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30화 (529/1,132)

< -- 530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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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연합군이 사령부를 향해 돌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제롬은 힘들게 긁어모은 7천의 기병을 데리고 이제와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돌아간다 해도 저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설사 사령부가 무너지고 그곳의 많지 않은 병력이 몰살당한다 해도 근위대가 황성만 뚫어내면 그와 연합군의 승리였다.

그는 마누엘의 다급한 지원 요청에 ‘중요 자료만 챙겨서 최대한 빨리 도망쳐라’라는 명령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대신 근위대 후방으로 접근하는 슈로 기사단을 뒤쫓아 돌격하고 있었다.

“적 기사단장 제네르 그년은 도대체 어디 있나?”

잠시 말을 멈춰 세운 제롬이 투구의 사이트를 올리고 거대한 창을 뽑아 겨드랑이에 끼며 짜증스레 물었다.

보통의 무장은 휘두를 엄두도 내지 못할 그의 무거운 창은 이미 5차 혼란기 당시 반군 지도자였고, 오랜 기간 오르마즈의 오른팔이었던 바스토프 베멜러 장군의 목을 베었던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눈에 확 뜨일 은빛 찬란한 갑옷, 그리고 망토에 새겨진 주작의 화려한 문장은 제국 4명의 최고제후 중 사실상 가장 강력한 그의 지위와 위엄을 멀리서도 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를 실은 붉은빛 거칠고 건장한 말은 당장이라도 돌격령을 달라는 듯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제자리를 힘차게 맴돌았다.

한참 전의를 불태우던 제롬에게 참모 중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와 알렸다.

“최고제후님! 북쪽 산악에서 내려오던 호지 가 보병대가.......”

“그놈들이 왜!”

계속된 안 좋은 소식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제롬이 격앙된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 4만여의 호지 가 보병대는 마누엘의 명령을 받아 동부기병 대신 플라칼 가를 봉쇄하기 위해 급히 남하하고 있던 부대였다.

“적 유목민 기병대 수천이 반대편 능선에 매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후미에서 기습을 받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에이, 씨발.”

제롬이 다시 짜증을 내며 자리를 빙 맴돌았다. 후방을 휘젓는 동맹군 기동병력을 제압하려면 플라칼 가에 묶인 동부기병들을 전장에 복귀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지만 또다시 발목이 잡힌 셈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모두 해결해야 하나.”

제롬이 이를 갈며 투구 사이트를 다시 내렸다.

“장군님! 적 기사단장 제네르 하크로딘의 행방이 확인되었습니다!”

참모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가 가리킨 곳은 플라칼 가를 포위하고 있는 동부기병대의 후방, 작은 언덕 위였다.

“놈들이 근위대를 공격하지 않고 대신 동부기병대를 선공해서 플라칼 가를 풀어주려는 것 같습니다.”

“왜?”

오직 제네르를 공격해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던 제롬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습관적으로 되물었다. 참모 역시 더듬거리며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근위대는 가디언도 섞여 있다 보니 기사단만으로는 공격하기 버겁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하긴, 근위대 1만 5천에 아무리 기병이라도 무작정 돌격하는 건 천하의 바보짓이지.”

제롬이 일단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병 보고에 따르면 후방에서 아메샤 스펜타도 오고 있다고 하니 그네들에게 근위대를 맡기고 저놈들은 플라칼 가와 연합해서 동부기병을 공격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놈들까지?”

제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독종’ 아메샤 스펜타라면 근위대에 버금가는, 아니 정신무장은 도리어 근위대를 능가하는 최정예병력이었다. 그들이 근위대의 후방을 친다면 천하의 근위대 1군단이어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참모의 말대로, 슈로 기사단 전체가 동부기병대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는 듯, 플라칼 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조금씩 집결하고 있었다.

“동부기병대는 우리 연합군에서 가장 믿을만한 최정예 기동병력입니다. 저대로 놔뒀다가는.......”

하필 동부를 도와야 한다는 말에 제롬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말고삐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기사단 놈들하고 1대1로 싸우면 우리 기병이 뒤지는 건 사실이니.”

제롬은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싫은 말을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다른 놈은 필요 없다. 너희들이 주력부대를 붙들고 있는 동안 가디언 전차대와 내가 돌격해서 1차로 제네르 그년을 직접 죽이겠다.”

조금 전 자신의 전력을 꼬집어낸 마누엘에게 괜한 오기가 돋은 제롬이 멀리 슈로 기사단이 집결중인 언덕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년을 최대한 빨리 죽이고 전차대로 기사단의 후미를 칠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어라.”

“하지만.......적장 제네르는 약간의 부상을 입은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일기투에 응해주지도 않을뿐더러, 부상을 입은 적장과 일기투를 하심은 각하의 명예에도 누가......”

“명색이 최고제후인 내가 고작 배신자 패거리의 하급귀족하고 절차니 예의 따위 따져가면서 ‘정식’ 일기투를 하라고?”

제롬이 참모에게 버럭 역정을 냈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는 근위대 가디언 전차대를 빙 둘러보았다. 천하의 슈로 기사단이어도 이들 앞에서는 그저 나약한 ‘시민병’에 불과할 뿐이었다.

“전차대와 함께 돌격해서 그냥 죽이면 끝이다. 그년만 죽이고 나면 바로 방향을 돌려 놈들의 주력부대를 쳐부수겠다. 모두 나를 따른다!”

제롬이 창을 번쩍 치며들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주변을 에워싼 전차대를 선두로 2천여의 근위기병, 그리고 어렵게 수습한 5천여의 2군 남부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조금 전 참패의 ‘복수’를 위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이 깔린 황궁 동쪽 평원은 이번 전투의 승부를 마지막으로 가를 연합군의 반격과 함께 무섭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제네르가 근위대 후방을 치는 대신 동부기병으로 목표를 수정한 건 나름대로 복잡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롬 참모진의 예상처럼, 기사단으로 근위대를 치는 것이 전력을 비교해 보아도 그다지 현명치 못하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플라칼 가 놈들이 연합군에 확실히 등을 돌리게 만들어야 해.”

제네르는 선봉대에서 돌아온 부장 발리에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발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플라칼 가는 이미 우리 편으로......”

“아아니.”

제네르가 딱 잘라 대답했다.

“플라칼 가가 최고제후에 항명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 연합군과 교전까지 벌인 건 아냐. 보다시피 동부기병들도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고, 플라칼 가 놈들도 몇 시간동안 동부기병에게 선제공격은 하지 않고 있지. 우리가 이미 도착했는데도 말이야. 왜 그러겠나?”

“그럼.......”

발리가 말꼬리를 흐리며 상관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 페로와 있었던 작은 의견대립에서 보였듯, 제네르는 아직 플라칼 가를 완전히 믿지 않고 있음이 확실했다.

“플라칼 가는 연합군이든 우리든 아직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야. 교활한 카나르 경은 가능한 이 상태로 움직이려 들지 않을 거야. 괜히 움직여서 선택할 수 있는 패를 제 손으로 줄이지는 않겠지. 이 전투의 결과가 어느 정도 기울면 그제야 슬그머니 나서서 승전의 단물만 빼먹으려는 속셈이겠지.”

“그렇.......군요.”

발리가 걱정스런 얼굴로 동부기병 너머, 플라칼 가를 쳐다보았다. 제네르가 말을 이었다.

“카나르 경의 분노도 지금은 극도로 치달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누그러들 테고, 그때는 더 계산적으로 나가려 들겠지. 그 전에 카나르 경을 어떻게 해서든 움직이게 해서 싸움에 끌어들여야 해. 그러려면 여기서 동부기병들을 우리가 선제공격해서 공격을 재촉해야 한다. 코앞에서 우리가 싸우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

“상장군님, 명령하신대로 집결 마쳤습니다.”

“좋아, 모두 공격.......”

“상장군님!”

그때, 막 팔을 치켜들려던 제네르를 다른 참모 한 명이 달려와 급히 저지했다.

“바얀 부단장님의 급보입니다! 후방에 적 기병들이 재집결해서 이곳으로 진격중이라고 합니다! 그 선봉엔......”

“기병? 바얀 부단장보고 패잔병들 재집결을 막으라고 했는데 어떻게......”

“적 최고제후 제롬 공이 근위기병 2천을 직접 이끌고 나와서 바얀 장군님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집결한 병력만 7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근위대 가디언 전차대도 있다는 보고입니다.”

‘제롬’이라는 말에 제네르가 움찔했다.

“그래.......라손에겐 역부족이겠군.”

그는 말을 천천히 돌려 남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남부기병 7천으로 우리한테 돌격한다고?”

제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가디언 전차대가 있다고는 해도 남부기병들의 전력으로 보아 8천의 슈로 기사단, 그리고 4천의 슬레이프니르에게 수준도 떨어지는 남부 중장기병 7천만으로 정면 돌진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어떡할까요?”

부장 발리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제롬이 종종 무모한 짓을 저지르긴 하지만 최소한 바보는 아니지.”

제롬의 생각을 읽어낸 제네르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투구의 사이트를 내렸다. 발리는 그의 표정에 흐르고 있는 묘한 씁쓸함을 읽어냈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생결단하자고 덤벼오면 싸워줘야지 별 수 있나. 우리가 여기서 1차로 막을 테니 바얀 부단장이 후미를 치라고 해라. 잘만 하면 제롬 공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제네르가 문득 고개를 들고 야시 모드로 된 스코프를 작동시켰다. 주작 깃발을 높이 든 델루지 가 근위기병대를 선두로, 7천의 남부기병대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린 황궁 동쪽 평원을 가로질러 기사단이 있는 언덕을 향해 똑바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제롬 공은 틀림없이 나를 노리고 덤벼올 거다. 어쩌면 가디언 전차대가 함께 올지도 모르겠다. 내 근위기병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해. 특히 가디언 전차대는 극히 위험하니 절대 돌파를 허용하면 안 된다.”

제네르가 반사적으로 창을 겨드랑이에 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상장군님, 몸도 성치 않으시니 후방으로 최대한 물러나 계십시오. 본대는 제가 이끌겠습니다.”

부장 발리의 말에 제네르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롬에게 자신이 도망쳤다는 승리감을 안겨주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개인적인 호승심에 자신의 근위병과 참모진 모두를 위험에 몰아넣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내 근위기병이 5백이나 있으니 여기에 경기병 1천만 보태면 나 하나 지키기는 충분할 거다. 발리 넌 여기 있는 나머지 전부를 데리고 적에게 돌진하도록 해. 라손이 곧 2천을 데리고 와 줄 테니까 앞뒤로 포위해서 끝장을 내 버려.”

“예. 알겠습니다.”

처음으로 본대 지휘를 명받은 발리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 사이에도 제롬이 이끌고 오는 남부기병들의 거센 발굽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적이 옵니다!”

전위에 있는 경기병대에서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돌격해오는 남부기병들을 향해 경기병대가 넓게 포진하며 사격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제롬 공은 어디 있을까요?”

잔뜩 긴장한 발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 역시 제롬의 무시무시한 무공은 이미 들어 본 일이 있을 터였다. 이미 땅을 뒤덮은 짙은 어둠, 그리고 대규모 기병대가 일으키는 지독한 흙먼지 때문에 기병용 스코프의 야시 모드도 그다지 완벽하지는 못했다.

“가디언 전차대와 함께 있을까요? 그런데 그네들도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발리가 얼굴을 찡그렸다. 선봉에 세운 남부기병들 때문에 가디언 전차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네르는 상대의 생각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본대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적당한 시점에서 전차대를 끌고 확 튀어나올 심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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