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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26화 (525/1,132)

< -- 526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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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고개를 치켜든 베흔은 당장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워진 황궁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자신이 어쩌면 저곳에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공포감이 잠시 그를 에워쌌다. 참모 가디언 한 명이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달려와 알렸다.

“카렐 놈이 적진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래, 그래.......”

베흔이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가디언은 카렐이 ‘도망갔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동맹군 아메샤 스펜타가 거세게 전진해서 카렐이 있던 곳까지 장악했다는 편이 정확했다. 그리고 고립되었던 1백여 북부보병들도 거의 3할 가까운 병력을 잃었지만 어느새 본대에 합류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건 상관없다. 놈들을 돌파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베흔의 물음에 참모가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 같아서는 적어도 한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힘없이 일어선 베흔은 계속해 몰려드는 근위대 병사들을 가로질러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휴우......”

후방의 보고대로, 당장이라도 황성을 집어삼킬 듯 몰려들고 있는 근위대 1군단의 후미에 플라칼 가의 붉은 사자문양 깃발, 그리고 은백색 중장기병 갑주가 지평선을 온통 뒤덮은 채 당장이라도 비수를 내지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스코프로 확대시켜 본 그 대오의 선두에는 가슴에 딸의 피얼룩이 그대로 남은 갑주 차림의 카나르 플라칼 경이 한 손에 창을 움켜쥔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플라칼 가 놈들이 왜.......”

응급처치를 받던 셈이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베흔에게 다가와 물었다. 베흔은 그런 그에게 건너편 플라칼 가의 숙영지 쪽을 가리켰다. 기병대의 조금 더 후방에는 플라칼 가의 5만여 보병대가 숙영지를 마치 상자처럼 사방을 빙 둘러 이룬 굳건한 방진이 보였다. 그들이 대오를 이룬 채 창끝을 향하고 있는 방향은 틀림없이 연합군 진영이었다. 저들이 정말로 공격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최소한 저들이 연합군을 더 이상 동지로 보지 않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플라칼 가가.......이탈했어......”

“예에?”

셈의 턱이 떨어졌지만 지금 베흔에게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부서진 동북문,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반쯤 무너진 성벽, 그리고 불길과 연기에 휩싸여 있는 동맹군의 적치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통의 공성전에서 이렇게까지 이루어놓았다면 사실상 전투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적 황제까지 직접 뛰어나와 벌인 결사항전에 결국 막히더니, 이젠 남부 놈들의 내분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는 생각이 그의 심장을 통째로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병력을 얼마나 잃었지?”

“우리 군단에서 보고된 것만 부상자 포함 1천 5백 정도입니다.”

베흔이 굳어진 얼굴로 머리를 싸쥐었다. 그때, 후방에서 다시금 플라칼 가의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끊어지는 그 소리는 ‘전군 돌격준비’를 명하는 것이었다.

“어떡하죠? 이대로 배후공격을 받으면 자칫 전멸입니다.”

셈이 다리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물었다. 베흔은 힘겹게 휘청거리는 그의 잘린 다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비록 가디언의 강인한 체력으로 이렇게 버티고는 있지만 그는 계속 식은땀을 흘리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잘린 다리보다 이 상황이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단을 망설일 수는 없었다.

베흔은 어느새 흙먼지로 희뿌옇게 변한 머리칼을 움켜쥐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어렵게 잡은 승기를 놓칠 수는 없지. 카나르 저 새끼가 원하는 게 우리가 피눈물 흘리면서 물러나는 것일 테니까.”

카나르 경의 속셈을 바로 읽어낸 베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대장, 지금 상황에서는.......”

“2군 기병이 얼마나 도착했지?”

“1만정도 도착했지만 3천은 플라칼 가 소속이라 그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어떡하시게요?”

셈의 물음에 베흔이 냉큼 대답했다.

“같은 남부 놈들끼리 싸우게 하는 건 좀 그러니.......외곽에 동부기병 2만이 있지? 그네들로 플라칼 가를 봉쇄하고 2군 나머지 기병들로 동부기병들 자리를 메워라. 우리는 그동안 어떡해서든 여기서 결판을 내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지.”

“하지만 동부기병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예비 기동병력입니다. 샤마시 평원에 있는 적 예비병력 규모를 생각하면 2군 기병들로 그들을 봉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

“알아! 누군 모르냐고! 그 놈들이 오기 전에 여기를 끝내버리면 되잖아!”

구사일생하고 어렵게 후방으로 돌아온 카렐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몇 군데 베이고 긁힌 작은 상처를 빼면 큰 부상은 없었지만 독감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이 문제였다.

“시알피는?”

카렐은 근위대와 아메샤 스펜타가 팽팽한 힘대결을 벌이고 있는 전장을 돌아보며 헐떡이는 숨을 애써 감추었다.

“허벅지에 부상을 입어서 며칠간은 타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다른 말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내 덩치를 싣고 제대로 달릴 말이 많지 않을 텐데.”

카렐은 시동이 가져온 진한 코코아를 삼키며 처음으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헐떡거리고 있던 그에게 다룬이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총리 각하의 연락입니다. 30분 전, 플라칼 가에서 ‘비공식적’으로 보내온 전갈입니다.”

쪽지의 내용을 힐끔 읽은 카렐이 다룬, 그리고 베아트릭스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다룬이 짧게 덧붙였다.

“폐하의 명을 받자올 수가 없는 상황이라 동맹군 총사령관이신 자이센 총리께서 30분 전 긴급명령권을 사용하셨습니다. 제네르 하크로딘 상장군과 시로 대장군께서 1만5천의 기병과 1만의 아메샤 스펜타를 이끌고 이곳으로 오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건무성에 주둔중인 아쉬드 하지즈 장군에게도 1만의 서부연합군을 이끌고 즉시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래, 역시 페로답군. 내 허락만 마냥 기다렸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으니.”

카렐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대담한 페로가 하늘이 준 이런 기회를 고작 명령권 따위만 따지며 놓치고 앉아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젠 바깥에서 한판 벌일 시간인가.......”

카렐은 어느새 고착상태로 흘러간 동북문 안쪽 광장의 싸움을 지켜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황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적을 몰아내기는 힘들어진 이상, 이젠 바깥에서 싸워 줄 부대들에 이 전투의 승패가 갈릴 터였다.

“역시 베흔 놈인가. 순순히 물러나 줄 생각은 없나보군.”

플라칼 가 보병대와 기병대 전체를 거느리고 직접 선봉에 선 카나르 경은 플라칼 가 제후군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한 동부기병들과, 여전히 동북벽의 공성을 계속하고 있는 근위대를 쳐다보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베흔은 공성전을 포기하는 대신, 예비대로 있던 동부기병들을 동원해 일단 플라칼 가를 봉쇄하고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샤자한 공이 이끄는 2만여의 동부기병들이 3천의 플라칼 가 중장기병, 그리고 5만여의 보병대 주변을 마치 위협하듯 맴돌았지만 이미 지난 몇 달간 동부에서 진절머리 나도록 그들과 맞서 온 플라칼 가 병사들에게 이런 상황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뒤바뀐 건 자신들이 ‘지지하는 황제’일 뿐 상황은 이전과 똑같았다. 그리고 이번엔 제후인 카나르 플라칼 경이 몸소 그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과.

“보병대는 제대 단위로 기병대 측면과 후미에 방진을 펼쳐라. 버티기만 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둔한 우리가 괜히 먼저 덤벼서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다. 이 자리에서 동맹군 예비대가 와 줄 때까지만 버틴다.”

가문 보병대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카나르 경이 바로 지시를 내렸다. 그의 명령을 받은 중장보병대는 평소의 무장대로 큰 사각방패, 그리고 창이나 짧은 검을 쥐고 120명 단위로 사각의 대오를 굳건히 이룬 채 마치 사열식을 하듯 천천히 움직여 기병대의 후면과 측면에 마치 가시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껏 동부기병의 그 엄청난 돌격에도 단 한 번도 쓰러져보지 않았던 플라칼 가 보병대만의 굳건한 위용이었다.

“그동안 두들겨 맞았던 것이 도리어 약이 되었는지도 모르지.”

카나르 경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믿음직한 병사들을 둘러보며 기묘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보병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완전히 무너져보지는 않았습니다. 동부 놈들을 상대로 자신감이 없는 것이 이상하지요.”

헤즈가 어깨를 당당하게 펴며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동맹군이 코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차피 공격을 해 오지는 않을 거다. 지금은 우리를 묶어두고 공성전에 훼방을 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뿐일 테니까.”

카나르 경은 점점 늘어나는 동부기병들의 숫자에도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주변을 엷게 에워싼 동부기병들 역시 그간의 전투에서 경험한 플라칼 가 보병대의 견고함 때문인지, 아니면 카나르 경의 말대로 애당초 일을 크게 만들지 않도록 ‘견제’만 하려는 속셈인지 어느 거리 이상 접근해오지는 않았다. 바로 카나르 경이 바라던 그대로였다.

그때, 공성을 하고 있는 근위대 쪽에서 흰 깃발을 든 누군가가 말을 타고 플라칼 가 쪽으로 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카나르 경도 몇 번 본 일이 있던, 베흔의 참모 중 한 명이었다. 카나르 경이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품었다.

“똥줄이 타나보지? 시간 좀 끌 수 있겠군. 저 새끼도 그럴 생각으로 보냈겠지만.......아마 시간이 자기네 편인 줄로 알고 보낸 것이겠지?”

기병대 주변에 새카맣게 포진한 플라칼 가 보병대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 온 그 사자는 말에서 뛰어내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근위대장님의 명을 받자옵고 왔습니다!”

그가 내민 건 전장에서 급히 흘겨 쓴 듯한 편지 한 장이었다.

“아버지, 웬만하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심이.......”

편지를 펼쳐드는 아버지에게 헤즈가 애타는 목소리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카나르 경은 마치 얼음처럼 굳어버린 표정으로 그의 말은 듣지조차 않았다.

“급하긴 급했나.”

카나르 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베흔이 자필로 휘갈겨 쓴 그 편지에는 릴라크와 미노아에게 벌어진 일이 너무도 유감이라는 빤한 인사치레부터 시작해서 자신과 근위대는 그 일에 전혀 관계가 없었음을 설명하는 구구한 문장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 전투가 끝나는 대로 책임자를 엄중히 문책하고, 또한 플라칼 가를 더 이상 공성의 일선에는 내보내지 않을 테니 병력을 모두 거두고 숙영지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하라는 친절한 당부까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본 사자는 카나르 경에게 바싹 다가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귀엣말을 건넸다.

“원하신다면 히르직스 경을 ‘비공식적으로’ 넘겨드리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순간 카나르 경이 눈가를 씰룩거렸다. 이미 3번이나 누군가를 배신한 그 작자를 베흔 역시 믿고 계속 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책임자를 문책한다고?”

“예.”

“그럼 최고제후의 목을 베어 내 앞에 가져올 수 있나?”

순간 사자가 움찔했다.

“책임자가 최고제후인데 도대체 누가 누굴 문책한다는 말이지? 그 밑에 몇 놈 족쳐서 날 달래볼 생각이라면 애당초 접는 게 좋을 거다. 최고제후의 목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은 우리 가문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우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거다.”

카나르 경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사자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물론 카나르 경도 자신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근위대장께서 가장 현실적인 안을 제시하셨으니 경께서도 조금만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평소 같았으면 이대로 힘없이 돌아갔을 사자였지만 그는 카나르 경을 계속 붙든 채 말을 이었다. 물론, 사자에게 ‘협의가 되던 안 되던 시간이라도 끌어라’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으리라는 것쯤은 카나르 경도 눈치 채고 있었다.

아이러니지만, 의미 없는 말싸움으로 시간을 끌겠다는 속셈에 있어서는 카나르 경 역시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베흔은 황도를 무너뜨릴 시간이, 카나르 경에게는 동맹군이 와 줄 시간이 각각 필요했다. 둘 중 어느 쪽의 시간끌기가 ‘성공’으로 나타날지는 전적으로 황도 주둔 동맹군, 정확히는 동북문을 지키는 카렐, 그리고 동맹군 예비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급히 달려오고 있는 제네르와 아쉬드 하지즈 장군의 손에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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