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28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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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을 지켜보던 제롬이 자신의 한 번의 실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결과로 돌아온 것인지를 깨달은 건 1만이 넘는 동맹군 기병대가 동북쪽 언덕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다급한 연락을 접한 순간이었다. 후방에서 들려오는 슈로 기사단의 진격나팔소리를 들은 순간,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플라칼 가 저 개새끼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후방의 언덕을 까맣게 덮은 기병대를 눈으로 확인한 제롬이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동북문을 뚫고 들어간 베흔의 근위대 병력은 아메샤 스펜타와 밀거니 밀리거니 하는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면서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정작 바깥 상황은 당초 플라칼 가가 처음 반기를 들었을 때보다 도리어 더 절망적이었다.
“남쪽 관산수변에도 서부 낙타병들이 상륙하고 있습니다! 보병대까지 함께 왔다면 적어도 1만은 될 것 같습니다!”
제롬은 참모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황도 남쪽, 남부연합군의 관심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던 남쪽 강변에 어느새 수백 척의 동맹군 선박이 정박해 서부연합군 낙타병과 보병대를 쏟아내고 있었다.
“뭐야, 도대체 몇 군데에서 싸워야 하는 거야!”
제롬은 머리를 싸쥐며 이번엔 뒤를 돌아보았다. 남부기병대를 돌파한 라손의 슈로 기사단은 델루지 가 후방의 숙영지를 기습해 목숨과도 같은 보급품과 숙소에 모조리 불을 지르고 있었다. 후방이 혼란스러워지면서 한참 공성에 열중하던 델루지 가와 세닉 가 군대는 이미 우왕좌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동부기병들을 내보내서 저놈들을 빨리 잡으란 말이야! 히르직스! 히르직스 그 개새끼는 어디 갔어? 자기 부대가 작살나고 있는데 지금 어디 있냐고!”
“동부기병들은 플라칼 가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히르직스 경은 지금 숙소에서 술에 취해 있다고.......”
참모 한 명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미친 새끼 당장 잡아들여’라며 소리를 지르려던 제롬은 그제야 자신이 조금 전 그의 부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렸다.
“제기랄.”
이를 빠드득 갈던 제롬은 문득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탑 주변에는 남부의 최정예 기병대인 델루지 가 근위기병대, 그리고 제롬의 바로 옆을 지키라며 베흔이 보내 준 가디언 전차대 2백여대가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내며 포진해 있었다. 중장갑을 온통 두른 전차마(馬) 2~6마리가 끄는 육중한 전차에는 말을 모는 전차병과, 가디언으로는 예외적으로 중장갑으로 무장한 가디언 전투병이 2인 1조가 되어 올라 있었다.
당초 5백에 달했던 저들도 탄현성의 전투에서 북부보병들의 육탄저지에 절반이 넘는 큰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가디언들로만 이루어진 저 정예 전차병들은 최소한 기병들을 상대로는 ‘천적’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잠시 입맛을 다시던 제롬은 앞에 놓여있던 자신의 투구와 창을 덥석 집어 들었다.
“내 근위기병대 2천하고 흩어진 2군 기병들을 여기저기서 괜히 소모시키지 말고 모조리 여기로 모아라. 슈로 기사단인가 뭔가 저 새끼들 내가 직접 잡을 테니.”
“제네르하고 싸우게? 진심이야?”
굳은 표정으로 내내 잠자코 있던 마누엘 경이 전장으로 직접 나서려는 조카 제롬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제롬이 팔을 빼내며 냉랭하게 대답했다.
“철없던 때 고작 몇 번 잔 것뿐이죠.”
“동거까지 했던 여자를? 허, 결혼 승낙해주지 않으면 가출하겠다고 형님한테 떼쓰던 걸 내 아직도 기억하는데?”
마누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조카의 팔을 다시 붙들었다. 제롬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의 팔을 떨쳐냈다.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까지 들먹이는 겁니까.”
“웬만하면 다른 사람 내보내. 괜히 감정에 휩쓸렸다가는.......”
제롬이 말리는 마누엘을 거칠게 밀어내며 통나무처럼 굵직한 오른팔을 번쩍 들어보였다.
“그때는 산 입에 키스를 했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이 손에 든 수급에 키스를 해 보여드리죠.”
제롬의 큰소리에 마누엘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지만 차마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스스로의 말대로, 제롬은 일단 말을 타고 전장에 나서기만 한다면 가디언이 아닌 한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는 맹수로 돌변하곤 했다. 5차 혼란기 때는 오르마즈의 오른팔이었던 맹장 바스토프 베멜러를 전장에서 쓰러뜨린 그였고, 한번은 가디언까지도 죽인 일이 있었다.
“그년 대가리를 가져올 때까지 숙부님은 여기서 구경이나 하고 계시죠.”
단호하게 선언한 제롬은 투구를 덥석 눌러쓰며 지휘탑에서 급히 뛰어 내려갔다.
“모두 나를 따른다! 적 기사단장 년을 잡으러 간다!”
말에 오른 제롬에 큰 창을 번쩍 치켜들며 아직 미처 준비되지도 않은 근위기병들을 놓아둔 채 가디언 전차대만을 거느리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최고제후의 느닷없는 행동에 놀란 기병들이 각자 하던 일들을 모두 때려치우고 개미떼처럼 사방에서 몰려들면서 그 숫자가 무섭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2천의 근위기병대, 사방에 흩어진 남부기병들까지 제대로 불러들인다면 적어도 7천은 될 터였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제롬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2백의 가디언 전차대가 위협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제롬은 그렇게 조금씩 숫자가 불어나는 기병들을 거느리고 제네르가 있을 동맹군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멀어져가는 조카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마누엘 경이 욕을 내뱉었다. 그는 그다지 똑똑하거나 특출난 정치감각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지만 코메트 부대 시절부터 쌓아 온 오랜 경륜 하나만으로 그 오랜 기간 동안 항상 제국의 승자 편에 서서 살아올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러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던 그였다.
“이제 여긴 내 책임인가.”
그가 손을 툭툭 털며 지휘관석에 섰다. 제롬이 명목상 총사령관이기는 하지만 기병대와 함께 저렇게 박차고 나가버렸으니 공성을 하고 있는 남부보병대의 실질적인 지휘는 이제 그의 몫이었다.
“황도 북쪽에 예비대로 있는 호지 가 놈들 내려보내서 동부기병들하고 교대시켜. 그리고 동부기병들 숨통 트이면 그네들로 최고제후를 돕도록 하고......”
혼자 남은 마누엘은 돌아가는 판세를 열심히 새로 짜며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플라칼 가에 발목이 잡혀있는 동부기병들을 어떻게 해서든 전장에 복귀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물론 자신의 계획을 제네르 역시 예상하고 있었으리라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황성 북쪽, 산악에 주둔한 4만여의 호지 가 보병대는 산악을 이용한 동맹군의 우회기동을 막고, 성을 점령한 이후 적의 도주를 막기 위해 배치한 예비대였다.
“성 안에 있는 놈들이 북문으로 기어 나와서 후미를 치면 어쩌고요? 성 안에도 3천이 넘는 적 기병이 있습니다.”
“성 안의 적군들 꼴을 봐, 놈들이 그럴 여유가 있겠나. 북문은 그냥 놔둬도 상관없어. 도주로 막을 2,3천 정도만 놔두고 다 빼버려.”
마누엘이 황성을 다시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언뜻 보기에도 황성의 수비군은 동북문에서 벌이는 근위대와의 혈투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상황이었다.
“조금 전 남쪽에 상륙한 서부연합군 지휘관은 아쉬드 하지즈 장군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때, 첫 번째로 들어온 달갑지 않은 보고에 마누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병력은?”
“낙타병 3천에 장갑보병 2천, 경보병 5천까지 총 1만입니다.”
“기병대는 뒤에서 치고 그놈들이 옆에서 치려는 수작이군. 우릴 작살내려고 작정을 했나.”
마누엘이 이를 갈았다.
“근위대에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으니 동벽 공격중인 우리 남부 보병대에서 예비대 2만만 빼내서 서부 놈들만이라도 일단 막아.”
“공성중인 부대에서 2만이나 동원할 여유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피해가 워낙 커서.......게다가 적에겐 중무장 낙타병이 3천이나 있어서 기동성도 갖추고 있는데.......”
참모 한 명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지만 마누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후방에서 뺄 것 없어. 지금 전황은 동북문의 근위대 놈들이 얼마나 빨리 돌파하느냐에 달렸지 우리 남부 보병대의 역할은 그냥 견제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공성중인 군단 2개를 아예 빼서 후방하고 측면을 지킬 예비대로 돌려.”
“하지만 기병을 최고제후께서 모조리 이끌고 나가셨는데 서부 낙타병을 막기에는 기동성이.......보병대가 재정비하고 돌아오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이런 개 같은......”
기병대의 부재를 절감한 마누엘이 골 아픈 듯 머리를 싸쥐며 남쪽 강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참모의 말대로, 막 상륙한 서부연합군 낙타병들은 보병들보다 앞장서서 바로 돌격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주변을 지켜주어야 할 동부기병들이 플라칼 가에 묶여있고, 그들을 대신해 배치한 2군 남부기병들까지 제롬이 조금 전 모조리 데리고 나갔다보니 저들을 저지할 마땅한 기동병력은 전무했다.
“아쉬드 하지즈.......”
마누엘이 눈가를 찡그렸다. 서부의 하지즈 장군은 남부의 히르직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두말할 나위 없는 서부 최강의 무장이었고, 정치적인 감각은 그다지 없지만 보기(步騎) 모두에 걸쳐 전략전술에 능한 무장이었다. 저런 자가 옆구리로 파고들었으니 공성중인 남부 보병대에는 치명적이었다.
“서부 낙타병들은 워낙 우리 보병대와의 싸움에도 익숙한 놈들이라......”
“나도 알아.”
마누엘 경이 퉁명스레 대답하며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진 하늘을 문득 올려보았다. 오후에 시작한 싸움이 생각 외로 길어지면서 이제 야간전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곳곳에서 환한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낮보다 한결 차가워진 공기에 그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시간을 벌자는 것뿐이야.”
이런 대답을 하며 마누엘은 자신의 처지가 퍽이나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적군의 몇 배나 되는 병력을 지니고도 지금 도리어 궁지에 몰려있는 건 연합군 쪽이었다. 물론 그는 아직까지 자신이 플라칼 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헤아리고 있는 큰 실수를 범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서부 낙타병 부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참모가 전장을 가리키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시 강조했다.
“왜?”
고개를 다시 들었던 마누엘이 움찔했다. 공성하는 보병대의 측면을 치는 듯 보이던 낙타병, 그리고 서부연합군들은 느닷없이 방향을 틀어서는 지금 그가 있는 연합군 사령부를 향해 바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깜짝 놀란 마누엘이 지휘탑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다. 제롬이 사령부를 지키던 2천의 근위기병대와 2군 기병대, 심지어 가디언 전차대까지 모조리 이끌고 나가면서 지휘탑 주변에 남은 건 6천 정도의 보병대가 전부였다.
제롬이 기병들을 모조리 이끌고 북쪽으로 빠져나간 것을 재빨리 눈치 챈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즉흥적으로 공격방향을 남부연합군 사령부로 돌린 것이 확실했다.
“빌어먹을! 그 많은 우리 기병들은 다 어디로 증발한 거야!”
마누엘이 분통을 터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있지도 않은 기병이 나타나 줄 리가 없었다.
“있는 보병들 모조리 동원해서 사령부를 일단 지켜! 아까 말한 2만의 보병대도 빨리 이쪽으로 보내고! 빨리!”
다급해진 마누엘은 스코프를 최대한 확대시켜 돌격해오는 서부 낙타병부대의 선봉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새하얀 백마에 올라 소름끼치는 커다란 극(戟)을 움켜쥐고 흩어진 보병들을 쓸어넘기며 돌진하는 건 그의 눈에도 익은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었다.
“놈들 중 일부가 우리 발리스타를 덮치고 있습니다!”
“알아, 알아. 그러니까 빨리 보병대를 움직이랬잖아!”
마누엘이 짜증을 부렸지만 기동병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로서도 아군 진영 내를 마구 휘젓고 다니는 적 낙타병을 상대할 도리가 없었다. 공성전을 펼치던 보병 중 후미의 병력이 방향을 돌려 사령부로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그들도 느려터진 것이 특기인 남부보병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최고제후한테 연락해서 여기 기병들이 빨리 필요하다고 좀 말해! 지금 사령부가 작살나게 생겼으니 동부기병이든 남부기병이든 전차대든 좋으니 아무 놈들이나 제발 좀 보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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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과 제네르의 이야기는 출판본에서 나온 것이라 조금 생소한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황도 공성전의 전황도는 팬카페(http://cafe.daum.net/TheIronVein)에 올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