키고 섰다. 피, 그리고 ‘명예로운 죽음의 영광’에 굶주린 에키트 족들은 바위를 기어 올라오는 근위대 병사들의 머리를 도끼로 사정없이 후려치며 마치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카렐의 계획대로, 이미 성 안으로 들어간 셈과 베흔에게 보충되어야 할 후속병력은 이 좁은 구멍에 막혀 여전히 들어가지 못했다.
좁은 돌무더기와 그 위의 황제와 전사들, 그리고 그곳을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려는 근위대 병사들의 필사의 사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어느 쪽에 미소를 지어줄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
“웬만하면 조용히 칼을 놓는 게 좋을걸.”
자신의 칼에 튕겨나가 성벽에 부딪힌 판을 노려보며 베흔이 으르렁거렸다. 평소 같으면 무조건 상대를 죽이려고부터 들었을 그였지만 지금만은 달랐다.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동북문 바로 밖에는 이미 도착한 근위대 병사들이 성문을 두들기며, 그리고 성벽을 기어오르며 악을 쓰고 있었고, 문만 연다면 그의, 아니, 연합군의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미쳤냐!”
피가 솟구치는 어깨를 꽉 움켜쥔 판은 베흔의 거듭된 공격을 다시 피하며 즉시 대꾸했다. 상황을 잘 아는 그는 이 무서운 상대와의 정면대결을 철저하게 피한 채 시간만을 끌고 있었다. 물론 이미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최소한 도망다니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베흔이 판에게 잡혀 몇 분의 귀중한 시간을 잡아먹은 새, 동북문 안 광장에는 이미 20명 가까운 페로가디언들, 그리고 1백여명의 동맹군 보병들이 사방에서 더 보충되며 다급한 그를 옥죄고 있었다.
“아악!”
한쪽에서 들려온 가디언의 비명소리에 베흔이 고개를 휙 돌렸다. 어렵게 성문 구동장치에 매달렸던 근위대 가디언 한 명이 밑에서 몸으로 매달린 십여명의 동맹군 보병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흙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성문의 주 잠금장치가 거의 50척(15m) 높이에 있는데다가 북부보병들의 육탄저항이 워낙 거세다보니 심지어 가디언조차 끝까지 올라가보지 못하고 계속 떨어지고만 있었다. 이번만 벌써 3번째였다.
“빌어먹을, 우리 보충병력은 언제 오는 거야.”
베흔은 행여 상대방에게 들릴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구동장치 앞을 당초 지켜 섰던 백여명의 동맹군 북부보병들 중 절반이 넘는 놈들이 이미 핏덩이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지만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계속 몰려들면서 숫자가 늘어난 건 물론이었고 여전히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을 뒤따라 들어왔어야 할 후속병력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응?”
등 뒤에서 들려온 큰 함성소리에 베흔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금빛 깃발과 옷깃을 반짝이며 성 안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건 그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근위대 정규군 보병 150여명이었다. 카렐이 5번 공성탑이 무너뜨리기 직전 성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운 좋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우렁찬 함성과 함께 베흔과 50여 가디언들이 성문을 열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북문 안쪽으로 물밀 듯 쇄도해 들어왔다. 그리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지금껏 베흔을 상대로 근근이 버티어 온 판의 얼굴에도 긴장과 공포가 함께 스쳤다.
“이놈을 잡아!”
베흔의 손짓에 정규군 20여명이 판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반경을 줄여놓은 베흔은 기회를 노리고 다시 판에게 달려들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치던 판은 뒤에 선 근위대 보병 한 명이 기회를 노리고 재빨리 내지른 창에 이미 다친 팔과 등을 찔리며 악 소리와 함께 물러났다. 그런 그의 코앞으로 또다시 베흔의 양손검이 무섭게 들이닥쳤다. 뺨과 허벅지를 베인 판이 재빨리 몸을 돌렸지만 바닥에는 붉은 피가 얼룩을 그리고 있었다.
“비겁한 새끼!”
판 역시 만만히 당해주지는 않았다. 베흔의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잡은 그는 앞을 막는 근위대 정규군 병사의 얼굴과 어깨를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정규군들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성문의 잠금 크레인 장치를 지키던 동맹군 북부보병대 쪽에서 절규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또 매달렸다! 잡아!”
잠시 혼란에 빠졌던 동맹군 북부보병들을 돌파한 근위대 가디언이 이번엔 3명이나 성문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북부보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그들을 붙들었지만 마지막에 매달린 1명을 떨어뜨린 것이 전부였다.
“제기랄!”
베흔에게서 달아나던 판은 다급한 마음에 급히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몸을 날려 뒤따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아무리 시간을 끈다 해도, 성문이 열린다면 모두 끝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베인 어깨와 팔의 상처가 계속 그를 괴롭혔다. 그는 거의 마비된 왼팔을 힘겹게 뻗어 이미 성문을 거의 기어오른 근위대 가디언의 뒤를 쫓았다.
“어딜 가냐!”
판이 힘껏 칼을 휘둘러 앞서 성문을 기어오르던 근위대 가디언의 발목을 후려쳤다. 순간 중심을 잃은 가디언이 휘청거리자, 그는 허벅지를 힘껏 찔렀다.
“떨어지라고!”
판은 다리를 못 쓰게 된 근위대 가디언의 옷깃을 힘껏 움켜쥐고 바닥에 동댕이쳤다. 비명소리, 핏방울을 공중에 남긴 채 근위대 가디언은 북부보병들이 우글거리는 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져 버렸다. 이젠 단 한 명이 남아있었다. 그다지 등급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 근위대 가디언 한 명이 성문의 잠금장치 크레인에 손을 대려던 참이었다. 다급해진 판은 악을 쓰고 몸을 힘껏 날려 그 가디언의 허리를 와락 붙들었다.
“씨발! 어딜 감히 손대냐고!”
판의 기습에 놀란 그 근위대 가디언 역시 손을 놓치고 구동장치에서 한참을 날아가 성문의 볼트 하나를 운 좋게 움켜쥐고는 공중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50척 높이의 아찔한 성문 꼭대기에 손가락 두 개로 매달린 근위대 가디언과, 그의 허리에 매달린 판이 서로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떨어져!”
판이 그 가디언의 몸을 흔들어 떨어뜨리려 했지만 상대 역시 필사적이었다. 칼을 들어 그 가디언을 찌르려던 판은 순간 멈칫했다. 바로 자신의 밑에, 무시무시한 베흔이 이미 와 기다리며 북부보병들을 도살하고 있었다. 이 가디언을 찌른다면, 이 높은 곳에서 자신과 함께 떨어질 테고, 베흔이 바로 자신을 노리고 덤벼올 터였다.
“학, 학.”
판이 피가 빠지면서 굳어가는 왼손을 고쳐쥐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를 매단 근위대 가디언은 눈치를 챈 듯, 다시 성문의 볼트를 차례차례 움켜쥐며 성문의 잠금장치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근위대 보충 병력이 도착하면서 궁지에 몰린 북부보병들 역시 베흔에게서 그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판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이제 끝인가........”
판이 입술을 깨물며 침침해진 하늘과, 주인 페로가 있을 동문 누각 쪽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먼저 갑니다.......주인님.......”
판은 천천히 칼을 들어 자신을 매단 그 가디언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다. 크레인의 잠금장치를 막 풀려던 그 가디언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판을 등 뒤에 매단 채 50척 아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판은 적을 떨쳐내며 몸을 돌려 문짝의 큰 볼트를 쥐려 했지만 이미 심하게 다쳐 힘이 빠진 그의 팔과 손은 볼트를 놓치며 그대로 미끄러져버리고 말았다.
“악!”
비록 가디언이라고는 해도, 이미 군데군데 다친 그의 다리는 근위대 병사 한 명을 깔아뭉개며 바닥에 꽂히는 그의 육중한 몸을 제대로 받쳐줄 수 없었다.
“제길!”
무릎 아래가 뒤틀린 판이 비명을 지으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한쪽에서 기다리던 베흔이 앞을 막는 2명의 북부보병들을 갈가리 찢어내며 그에게 돌진해왔다. 한쪽 다리로 힘겹게 일어선 판은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베흔의 넓적한 칼은 그런 그를 놀리듯 매서운 찌르기로 그의 복부를 향해 꽂혔다.
“아.......아아악......”
자리에 완전히 굳어버린 판은 히죽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베흔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베흔의 긴 칼에 푹 꿰여버린 판은 뜬금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뭉개진 말투로 더듬거렸다.
“괜찮은.......죽음이지?”
“그런 게 어딨냐!”
베흔이 이를 드러내고 악을 쓰며 칼을 옆으로 확 눕혀 힘껏 빼냈다. 잘려나간 허리 사이로 판의 내장과 피가 쏟아져 바닥, 그리고 베흔의 바지와 신발을 붉게 적셨다. 그리고 숨이 끊어진 그의 육중한 시체가 베흔의 발밑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다룬, 킵과 함께 페로 가디언부대의 3개 축을 이루던 용맹한 가디언의 최후였다.
“대장! 대장!”
판의 죽음에 놀란 페로 가디언들의 비명소리와 고함, 다급한 보고를 올리는 격앙된 목소리가 동북문 안을 처절하게 울렸다.
“너희 대장은 죽었다!”
베흔은 허리가 잘린 채 축 늘어진 판의 시체를 한 팔에 번쩍 치켜들며 아직까지 필사적으로 성문을 지키며 저항하는 북부보병들에게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판이 죽은 이상, 성문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였지만 지금까지 성문을 열지 못하고 지체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때, 남쪽, 5번 공성탑이 있던 자리에서 들려온 와아 하는 큰 함성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가까워오는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베흔의 예민한 귓가를 울렸다. 불길한 조짐을 깨달은 그는 고개를 휙 돌리며 판의 시체를 신경질적으로 동댕이쳤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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