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24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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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에게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베흔에게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까지 판에게 붙들려 까먹은 한참의 시간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베흔은 판의 시체에서 수급을 거두는 것도 포기하고 무작정 성문으로 쇄도했다.
“성문 열어! 성문 열어!”
성문 반대편 바깥에는 이미 근위대 사역병들과 보병들이 달려들어 문을 결사적으로 밀어젖히고 있었지만 안쪽의 크레인 잠금장치가 풀리지 않는 한 근위대가 모조리 다 죽어도 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성문 앞에는 여전히 200명 가까운 북부보병들이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근위대 정규군과 가디언들의 파상공세에 조금씩 구석으로 밀려나 성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판의 죽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페로 가디언들, 그리고 몇 남지 않은 북부보병들을 결국 돌파한 근위대 가디언들은 이미 성문에 몇 명이나 달라붙어 크레인과의 잠금장치를 풀기 시작했다.
“더 힘껏 밀어!”
악에 받힌 베흔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동북문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금속제 지지대가 잠금장치에서 털컥 소리를 내며 결국 풀려났다.
“밀어! 밀어!”
성벽 바깥에서 가디언 사관들의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는 마찰음, 문의 자동 개폐장치가 뜯겨나가며 망가지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동북문, 그리고 황도 중심지와 황성을 향해 직통된 길이 안쪽을 향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제야 끝났나.......”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한 베흔은 자신이 헤크마를 죽이고 아케메니안 궁을 점령했을 때와 비슷한, 묘한 감격을 느끼며 큰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껏 3번이나 황제를 만들어 온 그였지만 이번은 그에게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웠던 싸움이었다. 내심 하임달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닐지 걱정했던 그였지만 이것으로 성문이 열리고, 근위대가 들이닥친다면 생각만큼 큼 피해는 입지 않고 모든 것을 끝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대장! 대장!”
한참 즐거운 상상에 빠져있던 베흔은 셈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고개를 휙 돌렸다. 다리가 잘리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셈의 모습에 그는 순간 기겁을 했지만 일단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부하들의 등에 업혀 신음하고 있는 셈의 팔을 덥석 붙들며 물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카렐, 카렐 그놈에게........”
셈이 지독한 고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대답했다. 순간 욱한 베흔은 하마터면 셈을 바닥에 동댕이칠 뻔했다. ‘카렐을 전장에서 보면 무조건 도망쳐라’라며 그간 신신당부를 해 왔던 그였다.
“놈들.......원군이 오고 있습니다.......빨리, 빨리 이곳을 돌파하셔야........”
“왜 그놈에게.......아니다. 여기는 거의 끝나가니 염려할 것 없다.”
잠시 얼굴이 붉어졌던 베흔은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셈의 입부터 일단 막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카렐에게 덤빈 셈의 무모함을 뺨이라도 때려가며 꾸짖고 싶었지만 그는 지휘관, 그것도 중상을 입고 어렵게 돌아온 지휘관에게 결과만 놓고 왈가왈부하며 문책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셈에게 그나마 안전한 자리를 가리킨 베흔은 함께 있던 정규군 의무병을 큰 소리로 불러들였다.
“성문 열리는대로 최대한 빨리 후송해! 알았나!”
그때, 끼익 하며 성문이 더 크게 열렸다. 그리고 근위대 가디언들을 선두로, 수백의 근위대 정규군들이 벌어진 문 틈새로 쇄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필사적으로 성문 앞을 지켜 온 200여명의 북부보병들은 앞뒤로 근위대에 둘러싸인 채 무자비한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죽어도 밀려나지 마라! 시체로라도 놈들의 길을 막아야 한다!”
가디언 사관들, 장교들의 필사의 고함소리가 성문 안으로 쇄도하는 근위대 병사들의 기세등등한 함성 속에서 허망하게 메아리쳤다. 그들은 서로서로 등을 맞대고 무기인 도끼와 장창을 겨눈 채 결사적인 저항으로 버티려 했지만 이미 운명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진! 전진! 저놈들을 밟아버리고 성 안쪽으로 진입해!”
근위대의 가디언 장교들이 북부보병들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반쯤 열렸던 문이 더 크게 활짝 열리며 땅을 새카맣게 뒤덮은 근위대 정규군들이 이 ‘동북문 광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북부보병들은 성문 밖에서 계속해 몰려들어오는 근위대 정규군에 악을 쓰며 버티려 했지만 숫자, 힘에서부터 밀리며 사방에서 짓밟혀 죽는 자가 속출했다. 그때, 그런 그들의 꺼져가는 희망을 다시 붙든 건 남쪽, 성 안쪽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말굽소리였다.
“다라프시 카비아니다!”
북부 사투리가 섞인 누군가의 외침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마지막 저항을 벌이던 북부보병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페로 가디언들의 가슴을 뒤흔들기는 충분했다.
“폐하께서 오신다! 폐하께서 몸소 오신다!”
마지막 떼죽음만을 상상하고 있던 북부보병들이 마치 마약같은 함성을 지르며 근위대의 전진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아메샤 스펜타! 10열 횡대로 전진! 더 이상의 진입을 막아라!
말을 세운 카렐이 뒤따라오는 1천여의 아메샤 스펜타 전사들에게 창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성문 앞에서 그때까지 저항하던 북부보병대를 발견한 그는 다룬과, 함께 온 페로 가디언들을 가리키며 손을 앞으로 향했다.
“궁기병대는 말에서 내려 성벽 위로 올라가 적들을 사격하도록! 나는 성문 앞에서 항전중인 저 용사들을 구하겠다! 모두 내 뒤를 따라라!”
말에 오른 카렐을 선두로, 1백여의 페로 가디언들이 적군과 아군이 뒤엉켜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광장을 가로질러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굳건한 대오를 이룬 아메샤 스펜타의 보병들이 가디언 사관들의 구령에 맞춰 한 발씩 내딛고 있었다.
“전진! 전진! 적들을 막는다!”
성벽에 사방이 둘러싸인 이 좁은 광장은 이곳을 통해 안으로 진입하려는 근위대와, 그들을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동맹군간의 처절한 싸움장으로 변해갔다.
“돌격! 남은 보병들을 구해내라!”
‘하메스타의 창’의 양쪽에 달린 검은 날이 공중에 2개의 궤적을 동시에 그리며 근위대 정규군 병사들의 3명의 목과 어깨, 허리를 조각조각내 공중에 날렸다. 말에 오른 카렐을 선두로 다룬과 그를 따르는 페로 가디언들이 근위대들에 몰려 이제 고작 1백여명밖에 남지 않은 북부보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폐하를 엄호해라! 폐하의 앞을 청소하란 말이다!”
광장을 둘러싼 옹성들에는 5백여명의 궁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광장의 근위대들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지휘관인 베아트릭스는 한참 난전이 진행중인 광장에 내려와 한 손에 자리드를 든 채 애타는 얼굴로 서성대고 있었다.
“황빈은 옹성 위로 올라가십시오. 황제로서 명령입니다.”
잠시 말을 멈춰 세운 카렐이 몇 보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베아트릭스에게 꾸짖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숨결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거칠다는 것을 베아트릭스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지휘가 가능합니다, 폐하. 아니, 이곳이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니.......”
“명령이라니......”
서둘러 변명하는 베아트릭스에게 무어라 화를 내느라 잠시 정신을 팔았던 카렐은 한쪽에서 자신을 향해 무더기로 쏟아지는 근위대의 집중사격에 깜짝 놀라며 급히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잠시 집중력을 잃었던 그가 투창을 피해 반사적으로 향한 곳은 아군이 아닌, 적군 쪽이었다.
“앗!”
실수를 깨달은 그가 뒤늦게 방향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온통 근위대 병사들뿐이었다. 당황한 카렐이 방향을 돌리려 했지만 사방에서 겨눈 근위대의 창들이 그가 마음대로 움직일 여유를 주지 않았다.
“폐하! 빨리 나오십시오! 거기는.......”
당황한 베아트릭스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힌 할룩스에서 윙윙거렸지만 시알피는 사방에서 몰아붙이는 근위대 병사들의 예리한 창끝에 놀라 도리어 점점 적진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제기랄!”
카렐이 창을 휘둘러 다시 2명을 쓰러뜨렸지만 뒤의 적병들이 다시 자리를 채우면서 ‘움직일 공간’은 생기지 않았다.
명색이 황제인 그가 고작 고립된 보병 100명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뛰어든 것은 옛 습관, 혹은 단순히 과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수성전에서 동북벽이 생각지도 않게 뚫리면서 황도 수비군은 이미 보고된 것만 2천 가까운 병사를 잃었고, 판까지 전사했다면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죽은 판 대신 누군가를 ‘살아있는 영웅’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 때문에 그가 이렇게 무리를 해 가며 저들을 구하려 뛰어든 것이었다.
“궁기병대! 폐하와 아군 본진 사이를 뚫어!”
황제가 위험에 처한 것을 발견한 베아트릭스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근위대의 대오에 뛰어들려 했지만 워낙 좁은 광장에 이미 대오 자체가 의미 없어진 근위대들이 와글와글 몰려있다 보니 그 모두를 밟고 지나가지 않는 한 ‘돌파’는 사실상 어려웠다. 파랗게 질린 베아트릭스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휩쓸려가는’ 카렐의 모습을 애타는 얼굴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손에는 투창을 들고 있었지만 자칫 카렐이 맞을 위험 때문에 차마 던질 수도 없었다.
“젠장!”
지친 몸을 움직여 결사적으로 창을 휘두르던 카렐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웬 검은 말에 황급히 오르고 있는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베흔!”
거의 동시에 카렐을 발견한 베흔 역시 기다렸다는 듯 이를 갈며 창을 치켜들고 명마 ‘척설오추’의 건장한 어깨를 찰싹 후려쳤다. 이제 둘 사이에 구차한 협박이나 위세싸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카렐의 등에 걸려있는 자신의 플람베르주를 본 그의 눈에 순간 분노가 솟구쳤다.
“내가 베흔과 싸울 동안 근위대 놈들의 주의가 쏠릴 테니 그동안 고립된 병력을 구해내도록 해! 그리고 아메샤 스펜타를 최대한 빨리 전진시켜! 단독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카렐이 돌격해오는 베흔을 향해 방어자세를 취하며 한편으로는 다룬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놈을 잡아둬라! 쓰러뜨리는 자에게는 현상금과 신분상승이 주어질 거다!”
돌진해오는 베흔이 카렐을 둘러싼 보병들에게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시알피의 목을 향해 꽂혀오는 창을 급히 쳐낸 카렐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비키란 말이야!”
카렐에게 지금 문제는 돌격해오는 베흔이 아닌, 주변에서 계속해 달려드는 근위대 보병들이었다. 거액의 현상금, 그리고 말단 보병 정도의 자격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을 신분상승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예가 지금 그의 목 하나에 걸려있었다. 그 엄청난 행운에 홀린 근위대 병사들은 126년 전, 그들의 선배들이 지금의 표적과 너무도 닮은 누군가를 결국 하임달의 차가운 흙바닥에 쓰러뜨렸을 때처럼 공포조차 잊은 채 계속해 몰려들었다.
“제대로 걸렸구나!”
마치 물살이 갈리듯, 근위대 병사들을 가르며 돌격해 온 베흔의 창끝이 카렐의 가슴과 목을 똑바로 향했다. 하지만 자리에 묶인 카렐은 상대를 향해 맞돌진할 수가 없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동맹군 무장들의 표정에는 공포를 넘어선 절망감까지 스치고 있었다. 특히나 쓸데없는 항명으로 이 모든 ‘원인’이 된 베아트릭스는 차마 앞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죽어!”
말과 사람의 체중, 그리고 어마어마한 속력을 실어 가슴을 향해 돌격해 온 베흔의 창끝을 옆으로 힘겹게 떨쳐낸 카렐이 말등에서 잠시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베테랑 근위대 보병들이 창을 쥐고 시알피의 측면에서 달려들었다. 그리고 베흔은 다시 방향을 휙 돌려 이번엔 카렐의 뒤쪽에서 돌격해왔다.
“씨발! 꺼지라니까!”
카렐이 괴성을 지으며 다시 창을 휘둘러 방향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신경을 쏟은 반대편, 웬 근위대 병사 한 명이 한쪽 어깨가 잘려나가며 내지른 창이 시알피의 뒤 허벅지 장갑 사이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미 여러 군데 자잘한 부상을 입고 있던 시알피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젠장!”
시알피가 휘청거리는 것을 느낀 카렐이 말의 목을 만져주며 달래려 했지만 등 뒤에서 덤벼드는 베흔, 그리고 적병, 말에까지 모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도 불가능했다. 중상을 입은 시알피의 뒷다리가 주저앉은 그 순간, 묵직한 충격력을 실은 창날의 서늘한 기운이 측면에서 그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깜짝 놀란 카렐은 두툼한 건틀렛을 낀 한쪽 손을 반사적으로 치켜들었다.
“이익!”
베흔의 우둘두둘한 창날이 카렐의 건틀렛을 스치면서 노란 불꽃이 그의 얼굴로 튀어올랐다. 하지만 뒤이어 마치 망치질같은 묵직한 충격이 어깨를 가격하면서 그의 몸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악!”
건틀렛을 낀 베흔의 팔꿈치, 그리고 어마어마한 충격력에 온몸이 내던져진 카렐은 휘청거리는 시알피의 등 위에서 결국 중심을 잃고 옆으로 붕 날아올랐다. 베아트릭스와 동맹군 무장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근위대 병사들의 환호성이 이 작은 광장을 뒤흔드는 가운데, 공중으로 내던져진 카렐의 몸은 큰 소리를 내며 근위대 병사들이 우글거리는 중간에 내동댕이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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